EP·180
매순간이 늪에 빠진 악몽과도 같았다·
혈귀에게 지독하리만치 시달리는 꿈이었다· 황실의 인물들이 쓰러지는 꿈이었고 본인은 그 꿈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황녀 오로라는 수없이 자신의 목표를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하에서 보내야만 했던 8년이라는 세월간 다시 태어나겠다며 이를 갈았던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얕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 황녀로서 우뚝 서리라는 목표· 일련의 계획들을 이루기 위해서 익혔던 수많은 것들····
한 줄기의 빛이 너무나도 간절했기에 지상으로 올라간다면 그보다도 밝은 태양이 되려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지 않았는가·
“으····”
문득 엄청난 두통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제 머리를 감싸쥐면서 오로라는 눈을 뜨게 되었다·
우선 검붉은 결계가 다시 보였다·
궁중 마법사를 비롯한 황실의 인물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호흡하지 못했고 여기저기 유혈이 잔뜩 낭자한 채였다·
“아아····”
탄식을 토해냈다·
모든 광경을 확인한 뒤에야 모든 것이 그저 악몽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겪었는지 전부 떠올랐고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황녀님·”
“···!”
그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한 음색이 자신을 불렀다· 바닥에 처연하게 쓰러져있던 오로라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을 구해낸 장본인이 우뚝 서있었다·
“플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한 검은 앞머리 그 밑에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했다·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의연한 시선이었다·
마침내 그가 침묵을 깼다·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오로라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 탓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냈다· 몸도 마음도 전혀 녹록치 못한 상태였다·
“내 탓이야···· 내 탓····”
오로라가 그 뒤로도 반복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그중에서 알아듣기 쉬운 말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지금의 황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어쩌면 정말 제정신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로라를 평범한 인간들과 구분지어준 것은 다름아닌 ‘미래 예지’였다· 그러나 레헬른 언덕에서 줄곧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니 무력감을 느낄 법도 했다·
그러나 정신만 피폐해져도 모자랄 판에 그녀는 신체에도 크나큰 부상을 입었다· 더스크의 「동기화」로 인해서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풍경·
멸지(滅地)라는 표현에 어울릴 수 있게 이곳은 시체들의 무덤이 되어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야기한 것이 오로라 아닌가· 원인이 그녀 자신이었으며 책임져야하는 것도 그녀였다·
원수들이 허망하게 시체가 되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한 이들 중 누구 한 명 오로라에게 대충 충성을 다한 이가 없었으니까·
어디를 둘러보아도 정신에 치명타를 입을만한 것 뿐이고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플란은 잠시간 말없이 황녀를 바라보았다·
“아아아····”
오로라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머리를 들고있을 미약한 힘조차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없었다·
본인이 무엇을 해야할지도 알 수 없었고 설령 할 일을 깨닫더라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력감에 짓눌려 모든 의욕이 옅어진다·
그냥 한없이 막막할 뿐이었다·
결계를 해제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을까·
아니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플란에게 승부를 걸었던 것부터가 미련한 짓이었을까·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닫진 않았을 텐데·
“부정할 생각 없다· 전부 내 잘못이다····”
자신의 과오를 빠르게 인정하는 것만이 지금의 오로라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나도 같이 죽었어야 했다· 그랬어야만····”
오로라는 미약하게 중얼거렸다· 눈가에 맺혀있었던 눈물이 뒤늦게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
“안 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한 것은 플란이었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본인 탓임을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
“뒤따르는 책임이 있을 터· 그게 목숨은 아닙니다·”
가만히 듣던 오로라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본인이라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었을 뿐·
오로라는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기억하고 계십니까·”
플란은 그저 간단한 것을 물을 뿐이었다·
해답을 갈구하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녀를 향해 사내는 담담하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황녀께서는 약속을 이행하시면 됩니다· 아니····”
플란이 고개를 저었다·
“이행하시게 될 겁니다· 반드시·”
“약속···· 나비?”
“예·”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내기 이야기를····”
“내기가 있기에 이 상황도 생긴 겁니다·”
플란이 단호하게 오로라의 말을 잘라냈다·
“내기의 끝을 보기 위해 황녀님을 구했습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
“의미를 이해하셨습니까·”
오로라는 플란의 말을 이해한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만 플란이 쓰러져있는 오로라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왔다·
오로라는 여전히 처연하게 엎드려있는 채였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황녀인 자신은 볼품없이 쓰러져있고 플란은 당당하게 서있다니·
그는 오로라의 지척까지 온 다음 걸음을 멈추었다·
“황녀님·”
다음 순간 그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
오로라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플란의 눈을 마주했다·
“품어드리겠습니다· 이 약속이 있는 한·”
플란은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녀님께서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말 한 마디면·”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은 너무나도 유약하고 초라했다· 황녀라는 단어를 도저히 연상시킬 수 없을만큼 추레한 몰골이었다·
“충분합니다·”
“···!”
오로라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떠한 모멸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라의 모습을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말 그대로 ‘약속’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오로지 말투와 눈빛만으로 이해시켰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짧은 질문이 오로라를 멍하게 만들었다·
“····”
오로라는 어떠한 대답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나 플란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등을 돌렸다·
화아아아─·
때마침 검붉은 결계가 해독되었다·
불쾌한 광경은 사라지고 하늘에서는 서광이 밀려든다· 동이 막 튼 것인지 찬란한 햇빛이 오로라와 플란을 쓰다듬듯 비추었다·
“····”
오로라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 움직임이 이내 굉장히 빨라진다·
나중에는 비로소 입도 움직였다·
“···지키겠느니라·”
플란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채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로라는 그의 퇴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플란은 유유히 멀어져가며 혈귀들의 잔해를 치워내기 시작했다· 뭉뚱그려진 장기 피 그리고 살점···· 무엇하나 역겹고 추한 요소일 뿐인데·
플란은 결코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이 그렇기에 더더욱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느껴졌다·
플란의 등을 바라보며 오로라는 생각했다·
사내가 저렇게나 거대했단 말인가·
내려다보려 들었을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올려다보니 이제서야 보이는 듬직함이었다·
그때 해제된 결계를 뚫고 여러 인물들이 나타났다·
“황녀님!”
“괘 괜찮으십니까!”
도착한 황실 인물들이 오로라를 곧바로 부축했다·
강한 탈력감이 느껴진다· 긴장이 풀리자 한 순간에 몸이 서늘해지고 맥이 풀렸다·
멀어지는 플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오로라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
얼마만에 눈을 떴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황실의 천장 자신을 부드럽게 감싼 침대의 기운·
오로라는 의식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눈만 깜빡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은 역시 뻔한 것들이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할까· 일은 어떻게 마무리 된 것일까····
멍하니 상념에 젖어있던 오로라를 일깨운 것은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는 관료의 목소리였다·
“황녀님 보고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오로라는 가녀린 손으로 침대 맡의 종을 울렸다· 문 밖에서 보고를 올려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전에 물을 것이 있었다· 오로라는 문의 지척까지 발걸음을 옮긴 다음 물었다·
“이봐 내가 얼마만에 일어났느냐·”
“예? 일주일 정도 되었습니다·”
“일주일····”
그때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가만히 되새김질하던 오로라에게 벼락같은 말이 내려꽂힌 것은·
“레헬른에서의 일은 무사히 처리되었습니다· 황녀님께서는 안심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안심·
안심이라·
말을 가만히 곱씹던 오로라의 머릿속에 문득 불안한 생각 하나가 피어올랐다·
일이 정상적으로 처리되었다면 자신이 이토록 안온한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설마 이내 식은땀이 흘러내릴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황녀님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이렇게 무사하셔서 너무나 다행입니다·”
“플란·”
오로라는 가까스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벌컥 문을 열어버린 뒤 물었다·
“플란은 어떻게 되었느냐?”
오로라는 수없이 초조해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만큼은 벌어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오로라의 다급한 시선을 마주한 늙은 관료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로라의 기대가 무참히 부서졌다·
“이 일전에 서명하셨던 내용대로 했습니다·”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레헬른 언덕에서 연락이 닿지 않게 되거든 수행할 임무들을 상세히 써두셨었죠·”
“그 그걸····”
“예· 하나도 빠짐없이 완수했습니다· 우선 마탑 건설은 취소 되었고 마법 학부에도 압박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모두 황녀님이 철두철미하신 덕분····”
“철두철미는 무슨···!”
오로라가 발악하듯 소리를 쳤다· 관료는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철회해! 전부 철회해라!”
관료는 오로라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를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로라는 관료를 제쳐두고서 복도로 뛰쳐나갔다·
일주일·
그 기간이 지금은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한없이 불안하고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약속 약속을····”
황녀는 있는 힘껏 황궁을 내달렸다·
플란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반드시·
“헉 허억···!”
벌써부터 턱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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