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2
프리츠 영지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가주 트릭시의 방· 그곳에 발을 들이며 오로라가 느낀 감상은 정확히 그러했다·
불꽃처럼 따스하고 화염처럼 열정적이다· 늘 활기가 넘친다· 그런 소문들과는 아예 반대되는 풍경이지 않은가· 물론 이곳을 이렇게 만든 것은 오로라였다·
레헬른 언덕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직 그 전부가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검붉은 결계 내부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것이 플란과 오로라였으니까·
오로라는 문득 ‘트리비아’라는 공책을 꺼내들었다· 황실의 관료가 건네준 것이었다·
[*마탑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무기한 중지 상태야·]
[*마법 학부 분위기가 이게 뭐냐····]
[*플란은 어디로 간 거고?]
자신들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마법 학부의 학생들은 의견을 활발하게 교류했다· 물론 각자의 의견이 천차만별로 갈렸지만 말이다·
황실을 차마 의심하지 못하는 이들은 레헬른의 사건 사고를 황실 차원에서 겨우 수습한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몇몇 익명들은 도리어 황실의 무능함을 탓했다· 굉장히 많은 양의 정보가 갱신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으니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애초에 누가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황실과 관련된 것을 언급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다보니 죄다 익명이었고 익명으로 퍼지는 이야기는 공신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익명과 실명을 막론하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이야기들 사이에서도 공통 분모가 있었으니 단 한 명을 향한 이야기만큼은 거의 예외가 없었다·
[*수접제에 참가했던 수인이 그러는데 플란은 오히려 다른 참가자들을 구해줬다고 하던데?]
[*수인들은 거짓말 잘 안 하지 않나?]
[*그 이야기 나도 들어본 것 같은데·]
[*엘프들도 그랬어·]
플란·
그가 위험에 빠진 참가자들을 훌륭하게 구해냈다는 내용· 실력도 실력이지만 종족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구해냈다는 점 때문에 크게 화제를 탔다·
누구라도 위기에 처하면 소중하고 익숙한 것들에 우선 순위를 두고 보호하는 법이다· 하지만 플란은 그렇지 않았다·
종족과 신분을 막론하고 마법을 가르치겠다는 여느 날 오리엔테이션의 신념 그대로 그것을 몸소 행동으로 보이며 실천했다·
[*플란은 그래서 어디에 있는건데·]
[*나타나서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하····”
오로라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트리비아를 덮었다· 세상은 이렇게나 떠들썩한데 프리츠의 영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없이 진행될 줄 알았던 공사가 보란듯이 중지되었다· 이곳은 사실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땅이 되어버렸고 이 커다란 땅을 유지하기 위해 영지민들은 무작정 다른 일을 찾아 나서야했다·
설령 그게 막노동이라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프리츠 가문은 손님을 받을 여력조차도 없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외는 존재했으니· 황실의 핏줄이 바로 그러했다·
그게 현재 오로라가 트릭시의 방에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황녀를 아무렇게나 접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앞에는 고급진 차가 놓여있었지만 오로라는 그것에 조금도 입을 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자신이었다·
대참사가 레헬른 지역만의 일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당연히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프리츠의 영지 전체가 통째로 기울어있었다·
“플란····”
트리비아는 플란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오로라 역시 현재 그의 행방을 미치도록 궁금해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여명’이라 칭할 빛을 안겨준 이· 그날의 진상을 낱낱히 밝혀버릴 법도 한데 그는 그냥 묘연하게 행방을 감추어버린 모양이었다·
“흐음·”
시간이 한참 지나도 트릭시는 오지 않았다·
오로라는 문득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애장품인가····”
시계 벨트 장갑···· 무엇하나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휘황찬란한 전시대 안에 들어있었다·
문득 황녀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너무나도 황량해진 영지· 마탑의 건설을 중지한 모습은 추레하여 황량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오로라가 창문에 조용히 손을 얹은 순간·
“마탑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극상의 재료 메르틸이 필요하죠· 황녀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거에요·”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았다·
어느샌가 문이 열려있었고 이 대저택의 주인 동시에 프리츠 가문의 가주· 트릭시가 서있는 채였다·
트릭시의 남색 눈동자가 가라앉은 채로 오로라를 응시했다·
아니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정확히는 그렇지 않았다· 트릭시는 오로라의 이마나 볼 부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라는 그 이유를 감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트릭시는 현재 오로라의 눈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불쾌한 것이다· 아주 명백히·
“아시다시피 메르틸은 부르는 게 값이에요· 까다롭기는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세 시간이라도 정제하지 않으면 곧바로 상해버리는데····”
트릭시가 눈빛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회색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메르틸은 척 보기에도 흉하고 더러웠다· 그뿐인가 보기만해도 여기까지 악취가 풍겨오는 느낌이었다·
“영지의 모든 자산을 들여서 매입한 메르틸이 강제로 방치됐네요· 그것도 무려 일주일을·”
오로라는 탄식에 가깝도록 한숨을 내뱉었다·
트릭시의 말대로 메르틸의 가격은 하늘을 찌른다·
심지어 플란은 가장 거대한 마탑을 건설하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그걸 뒷받침할 양을 구비하다보면 막대한 자산이 소모되긴 했을 터다·
트릭시는 그 뒤로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손에도 찻잔 하나가 들려있었지만 트릭시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로라는 지금의 침묵이 어느때보다도 무거웠다· 따라서 먼저 침묵을 깬 것도 그녀였다·
“상황은 파악했다· 황실에서 건설을 강제로 중지 시켰다고 하지만 내가 재건 허가를 내린다면····”
“표현 그대로 허가만 남겠죠· 이미 굳어버린 메르틸은 치우기는 굉장히 까다로워요· 혹여 치워낸다 하더라도 이만큼의 양을 다시 구하기는 힘들고요·”
그렇게 대답한 뒤 트릭시는 자신의 가슴팍을 꾹 쥐었다· 자꾸만 거칠어지는 호흡을 어떻게든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황녀인 오로라를 앞에 두고 대등하게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니 또한 이런 태도로 대화에 응하다니·
물론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애시당초 자신의 태생은 혈귀고 현재의 관심사는 플란 뿐이었으니까·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오로라였다·
“마탑이 무사히 건설될 수 있도록 내가 최대한 돕겠느니라· 비용이든 인력이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임을 질 테니까· 그러니····”
오로라는 트릭시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중얼거렸다·
“···플란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한데·”
“글쎄요·”
트릭시의 목소리는 더없이 냉정했다· 그 짧은 일축에 오로라는 자못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글쎄요’는 무엇인가· 알면서도 알려주기 싫다는 것인가 아니면 본인도 모른다는 것인가· 어쨌든 오로라의 마음은 매초마다 착잡해져갔다·
“행방이 묘연해서 저도 정말 알 수가 없네요·”
“그렇단 말이지·”
오로라는 머쓱해져서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번에는 트릭시가 오로라에게 물었다·
“플란은 왜 찾으세요·”
“그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할 이야기?”
오로라의 말을 반복하며 트릭시가 숨을 내뱉었다· 거의 코웃음에 가까운 호흡이었다·
“황녀님·”
트릭시가 오로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황녀님의 눈에는 제가 고작 금화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셨나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라도····”
“제가 그래도 플란을 꽤 지켜봤는데요·”
씹어뱉듯 내배어지는 말· 오로라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지 몰라서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정말 마법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매시간 마법만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마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는 사람· 그러니까·”
말을 이어가는 트릭시는 매 순간 분노를 겨우겨우 억누르는 듯 했다·
“황녀님이 중지시킨 건 일개 공사가 아니고 플란이 매순간 불태웠던 열정이에요· 또 매순간 계획했던 미래고요· 황녀님· 황녀님께서는····”
트릭시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사과를 하셔야죠· 이야기가 아니라·”
트릭시가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책상 위로 올려두었다· 한 모금도 하지 않았지만 찻잔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매순간 화염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떠나주세요· 그리고 허가 외의 지원은 필요 없어요· 프리츠의 영지민들은 결코 나약하지 않으니까·”
트릭시는 시선을 모로 향했다·
“되도록이면 아카데미에도 방문하시죠· 덕분에 마법 학부의 시간이 통째로 멈춰있어서요·”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너무나도 단호한 트릭시의 태도에 오로라는 한동안 눈만 깜빡였다·
남의 감정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래 예지같은 건 필요없었다· 눈 앞에 있는 푸른 소녀는 진심으로 플란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깊이는 척 보기에도 꽤 깊었기에·
“····”
오로라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저택을 나섰다·
플란은 자신에게 여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지만 이미 다른 소녀에게 있어서도 여명인 모양이었다·
하긴 욕심이었다·
그의 여명을 오로라만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기회가 생긴다 하더라도 자격이 없었다·
“아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울적했지만 오로라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터덜터덜 축 늘어진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에 방문해야만 했다·
질식할 듯 숨이 막혀도 지금의 오로라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
“···당신입니까·”
싸늘한 눈빛·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건 유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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