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4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좋은 날이었다·
따스한 햇빛이 찻집의 창문을 통과한다· 차 향은 고급스럽게 공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마주보고 앉은 두 여인은 고귀한 황실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뻔뻔한 여자·”
오로라가 유시아에게 들은 말은 고작 그러했다·
발언보다도 오로라는 건너편의 눈빛이 더 당황스러웠다· 유시아의 시선에는 결코 숨길 수 없는 원망이 담겨 오로라를 꿰뚫는 채였다·
잠시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하게 된 오로라였지만 유시아의 입이 다시 열리는 것이 빨랐다·
“고작 그런 이유로 찾아왔단 말입니까·”
유시아의 음색이 한 번 더 귓전을 때린 후에야 오로라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단지 플란을 찾으러 왔냐’는 유시아의 말· 일리가 있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플란의 얼굴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오로라는 책임을 지러 왔을 뿐이다·
현재 아카데미의 마법 학부 전체가 마비되었다·
전적으로 오로라의 탓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황실이 수접제의 불상사를 플란의 탓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하필····’
예전이었다면 이러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겼을 터였다· 황실은 당연히 자신을 보호해야했고 모든 실수와 잘못은 천한 것들이 담당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플란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목표가 되니 이러한 행태 하나하나가 오로라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되었다· 벌어진 일들을 어떻게든 철회시켜야만 했다·
만일 모습을 드러낸 플란이 오로라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면 마법 학부가 온통 마비되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플란이 다시는 여명을 비춰주지 않을 것이다·
그건 싫었다· 무서울 정도로 싫었다·
오로라가 살면서 처음으로 겪은 빛이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게 된 유일한 상대였다· 그런 그에게 원망받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렇기에 오로라에게 있어 유시아는 좋은 기회였다·
체내에 혈귀의 피가 흐르는 자신과 다르게 유시아의 몸에 흐르는 것은 순혈의 핏줄이었다· 존재 자체가 정통성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의 태생은 혈귀이니···’
이제부터 명령을 직접 내리기는 곤란했다·
혈귀라는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된다면 도리어 마법 학부와 플란에게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들이 혈귀의 명령에 엮이는 것과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로라도 마침 유시아를 찾던 참이었다·
순혈(純血)을 지닌 유시아가 명령을 내린다면 후에도 뒤탈이 없을 터· 유시아 입장에서도 나쁜 조건은 아니다· 그녀가 실권을 잡는 데에 훌륭한 도약이 될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까 오로라는 유시아가 마법 학부를 위한 명령을 내리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 과정에서 ‘부탁’이라는 것도 해볼 생각이었다·
이전의 오로라에게 있어 남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플란일 뿐이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로라는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법 학부가 현재 마비된 것에 관해서는····”
“무마시켰습니다·”
용기내어 꺼낸 한 마디가 자비없이 잘려나간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한 유시아의 음색에 당황하여 오로라는 두어번정도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오로라의 당황감따위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 유시아는 단호하게 말을 이어간다·
“수접제에 참가하셨던 분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았습니다· 플란 경은 사고를 일으킬 분이 아니시고 역시 일으키지도 않으셨더군요·”
유시아의 눈빛이 더없이 서늘했다·
“절대로 꺾을 수 없을 겁니다· 어딘가에 굴할 분도 아니시거니와 제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라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녀는 유시아에 대해서 제법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병약했고 그 뒤로는 겁쟁이로 살았던 아이· 오로라를 마주칠 때마다 지레 겁을 먹었던 아이·
하지만 플란이 관여되어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독기를 품고 단호해질 수 있단 말인가·
미래 예지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유시아는 정말 플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심경이 복잡해진다· 착잡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마음을 인지했다·
오로라는 부러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유시아의 미래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잘 읽히지 않았다· 그때부터 플란과 얽혀있었다는 것이겠지·
그게 부러웠다·
내게도 플란이 조금 더 일찍 있었더라면 그 빛의 따스함을 조금 더 빨리 인지했더라면 상황이 정말로 많이 달랐을 텐데·
넌 축복받은 것과도 다름없다· 그걸 알고 있느냐· 오로라가 무슨 항변이라도 내뱉으려던 때·
“안 됩니다·”
유시아의 한 마디가 내려앉았다· 오로라가 진정으로 놀란 것은 유시아에게서 예전 자신의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 눈을 파내는 한이 있어도 안 됩니다·”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본인 탓이라면 깔끔하게 승복하십시오· 참가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플란 경은 악인이 아닌 영웅이라고·”
그때쯤에서야 기억이 났다·
서로가 황궁의 복도에서 마주쳤던 당시· 오로라는 내기에서 자신이 승리한다면 유시아의 눈을 파내버리겠다며 겁박했었다·
그리고 현재 유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눈을 담보로 협박해도 설령 정말로 파내도 정보를 통제하려해도 힘으로 누르려해도 응하지 않을 겁니다·”
“····”
“저는 반드시 플란 경의 편이니까요·”
우선 유시아는 오해하고 있었다·
오로라는 유시아를 수단으로 활용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 눌러서 마법학부와 플란을 탄압하려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마법 학부를 정상화시키려 했는데····
유시아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언가 해명을 내뱉으려다 오로라는 도중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비단 유시아 뿐만이 아니라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생각이 백이면 백 일치할 터였다·
자신은 오만했다· 결코 고집을 꺾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자신보다도 남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
그러니 진심을 토로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설령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모두들 믿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믿고싶은 것만을 믿는 법이었으니까·
절대 반성하지 않는 여자·
고집을 꺾지 않고 부러진 인간·
혈귀 주제에 황녀 행세를 한 가짜·
···자신은 고작 그렇게 남을테지·
오로라는 손톱이 손바닥의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시아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것이냐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이냐를 잠시 고민했다· 그것에 집중했다·
사실 선택지는 다양했다·
혈귀인 사실을 잠시 숨기고 유시아를 더 협박한다면 통할지도 모른다· 혹은 진심을 전부 털어놓는다면 조금은 믿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
오로라가 꽉 쥔 주먹으로부터 피가 흘러내렸다·
이 모든 것이 업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그동안 남의 미래를 지배하고 업신여겼던 것에 비하면 이것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플란과의 약속만 지킬 수 있어도 감사해야겠지·
태생부터 글러먹은 혈귀 주제에 남에게 부려졌던 도구주제에 혹은 남을 도구처럼 부렸던 쓰레기 주제에 체면까지 차리는 것은 욕심이겠지·
그러니까·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오로라는 억지로 건방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있다면 이따위 행동들 뿐이리라·
“예· 그럼 가십시오·”
유시아는 오로라의 눈가에 맺힌 눈물에 조금 의아해했지만 굳이 그것을 캐묻지는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오로라를 떠나보낼 뿐이었다·
오로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찻집을 나섰다·
그래· 자신에게는 이 정도의 결말이 딱 알맞았다· 참으로 단순한 결론이었고 또 처참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로라의 동공에 보름달이 차오른 것은·
“···!”
삐이─
이명과 함께 두통이 찾아온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무언가가 되레 선명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건····”
예지 능력이 돌아왔다·
실로 오랜만에 보이기 시작했다· 미래가·
오로라는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하얗고 커다란 저택이 늘어져있는 곳· 재스민의 문양· 이제는 제법 익숙한 정경인 프리츠의 영지인 듯 했다·
물론 여기저기에 메르틸이 흉하게 굳어있는 채였다· 무려 일주일이 방치되었으니 멀쩡할 리는 없지·
하지만 그때·
따스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웬 나비 한 마리가 그녀의 콧잔등 위로 사뿐히 앉는다·
고개를 좌우로 저어 나비를 떨쳐내고 나니 웬 사내의 실루엣이 눈 앞에 있었다· 그의 정체를 인지하자마자 오로라의 눈이 부릅떠진다·
그토록 찾았던 사내·
오로라와 약속을 한 사내·
그건 분명 플란이었다·
“이봐···!”
손을 뻗으며 외치자 풍경 전체가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보이는 것은 다시 현실의 풍경이었다·
“····”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처량한 손을 천천히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느껴진다·
“방금 그건····”
분명히 미래 예지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플란을 재회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약속이 있는 한 자신을 지켜주겠다던 한 마디· 그 따스한 한 마디가 다시 듣고싶었다· 미래를 보지 않아도 느껴졌던 진심을 또다시 마주하고싶었다·
그러니 이제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플란 오로지 그를 만나기 위해서·
오로라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마이에브가 사내에게 들은 첫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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