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8
플란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영지를 밟았다·
비옥했던 영지는 말도 안 되게 황량해져 있었다· 코 끝을 간질이는 바람에는 굳어버린 메르틸 특유의 향이 묻어있어 상황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 고작 일주일만에 벌어진 일이라니·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영지를 꼼꼼히 살피며 걷기 시작했다·
레헬른 언덕을 연상시킬 정도로 형편없는 꼴이었지만 수습은 충분히 가능할 듯 보였다· 화중세계 내부에서 고대 룬어를 지독히도 다듬었기 때문이다·
플란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춘 것은 이 영지의 가주를 발견했을 때였다· 인기척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푸른 소녀는 이내 서서히 얼어붙었다·
피로에 잠식되어있던 트릭시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인다· 다음 순간에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더니 별안간 음이탈까지 내면서 중얼거렸다·
“···플란?”
플란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안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영지가 입은 타격은 막대하고 일주일의 공백은 길었다· 막 가주의 자리에 오른 트릭시가 받았을 충격은 어마어마했을테지·
“고생했다·”
따라서 플란은 이렇게만 말했다·
고작 네 글자에 불과하지만 트릭시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여럿 스쳤다· 얼떨떨한 얼굴로 있던 소녀는 이내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주 고생중이지·”
“네 노력은 내가 잊지 않겠다·”
플란은 트릭시의 노고를 칭찬한 후 물었다·
“트릭시 둘째 황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응?”
플란에게 다가오던 트릭시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마주했다는 듯 잠깐 멈추어섰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플란은 다시 물었다·
“둘째 황녀· 분명 이곳에 있을 텐데·”
“아····”
굉장히 난감한 것을 떠올렸다는 듯 트릭시가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플란의 올곧은 시선을 당해낼 수는 없었기에 이내 호흡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마탑 건설지의 중심부·”
트릭시는 사족을 붙일 저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명료한 사실만을 추려낸 뒤 정보를 있는 그대로 플란에게 전달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러했다·
아카데미를 비롯해서 굉장히 많은 이들이 황녀를 적대하는 중이고 당사자인 오로라는 건설 현장의 중심부에서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트릭시는 황녀의 정신과 신체 상태가 모두 기이하다는 점을 특히나 강조했지만 가만히 듣는 플란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장면들이 그려졌다·
약속·
오로라도 나름대로 플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듯 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는 플란을 트릭시가 빠르게 가로막았다·
“당장 만나러 가려고? 상태가 많이····”
“그러니 직접 가는 것이다·”
플란의 붉은 눈동자가 트릭시에게로 향했다·
“내가 아니면 마땅히 나설 사람도 없을 터·”
트릭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지금 상황을 해결해줄만한 버팀목은 플란밖에 없기도 했다·
“주변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도록· 부탁하지·”
늘 그랬듯 플란을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트릭시는 그의 행보가 못내 궁금해서 물었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할 건데?”
“매듭·”
플란은 쉽게 대답할 뿐이었다
“이 약속도 슬슬 매듭을 지어야지·”
◈
이곳에는 볕조차도 들지 않았다·
공사가 도중에 중단되었다고는 해도 쌓인 메르틸의 양이 이미 많았고 크기로 따지자면 거의 저택에 달하는 오로라는 그런 현장에 자리해 있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파악되지 않는 이곳에서 오로라는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자세를 결코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
어두컴컴한 시야 새하얘진 머릿속·
멍하니 호흡하는 오로라에게는 현재 단 하나의 사명감만이 남아있었다· 플란과의 약속· 오직 그 뿐이었다·
“···지켜야지·”
오로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 말을 실현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
싸늘하게 굳어버린 메르틸은 이미 저택만한 크기였다· 궁중 마법사들을 여럿 대동해도 어려울 작업을 해낼 역량은 당연히 그녀에게 없었다·
기다리자·
결국 내려지는 결론은 단순했다·
그런데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울렸다· 예상을 벗어난 감각에 오로라는 본능적으로 제 가슴팍을 감싸쥐었다·
상식을 뛰어넘어 본능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가면을 쓴 혈귀 더스트가 언급했던 ‘유통기한·’ 그것이 비로소 오로라에게도 찾아온 모양이었다·
“으····”
오로라는 가까스로 정신력을 붙잡았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감각이 전체적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지금 의식을 놓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
왼팔의 감각이 말소되었다· 오로라는 갑작스런 변화를 기이하게 여기며 오른손으로 신체를 매만졌다·
“감각이····”
왼팔에서는 나무토막을 만지는 듯한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이내 안면의 왼쪽 감각도 서서히 무뎌져가는 듯 했다·
“····”
오로라는 또 어느 곳이 마비되어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매만졌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부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못내 두려웠다·
─제가 말씀드렸죠? 유통기한이 있다고·
불현듯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를 오로라는 잠자코 듣는 수밖에 없었다· 혈귀 더스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제 목소리가 들려서 놀라셨나요?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에요· 모든 인형은 저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더스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괴하고 불쾌했다·
─어리석게 행동하고 또 황실에서도 버림받았으니 비로소 완전히 쓸모없는 인형이 되셨군요· 이제 폐기하는 수밖에·
비웃음이 뒤섞이며 더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강도 높은 고통이 연달아 이어질 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이어지더니 어느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신체 내부에서 충격이 일었다·
“커헉─!”
오로라는 그대로 핏물을 내뱉었다· 장기가 어떻게 꼬여버린 것인지 숨조차도 쉬어지지 않았다·
엄습하는 공포·
본능이 경고하는 죽음·
“····”
하지만 그렇더라도 오로라는 인내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적어도 자신의 한계까지는 악착같이 버텨낼 심산이었다·
“내가 버텨야만····”
플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버텨내야만 했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도 8년을 버텼으니 애초에 버팀이라는 게 오로라는 생소하지도 않았다·
1초·
2초·
3초·
오로라는 나뭇가지처럼 떨리는 손으로 코 주변을 훑었다· 코피가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채였다·
다시 1초·
2초·
3초·
이를 악물고 버텨냈지만 역시 택도 없었다· 지닌 태생을 정신력만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빡 하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
시야가 흐릿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로라는 결국 뒤로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이곳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마치 8년을 보냈던 지하 감옥처럼·
오로라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었다·
···결국 일평생 어둠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몇몇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저 생각에서 그친다· 결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없었고 현실이 되지도 않는다·
오로라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이미 절반 이상 감긴 눈꺼풀 사이로 문득 어떠한 빛을 느꼈다· 아직은 너무나도 미약한 세기였다·
·
·
·
‘아바마마· 꼭 버려야만합니까? 제가 정말로 아끼는 인형인데 어떻게 고쳐서 쓸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간 같이 지낸 정이 있는데····’
‘정은 사사로운 것이다· 결함이 있다면 새 걸 구하면 그만이야· 오히려 고장난 것을 고치는 데에 품이 훨씬 많이 든단 말이다·’
‘새 걸 구한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결국 완전히 다른 거잖아요· 저는 이게 좋아요·’
‘물건도 인간도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 점을 명심해야만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우는 것이냐? 당장 눈물을 그치지 못할까!’
‘죄 죄송합니다····’
오로라가 회상하는 것들은 늘 이따위였다·
회상은 무릇 과거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오로라의 과거에 행복했던 나날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언가를 고쳐본 적이 없었다·
불량품이라 여겨지면 대상이 설령 인간이더라도 폐기했고 고장이 났다면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본인은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삶을 산 주제에 지금 자신을 바꾸겠다니·
“하····”
오만한 결심이었고 되돌아보면 어두운 삶이었다·
오로라에게는 더이상 인내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지척까지 다가온 죽음이 자신을 데려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
톡─
무언가가 오로라의 콧잔등 위로 내려앉았다·
간질간질했다· 머리카락이 묻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간지럽다는 건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 아닌가· 오로라는 의문을 품은채로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팔랑─ 팔랑─
굉장히 따스한 빛이 시야를 뒤덮고 있었다· 자신의 콧잔등에 여명 나비가 앉아있다는 걸 인지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황녀님·”
서늘하고 묵직한 부름으로 인해 오로라는 나비 뒤편에 누가 서있는지를 깨달았다· 황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플란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토록 갈구했던 따스함이 담긴 음색·
오로라는 이 재회에서 무언가라도 내뱉고 싶었다· 아마 사과였을 테지만 결국 내뱉는 데에는 실패했다· 몸이 완전히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제 약속입니다·”
따스한 바람이 불며 굳어있던 메르틸을 깔끔하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찬연한 빛이 쏟아지고 회색빛으로 딱딱하게 뭉쳐있던 메르틸이 이제는 새하얀 꽃잎처럼 흩날린다·
오로라는 다시 맥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살피려 애썼다· ‘무리’라고 칭해도 어색하지 않을 나비떼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깨를 비롯해 그녀의 몸 위로 여명 나비들이 내려앉는다· 그녀가 그토록 품고싶었던 빛이 이제는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다·
황녀는 가까스로 손을 들어올려 플란의 옷자락을 쥐었다· 오로라의 안면 근육이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움직여보지 않았던 형태로 움직였다·
···미소라는 것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작 그 한마디에 비로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
“하아·”
마이에브는 공허에 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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