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0
짓눌릴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음····”
혈귀들의 진정한 주인이라 칭해지는 공주 디아나는 현재 권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상태였다· 덕분에 앞에서 대기하는 마이에브는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지루함이 아닌 고통·
마이에브가 코피를 주륵 흘렸다· 이곳에 우두커니 서서 대기한 지도 벌써 30시간· 줄곧 디아나의 기운을 정면에서 받아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결국 곁을 지키던 비서가 먼저 침묵을 깼다·
“공주님·”
“으음···· 음?”
“시간이 꽤 많이 지났습니다· 슬슬····”
“아아·”
디아나가 비로소 도리질을 치며 잠을 깼다· 졸린 눈을 뜨는 첫 번째 도리질 앉은 자세를 바로잡는 두 번째 도리질 세 번째로 고개를 저을 때쯤엔 완전히 다른 인물인 것처럼 멀쩡했다·
비서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결단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합니다· 플란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고 우리 쪽의 피해가 꽤 있으니까요· ·”
“피해?”
“예· 간부들이 살아남았지만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혈귀들의 위상이····”
“아아 됐어·”
디아나는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양옆으로 손을 휘저었다·
“위상을 운운하는 건 바보같은 일이야·”
공주의 눈빛이 보다 선명해졌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같은 일이지·”
“네?”
“타이라·”
타이라· 비서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불린 비서는 곧바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을 두려워해 본 적이 있어?”
“단언컨대 그랬던 순간은 없습니다·”
“대륙 중심부의 엘프는? 변두리의 수인은?”
“무엇을 언급하셔도 똑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고 따르는 것은 오직 공주님뿐입니다·”
“그렇지· 역시 그렇겠지·”
“예· 한데 갑자기 왜····”
“흐름·”
디아나가 권좌 오른쪽에 놓여있던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잔은 와인이 아닌 선혈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흐름을 봐야지 타이라·”
공주가 권좌를 손끝으로 두드리자 공허에 빛 하나가 내려앉는다· 그곳에는 이내 아주 큰 지도가 하나 펼쳐지게 되었다·
“한 번 같이 보자고·”
디아나가 잔을 살랑살랑 흔들자 담겨있던 핏물이 자유로이 움직여 지도 위에 칠해지기 시작했다·
“베르켈 대수림 아카데미·”
고기 부위를 나누듯 대륙에 선을 긋던 디아나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눈을 두어번 깜빡인 다음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다시 피를 칠했다·
“그래· 이제는 마탑도 표시를 할까· 마탑·”
이것저것 표기를 마친 디아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잔을 쥐었다· 담겨있는 핏물에는 공주의 미소가 비쳐있는 채였다·
“후후후· 역시 지켜본 보람이 있다니까·”
“공주님?”
“타이라·”
“예·”
“봐· 상황이 이렇게나 재미있어졌잖아·”
비서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공주가 대륙들을 일일이 구분 지어놓은 경계선이었다·
“인간계에서는 기사들이 득세해있었지 하지만 플란이 마법의 영향력을 상당히 키워놨어· 그렇지?”
“예· 지금도 영향력이 커지는 중이죠·”
“하지만 기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으니 대치가 제법 팽팽해지는 시점이 올 거야· 그럼 다른 방식의 확장이 필요해지는데····”
비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이 길목을 차지하고 있군요· 다른 종족과 교류하기가 쉬울 테고 그만큼 또 세력이 커지겠어요·”
“바로 그거야·”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야· 잘남과 고귀함을 세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 중요한 건 얼마만큼의 힘을 지녔느냐지·”
“네· 그렇습니다·”
“얼마나 강한가 세력 분포가 얼마나 넓은가···· 우린 그걸 따져보자고· 우리가 지금 아카데미와 마탑을 차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아 기세를 흡수할 수 있겠군요· 아주 빠른 속도로 대륙을 뒤덮을 수 있겠어요·”
“아니지 아니지···· 타이라·”
공주가 잔에 든 액체를 찰랑였다·
“그건 가까운 것에 집중하는 발상이잖아· 우린 아주 먼 곳을 봐야 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생각해봐 타이라· 플란은 어느 상황에서도 뚜렷한 소신을 보이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녀석이야·”
“····”
“그런 놈이 앞장서서 공허를 외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린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게 되겠지· 가끔 목숨보다도 얻어내기 힘든 것이 마음이야· 안 그래?”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녀석이 자신의 은총을 공허로 돌린다면 우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대륙을 덮어나갈 수 있어· 쉽잖아·”
디아나가 잔에 담겨있던 선혈을 홀짝였다·
“플란 참 기대되는 녀석이야· 어쩌면 정말로 그분을 강림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
“····”
비서는 조용히 디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공주는 어느덧 요망한 눈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님 플란이 공허에 충성을 다하게 만들 방법이 짐작 가지 않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워낙 소신이 뚜렷한 자라····”
“그 방법을 지금부터 알려줄게·”
잔을 내려놓은 공주는 천천히 검지 손가락을 펼쳤다· 그리고 마이에브를 가만히 가리킨다·
“마이에브· 네가 핵심이야·”
“···마이에브가 핵심이라고요?”
“그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디아나의 얼굴에선 소름이 끼치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우선 마이에브에게 맡겨보겠어·”
비서는 여전히 공주의 의중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디아나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지는 않겠다는 듯 마이에브의 발치로 단검 한 자루를 휙 던져줄 뿐이었다·
“···!”
마이에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발치에 떨어져 있는 것은 무려 공주가 사용하는 단검· 다른 이가 손에 쥐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보배롭고 귀중한 재물이었다·
디아나가 마이에브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이에브 플란에게 접근해서 귀찮게 찌를 필요도 없어· 검날과 접촉만 시키면 돼· 어렵지 않지?”
“이 단검은····”
“「안식」 공허의 축복을 안겨주는 단검이야·”
마이에브는 조용히 입을 오물거렸다· 한참을 생각하다 가까스로 되물었다·
“제가 만약 실패한다면····”
“전군을 이끌고 대륙으로 나아가겠지· 그때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철저히 짓밟는 수밖에 없잖아·”
비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공주님 이렇게나 중요한 일을 마이에브에게···!”
하지만 공주의 시선은 여전히 마이에브에게 향해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이 마치 마이에브의 모든 것을 꿰뚫어버린 듯했다·
공주 디아나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만약 실패하면 네 동생은 가차 없이 폐기야· 지켜보는 앞에서 심장을 뽑아줄게·”
“····”
“네게 이런 임무를 맡기는 이유 알고 있겠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마이에브는 공주에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공주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
마이에브는 단검을 주워 들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플란과 함께했던 나날 공허에서의 나날 동생···· 수많은 것들이 겹쳐 보이고 또 뒤죽박죽 엉킨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렸다·
아니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
프리츠 영지·
예상대로 복구하는 데에는 정확히 하루가 걸렸다·
“그럼 이만·”
“플란님···· 늘 영지에 은혜만 안겨주시는군요· 저희가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필요 없다·”
하녀장의 말을 플란은 단호하게 쳐냈다·
“신경 쓰지 마라· 내 이익을 위해서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감사 인사를 늘어놓으려던 하녀장은 결국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플란의 얼굴에는 늘 그랬듯 진심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플란님 그럼 염치없지만····”
대신 하녀장은 다른 부탁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희 아가씨도 잘 좀 부탁드릴게요·”
“트릭시?”
“네· 요즘 아가씨께서 플란님을 온통 신경 쓰고 계신 것 같아서요····”
“최선을 다해 가르치도록 하지·”
“다른 것도요· 네?”
“하녀장!”
하지만 하녀장의 부탁은 이내 트릭시의 외침으로 인해 제지되었다· 트릭시가 흔치 않게 평정을 깬 표정으로 하녀장을 다그쳤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
“아 아가씨· 아니지 가주님···!”
등을 떠밀려 멀어지는 하녀장을 플란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잠시 후 트릭시가 플란의 옆으로 되돌아와서 말했다·
“최근 영지 사정이 말이 아니었잖아· 다들 피곤해서인지 헛소리가 많이 늘었어·”
“그런 사정이 있었나·”
“그래 근데····”
별안간 트릭시의 얼굴이 아주 살짝 붉어진다·
“···최선 다해 가르친다는 말· 지켜·”
“그러도록 하지·”
플란의 시선이 조용히 영지 바깥으로 향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추상적이었던 목표들이 이제는 제법 뚜렷하다· 진흙 속에 파묻혀있던 원석들도 서서히 모양을 갖추어가며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늘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
“아카데미로 출발하지·”
“응·”
“응!”
트릭시와 베키가 플란의 뒤로 따라붙는다·
◈
“뭐 하자는 건가·”
기숙사에 도착한 직후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대상을 바라보았다·
“마이에브·”
마이에브·
그녀가 우두커니 선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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