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1
“····”
플란은 가만히 마이에브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과연 어떤 답을 내놓을까· 표정으로 의중을 파악하려고 해도 늘 무표정이니 쉽지가 않았다· 위장에 능통한 자신에게조차도 플란의 얼굴을 읽어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말은 늘 구체적으로 해라·”
“여기·”
“여기?”
“여기에서 잠시머무르고 싶어서요·”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억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플란의 곁에 있는 내내 해방을 부르짖으며 암살을 시도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플란이 평범한 인간 남성과 같았더라면 미인계라도 서슴없이 펼쳤을 테지만 그런 행위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건 본인부터가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솔직히 말하는 게 차라리 낫겠지·
“여기서 머무른다라····”
플란이 마이에브의 말을 되뇌었다·
점점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이에브 쪽이었다· 결국 마이에브가 어색한 얼굴로 먼저 시선을 피했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알아서 하도록·”
“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다·”
어찌저찌 승낙은 받아냈구나·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이해한 마이에브가 손에 들려있던 서류 가방을 어색하게 뒤적거린다·
“아 물론 대가 없이 머무르겠다는 게 아니에요· 아카데미와 관련된 업무를 제가····”
“괜찮다·”
돌아오는 대답이 빠르다· 당황한 마이에브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너는 노예가 아니다· 더이상 네게 업무적인 것으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어·”
무덤덤한 말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이에브의 마음이 석연찮았다· 플란이 내뱉은 말에 문제되는 부분은 조금도 없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플란은 현재 마이에브가 이곳에서 대가 없이 지내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나· 만족스러워해야만 하는 상황일 텐데 왜인지 모르게 살짝 초조했다·
이 초조함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질문의 형태로 내뱉는다면 조금은 시원해질까· 결국 마이에브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제가 이곳에서 머무르는 이유를 묻지 않으시네요·”
“음·”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요·”
플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너는 예고 없이 복귀했고 대뜸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요구를 내뱉었지·”
“맞아요· 근데 왜····”
“내가 신경쓸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너 역시 많은 것을 신경쓸 필요 없다· 이곳에서 머무를 필요가 있다면 조용히 지내다 떠나도록·”
이번에도 긍정적인 답변이 되돌아왔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 편이 먹먹했다· 지금 플란의 말과 행동에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있지 않았다·
노예로 지내던 때에는 조금 달랐다·
엉망진창인 암살 시도를 가끔 비웃어주기도 했고 마이에브가 업무를 잘 수행하지못하면 꾸짖어주기도 했다·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왜인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혈귀의 태생을 지녀 인간의 노예가 되다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목숨이 걸린 임무를 수행하는 중 아닌가·
복잡한 감정을 애써 추스른 다음 마이에브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아 플란!”
누군가가 플란을 부르는 소리에 마이에브의 말은 힘없이 끊어진다· 누가 호출했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붉은 머리칼의 소녀였다·
명찰에는 베키라고 적혀있었다·
“이 이것좀 볼래?”
묵직한 서류 가방을 베키가 낑낑대면서 내민다· 안에 얼마나 많은 자료를 담고있는 건지 가녀린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채였다·
“이번에는 한 번에 통과할 자신이 있어!”
“흐음”
“앞으로 아카데미 일정이랑 해야할 일들이랑 맡겨둔 논문 전부 요약해봤어· 최선을 다했으니까 분명 너도 마음에 들 거야···!”
플란은 베키가 들고있던 가방을 건네받았다·
“내가 적절한 수면을 취하라고 일렀을 텐데·”
“잠은 충분히 잤어! 그보다 이거 한 번에 통과받으면 시간이 남게되니까···· 같이 좀 돌아다닐래? 만약 한 번에 통과하게 된다면 말이야!”
“뭐 그러지·”
누가 보면 애완동물인줄 알겠다· 마이에브는 베키의 모습을 조용히 살폈다·
플란의 칭찬을 갈구하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 조금이라도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밤을 샌 모습· 그런 걸 보고있노라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분명 한심한 일일텐데·
플란이 베키의 머리 위로 툭 손을 얹었다·
“고생했다· 베키·”
플란의 진심이 담긴 칭찬과 옅은 미소·
그걸 보고 있노라니 또 마음이 초조해져서· 이 초조한 감정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어서 마이에브는 그냥 옆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
그날 밤·
화중세계 내부 마이에브의 거처·
─너 공주님한테 임무 받았다며?
─실패하기만 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
─영혼은 혈견한테 던져주면 되겠네· 억겁의 시간 영원히 물어뜯기는 고통을 안겨줄게·
“····”
마이에브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접었다·
공주님으로부터 임무를 하달받았다는 것이 알려진 후 간부들로부터 오는 연락은 온통 협박성이 가득한 것들 뿐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마·
어련히 알아서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목숨과 동생의 목숨이 걸려있었으니까·
마이에브는 짧은 답변으로 편지를 작성한 뒤 화중세계를 나섰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슬슬 플란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
플란의 노예로 보낸 세월이 얼마더라·
결코 길지 않은데 분명 그럴 텐데·
플란의 집무책상 옆에 있었던 본인 좌석이 사라져있다는 것이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었다·
마이에브는 여느때처럼 커피를 내렸다·
이번에는 독을 타지 않은 그냥 평범한 커피였다· 그러나 잠시 후 복귀한 플란의 반응은 담담했다·
“커피인가·”
“네· 독은 들어있지 않으니까····”
“필요없다·”
마이에브는 또 한 번 굳어버렸다·
“뭐 불만이 있으신 건가요·”
“불만?”
“네· 커피 정도는 괜찮잖아요·”
마이에브는 결국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리 내뱉었다· 본인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왜 답답해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플란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일까· 밀어내는 것일까· 이런 요소들을 신경쓰는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로 자신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플란은 여유로이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말했을 텐데· 너는 내 노예가 아니라고·”
담담하게 대답한 플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멀리에서 날아온 재료들이 허공에서 조합되며 커피로 거듭난다· 동일한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에브의 것보다 훨씬 향이 깊었다·
플란이 염동을 활용해서 잔 두 개에 커피를 따른다· 하나는 자신의 앞에 두고 하나는 마이에브에게 주었다·
“마셔라· 이게 나을 테니까·”
“····”
플란은 무심하게 마이에브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나은 취급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은 호의가 마음에 걸린다·
마이에브는 결국 화제를 전환했다·
“이것 좀 보세요·”
마이에브가 집무 책상 위로 종이 한 장을 올린다·
플란이 업무를 하달한 적은 결코 없었지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접점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더·
자신이 품은 초조한 감정의 이름을 알아내고 싶었다· 반드시·
“확인하셨나요· 아카데미가 곧 비워질 거에요·”
“방학이 코앞이긴 하더군·”
“꼭 방학만이 이유는 아니죠· 기사들은 출정을 떠날 때가 되었고 마법 학부의 마법사들에겐 황실에서 견학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까요·”
“출정?”
플란이 마이에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네· 말이 출정이지 실제로 전쟁을 하러가는 건 아니에요· 베르켈같은 위험지역에서 마수들을 상대로 경험을 쌓는 거죠·”
“들어본적이 있다· 6개월 뒤 아니었나·”
“한 마법사가 검마태제에서 연달아 우승을 거머쥔 덕분에 급하게 앞당겼다는 모양이에요· 훈련 강도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고요·”
그러자 플란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사들에게도 좋은 일을 했군·”
그는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기사들은 아카데미를 떠나고 방학이라 귀향하는 이들이 있을 테고···· 마법 학부의 견학은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에요· 공백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황실에서 방학 기간동안 대수림 견학을 보장했대요·”
“참여율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안 가는 사람이 없겠죠·”
“과연 내 생각도 그렇다· 아카데미에 남아있는 인원이 얼마 되지 않겠군· 한데····”
플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무엇을 바라기에 이런 것들을 굳이 정리해왔나· 나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을 터인데·”
“그건····”
“차라리 원하는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도록·”
플란과 마이에브의 시선이 맞닿았다·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하라는 한 마디가 괜히 마이에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제가 솔직하게 말하면요?”
“고려하며 타협하겠지· 대가 없는 호의는 싫다·”
“고려····”
마이에브는 불현듯 아까 보았던 베키의 모습을 떠올렸다· 플란은 베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진심어린 칭찬을 내뱉지 않았던가·
베키의 얼굴에는 애절함과 기쁨이 있었다·
마이에브는 그게 의아했다· 도대체 무엇이 소녀를 그토록 초조하게 만들었다가 기쁘게 만든 것일까· 본인의 초조함도 그런 것일까·
호기심이 불꽃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산불처럼 번진다· 그래 이것도 어차피 임무 수행의 일환일 테니까·
“그럼 이렇게 해요· 저는 예전처럼 이런저런 업무를 봐드릴게요· 그 대신에····”
호기심이 이성을 눌러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말이 제멋대로 입 밖에 튀어나온다·
“내일 단 하루만····”
마이에브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찻잔에 담긴 커피를 한 번에 비워버린 다음에야 겨우 말을 매듭짓는다·
“저를 친구처럼 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여전히 마이에브는 이 초조함의 이름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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