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2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이에브조차도 방금 스스로가 내뱉은 말을 고민했다· 현재 자신의 마음속에는 감정과 이성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묵직하게 얹혀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것을 기필코 이해하고 싶었다·
“····”
무표정인 플란의 속내를 알아내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자꾸 어색하게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결국 마이에브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솔직하게 말씀하라고 하셨죠· 저는 인간들 사이에서 통하는 ‘친구’라는 개념이 궁금해요·”
“네 말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플란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나는 친구랄 것을 둔 적이 없다· 또한 있더라도 너를 친구처럼 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
솔직하고 담백한 말· 하지만 그런 말이 더더욱 쓰라린 법이라는 걸 마이에브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마이에브의 고개가 서서히 모로 돌아간다· 그녀가 플란을 마주보지 못한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는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마이에브 애초에 친구라는 건 나보다도 네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개념 아니었나·”
플란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인간계를 유랑하며 숱하게 위장했고 많은 관계가 있었을 테고 그중 친구 관계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건 관찰이나 연기에 불과하니까요· 전 인간들 사이에서 통하는 진심이라는 게 뭔지 알고 싶어요·”
“요컨대 진심이 담긴 소통을 바란다는 거군·”
“아마 그런 것 같아요·”
마이에브의 수긍에 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굳이 부탁할 필요 없다· 나는 타인을 거짓으로 대하지 않고 너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예를 대하는 진심 말고요·”
플란의 차분함 덕에 제 생각도 조금씩 갈무리되어진다· 확실히 플란은 자신을 애초부터 거짓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 바라는 건····
“소중한 걸 대하는 진심· 그게 궁금해요·”
마이에브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가끔 타인을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보잖아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닌데 협박을 당한 것도 아닌데·”
“손해라·”
“손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죠· 인간은 ‘소중한 사람’이라 칭해지는 이들을 위해 대가도 없이 시간을 쓰고 재화를 쓰고 감정을 소모하고···· 그렇잖아요·”
플란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너를 소중하게 대해달라는 것인가·”
“맞아요· 그런 것 같네요·”
“긍정적으로 검토하지·”
“검토한다고요····”
확답이 아니었기에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이상의 답변을 받아내는 것도 힘들겠지· 마이에브는 우선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쉬어라 마이에브· 오늘 밤은 내가 바쁘니·”
“알겠어요·”
마이에브는 몸을 돌려 화중세계 내부로 진입했다·
아니 진입하려는데 플란이 한 번 입을 열었다·
“마이에브·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마이에브가 고개만 돌려서 플란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은 갑자기 왜 궁금해하나·”
“그건····”
마이에브가 입술을 몇 번 오물거렸다·
“···이게 제 일이니까요·”
“일이라·”
플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일이라면 해야지· 나도 마찬가지다·”
플란은 알 턱이 없었다·
그 한마디가 마이에브를 또 초조하게 만든다는 걸·
◈
다음 날 아침·
─10분 간격으로 보고하랬을 텐데요·
─야 너 도대체 뭐하는데?
─빨리빨리 처리해·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마이에브는 편지들을 구겨버리면서 피로감을 느꼈다· ‘고향’ ‘동족’ 인간들은 정말로 이따위 단어에 유대감을 느낀다는 걸까· 낯설기만 하다·
─대상과 접촉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임무는 오늘 내로 조속히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답장을 대충 작성하긴 했지만· 사실 오늘 내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는 없었다· 어제 플란이 내놓은 답변은 참 애매모호했으니까·
그러나 화중세계를 나선 마이에브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집무실의 거울 앞 단정하게 외출 준비를 마친 플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
마이에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단정하게 잘 빗어진 머리카락과 주름 하나 없이 정돈된 사복 평소보다도 훨씬 고급스러워진 듯한 모습을 마이에브는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말은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거절로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반쯤 비우고 있었는데····
“음·”
잠시 후 마이에브가 등장했다는 걸 인지한 플란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다가온다·
“날씨가 제법 괜찮은 아침이다· 푹 잤나·”
아주 옅은 온화함이 생겨났을 뿐이지만 그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했다·
그리고 또 어색했다· 노예가 아닌 ‘소중한 것’으로 대해지는게 너무나도 이상한 감각이라서 마이에브는 이걸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일단은 어색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다면 어서 외출할 채비를 해라·”
딱─
플란이 손가락을 튕기자 빗 같은 미용 도구들이 허공으로 잔뜩 튀어 오른다· 플란은 세심하게 염동을 다루어 마이에브를 손보기 시작했다·
“머리는 내가 좀 다듬어주지·”
“다듬어주신다고요····”
머리카락을 가만히 내맡긴 마이에브가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섰다· 초조함과는 분명 다르지만 또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어색함·
아마 그런 이름이지 않을까· 아직은 크기가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것처럼 불편하고 숨 막히기만 하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마이에브의 머릿결은 눈에 띄게 고와졌다· 플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데리고 다니는 것이 수치스럽진 않겠군· 곧바로 출발하지·”
“네·”
플란이 앞장서자 마이에브는 조용히 뒤따른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이 넓은 사내의 등이 오늘따라 유독 거대해 보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잠깐·”
“···!”
플란이 갑자기 다가와서 마이에브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플란의 손이 마이에브의 어깨를 툭툭 턴다·
“····”
마이에브는 그제야 차츰차츰 눈을 떴다·
조금의 악의도 없이 오로지 좋은 의도만을 가지고 몸단장을 도와준다는 것이 참 어색했다·
어색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어제와는 다른 초조함이 자꾸만 피어올라서 문제였다· 호흡은 불안정해지고 가슴 안쪽 묘하게 간지럽다·
‘어쩌자는 거야·’
초조한 감정의 이름을 알아내겠다며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점점 헷갈려지고 있다니 이 얼마나 바보 같은 현상인가· 마이에브는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짝 소리가 나게 때렸다·
“출발하지·”
마이에브의 옷을 다듬어준 뒤 플란이 무심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마이에브는 문득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자신이 문득 한심한 것 같아서 괜히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도서관·”
“도서관?”
“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별로 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빼곡한 책장들이 마이에브를 반긴다· 솔직히 말해서 마이에브가 그리 좋아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역시 그만둘까·’
어쩌면 이 감정을 알아내려 하는 것부터가 실수일지도 모른다· 본인은 공허로부터 하달받은 임무만 수행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그 순간·
“플란님 오셨군요·”
근처로 나이가 지긋한 여성 한 명이 다가온다· 명함을 보아하니 도서관 사서였다· 그녀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명단 같은 걸 내민다·
“요청하셨던 서적은 전부 미리 빼뒀어요·”
“잘됐군·”
“저기 그런데····”
사서가 웃음을 참으며 다음 말을 이어갈지 말지 고민한다·
“왜 그러지·”
“아 나쁜 뜻은 없어요· 연애 소설만 요청하신 게 참 의외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별 뜻은 없다·”
“그래요? 아무튼 두 분 모두 좋은 시간 보내세요·”
마이에브는 자신과 플란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서의 시선이 괜히 낯간지러웠다·
“앉도록·”
대화가 가능한 구역의 좌석으로 이동한 후 플란이 염동이 아닌 손으로 직접 의자를 꺼내준다· 마이에브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소설과 현실에 괴리가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네·”
마이에브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고작 도서관에 데려와서 소설이나 읽히는 게 소중한 것을 대하는 태도라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이내 말끔하게 지워진다·
“우선 이 부분을 보겠나·”
동화책을 읽어주듯 플란이 마이에브 앞에 놓인 책을 펼친다· 낱장을 넘기는 행동에서는 언뜻 품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숱하게 많은 삶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마이에브는 플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일목요연한 설명을 멈추지 않았고 표정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마이에브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진심···?’
진심·
고작 도서관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호화로운 식당에 데려가거나 경치 좋은 곳으로 떠나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행위· 플란은 그것을 현재 마이에브와 공유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마이에브를 소중하게 대하겠다던 그의 약속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플란이 마이에브를 마주 보았다·
“집중하고 있나· 마이에브·”
“네? 아 그게····”
마이에브는 순간 화들짝 놀라하며 거북이처럼 목을 뒤로 뺐다· 그간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플란과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웠다· 나란히 앉은 채로 서로를 물끄러미 마주 보고 있지 않은가·
“들었 들었어요· 이해했어요·”
빠르게 얼버무린 마이에브는 괜히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몸이 뻣뻣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아 플란!”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의 비서가 플란을 찾았다· 그녀는 꽤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소식 전해 들으셨나요? 둘째 황녀께서 의식을 되찾으셨습니다·”
“잘된 일이로군요·”
“잘된 일이지만 둘째 황녀께서 의식을 되찾은 직후 당신을 찾아서요· 혹시 지금 당장 시간 괜찮습니까?”
그때 마이에브는 속에서 이상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고민하는 플란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휙 바라본다·
“안 돼요·”
이어지는 말들은 저도 모르게 내뱉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정말 왜 이러는지조차도 모르지만·
“···저랑 보내기로 했잖아요·”
자신은 이미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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