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4
12시 자정·
마이에브는 욕조에 몸을 담근채로 온기를 만끽했다· 창을 넘어 흘러들어온 달빛은 굴곡진 육체를 새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조용히 발가락을 꼼지락대던 마이에브는 문득 찻잔을 염동력으로 끌어당겼다· 붉은 눈동자가 응시하는 잔에는 플란의 푸른 마력이 담겨있었다·
‘선물?’
어떠한 조건도 없이 플란이 그저 선심을 발휘해서 건네준 물건· 타인에게 대가없이 받은 물건이니 선물이라 칭해도 충분할 것이다·
찻잔을 손가락 끝으로 탁 소리가 나게 때렸다·
그러자 찻잔이 푸른 빛을 발하며 공명한다· 잘 정제되어있는 사내의 마력이 느껴지자 마이에브는 괜히 또 몸이 뻣뻣하게 굳고야 말았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심리가 궁금했다· 악연으로 시작된 인연이었고 심지어 자신은 노예로 활동하지 않았나·
‘단 하루였다고는 하지만····’
거짓된 연기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꾸어 말해 플란이 어제 하루만큼은 자신을 정말 진심으로 대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공유하는 시간 공유하는 시간 공유하는 시간····”
플란이 했던 말을 괜히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말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납득하고있는 본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관계’라는 게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함께 있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안심되고 조금은 더 오래있고 싶은 그런 관계인 모양인데·
하지만 그게 그토록 소중한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인가 나의 시간을 할애할 정도인가 필사적인 감정인가···· 의문과 생각이 서로 꼬리를 물면서 자꾸만 헷갈리게 만든다·
“바보같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임무를 수행하며 초조한 감정의 이름도 알아내려했지만 둘 다 실패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아무것도 이뤄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손해를 본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마이에브는 찻잔을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욕실 밖으로 나섰다·
공허로부터 도착한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었지만 무시했다· 생각이 많은 하루였기에 일단 수면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하지만 잠들지 못했다·
찻잔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생각해보니 화중 세계의 숙소에는 따로 찬장이 없었다· 그리고 또 플란은 찻잔을 어떻게 보관했을까·
‘먼지가 쌓이면 그때가서 닦지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이에브는 결국 침대를 벗어났다· 찬장을 이렇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저렇게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거지?
고작 찻잔 하나일 뿐인데·
“내 찻잔이니까 그렇지 뭐·”
자기 물건을 주인이 챙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플란과 관련있는 일도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마이에브는 찬장을 몇 번이고 그려내다가·
결국 마땅한 걸 찾지못해 끌어안고 잠들었다·
◈
다음날 아침·
마이에브는 기상한 직후 화중세계를 빠져나왔다· 여느때처럼 집무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있는 플란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물었다·
“어제는 괜찮은 하루였나·”
플란은 이틀 전처럼 무감하다· 말이나 표정에 진심어린 무언가가 묻어나지는 않는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이에브와 플란은 고작 하루짜리 약속을 한 것이었으니까·
마이에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도움이 됐어요·”
“그래·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어제의 모습이 찰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여겨질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 마이에브는 다시 조그만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쉬워하는 건가? 설마? 내가?’
마이에브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플란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그럼 이제는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생겼나· 나를 다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마이에브 역시도 묵묵히 답답했다·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달라지지·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해질 테니까·”
“서로에게 솔직하면 뭐가 좋은 건가요·”
“어제 경험한 소중한 관계라는 건 솔직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마이에브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고민이 차츰차츰 깊어진다· 어차피 플란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데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결정을 내렸다·
“공허의 지배자께서 플란님을 원해요· 저는 당신에게 저주를 씌우려 왔습니다·”
“꽤 중요한 임무같은데· 네가 받았군·”
“능력을 보고 하달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제가 당신의 노예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계신 거겠죠·”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마이에브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동시에 제 충성심을 시험할 생각이시겠죠· 공허를 배신할 녀석인지 충성할 녀석인지·”
“예상했던 일이다·”
그는 마이에브의 이야기를 듣고도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커피를 마시며 묻는다·
“공허의 지배자는 나를 왜 원하는건가·”
“지금은 공주님의 통치 하에 있지만 사실 공허의 진정한 지배자는 따로 있어요·”
“한데·”
“봉인되어있는 상태고 그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각 종족별로 훌륭한 마법사가 필요해요· 엘프와 수인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마이에브가 차근차근 말을 잇는다·
“그간 인간들의 마법 수준이 높지 않았잖아요·”
“그런 시기에 내가 나타난 거로군·”
“맞아요· 공주님께서 눈독을 들일 수밖에요·”
“지배자를 부활시키면 무엇을 할 생각이지·”
그러자 마이에브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대륙 전체를 공허의 휘하에 두려고 하겠죠· 큰 힘이 깨어나면 그걸 휘두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설령 지배자가 부활하지 못한다 해도 비슷한 시도는 계속될거에요·”
“일단은 이해했다·”
플란이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두었다·
“네가 공허를 등지는 것은 쉽지 않겠지· 혈귀의 태생을 지녔으니 배반을 마음먹어도 불가능할 터·”
“맞아요· 제 목숨 그리고 동생 목숨이 이번 임무에 달려있어요· 어쩌면 죽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잘했다 마이에브· 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니 나 또한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에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처음부터 눈치채고 계셨나요· 고마워요·”
플란은 마이에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이에브는 심경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할지 말지는 네 자유다·”
“네?”
“표현 그대로지· 그 임무를 시도하는 것은 네 자유야· 그러나·”
플란의 어조가 한층 더 진지해졌다·
“네가 진리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공허의 규칙· 그것을 한 번쯤은 의심해보도록· 또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찰해보도록·”
“주체적인 삶····”
“그리고 하나 더· 공허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다·”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요·”
“세상을 바꾸는 건 내가 될 테니까·”
고작 한 마디·
순간 저도 모르게 믿어버릴만큼 확신으로 가득찬 어조· 마이에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플란은 조용히 염동을 발동했다· 벽에 걸려있던 화중 세계 액자를 떼어내 마이에브에게 건넨다·
“대화는 여기까지다· 다음에 적으로 마주친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고 네가 달라져있다면 나 역시 다른 태도로 응대하지· 내 말을 잊지말도록·”
“···네· 그럼·”
마이에브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
마이에브는 조용히 공허로 복귀했다·
돌아와보니 자신의 거처는 엉망이었다· 지붕에는 구멍이 가득했으며 벽은 군데군데 무너져있어 폐허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렸다·
─꺼져·
─느려터진 새끼·
─열등해·
벽에는 붉은 선혈로 조롱 문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많은 인원이 상주해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역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다만 마이에브는 동생을 애타게 찾았다·
“마이비 어디에 있어? 마이비!”
다행히 동생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키가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동생은 구석에서 불쌍하게 떨고 있었다·
“···!”
동시에 마이에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이비의 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에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마이비 괜찮아?”
“언니···· 살아있었구나····”
그런데 이게 웬걸 오히려 동생이 마이에브의 안부를 물었다·
“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다들 언니를 죽여버린다고해써····”
마이에브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럴 일 없어· 걱정하지마· 지금부터는 언니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
“···언니야·”
“응·”
“나는 그냥 주글게· 응?”
“왜 그런 말을 해····”
마음에 돌덩이가 얹히는 느낌이었다·
“나 때문에 언니가 고생하자나· 나는 어차피 몸도 안 좋고 멍청하니까 그냥 죽어도 대·”
“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있어·”
마이에브는 무언가라도 찾기 위해서 다급하게 품 속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플란으로부터 선물받은 찻잔만이 손에 잡힐 뿐이었다·
문득 그의 얼굴과 말이 떠올랐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생을 바라보며 마이에브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직까지는 플란의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마이에브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 속에서도 말뜻을 이해하려 애썼다·
정말 죽을만큼 간절하게·
*
*
*
“어 언니···? 우리 어디가?”
“····”
마이에브는 동생을 끌어안은 뒤 다급하게 흑마법의 술진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언니 어디가? 보고를 올려야댄다구 해써·”
“····”
“어디로 가는거야?”
“입좀 다물어 죽기 싫으면!”
마이에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마법진을 구축했다· 어느때보다도 다급했고 또 죽을만큼 간절했다·
인간계로 이동하는 마법진을 완성한 뒤 마이에브가 땀에 뒤덮인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도 내가 왜이러는지 모르겠다·”
결국 마이에브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이게 분명 옳을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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