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5
시간만큼 귀중한 것은 없을 터·
나는 화중세계 내부에서 그간 수집한 고대 룬어를 점검했다· 액자는 마이에브에게 떼어주었어도 이곳에 출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필요한 자료와 책을 펼치고 옆에는 조그만 원탁을 만들어 찻잔과 주전자를 놓았다· 이만하면 흠잡을 곳 없는 작업환경이다·
“이전 세계····”
이전 세계와의 연관성·
룬어를 강력한 마법을 발현하기 위한 매개로만 여겼으나 연관성을 발견하고 나니 흥미가 자연스레 미친 듯이 샘솟기 시작했다·
“····”
나는 눈을 감고 룬어의 힘을 발현했다·
검은 시야 하얗고 가느다란 통로가 보인다·
오늘의 목적은 이전 세계와 고대 룬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는 것· 통로가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확실하다·
스스스─
이내 통로의 끝에 문이 하나 생성된다· 두 세계를 이어놓는 경계가 바로 저것일 터·
펑!
하지만 그것을 확인한 직후 시야가 차단되었다· 이유는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뻔했다· 아직 수집하지 못한 고대 룬어가 있기 때문이겠지·
“재미있군·”
두 세계의 연결이 자유로워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의도적으로 이 세계에 불러들인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감히 누가?
그러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쾅─!
화중세계 저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아마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혈귀 한 명이 눈앞을 휙 지나쳤다· 조그만 혈귀를 끌어안은 채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다급한 몰골이었다·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화중세계이 주인은 내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사용하더라도 기이한 일은 아닐 터· 나는 자료를 살피는 일에 마저 집중했다·
쾅─!
하지만 폭음과 고성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잠시 후 낯익은 얼굴의 혈귀가 누군가를 끌어안은 채로 지척까지 뛰어왔다·
화중세계의 주인 마이에브였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어색한 말투로 인사를 건넨 뒤 다시 지면을 박찬다· 나는 진작 멀어진 마이에브를 향해 대답했다·
“그래·”
대충 살펴보니 마이에브가 도망치면 다른 혈귀들이 그녀의 뒤를 쫓는 양상이었다· 나는 추격전을 잠시 살피다가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쾅─! 콰앙─!
이후 화중세계 전체가 뒤흔들리는 충격이 이어지더니 마이에브가 또 모습을 드러냈다·
십 분만의 재회일까·
재차 마주한 그녀는 엉망진창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온통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표정은 모든 것을 잃은 듯 허탈해 보였다·
시선을 마주한 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자주 뵙네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대화를 나눌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에브가 굳이 말을 붙이는 이유가 나는 짐작되었다· 진정으로 건네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것이리라·
나도 아직까지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군·”
그때쯤 마이에브가 안고 있던 조그만 생명과 눈이 마주쳤다· 6살 어린아이 정도로 보이는 꼬마 혈귀였는데 척 보니 곧 죽을 것 같았다·
꼬마 혈귀가 안긴 채로 중얼거렸다·
“언니···· 나 졸리다····”
그러자 마이에브가 버럭 소리를 쳤다·
“잠들면 안 돼!”
외침을 끝으로 마이에브는 다시 지면을 박찼다· 많은 수의 혈귀들이 그림자처럼 바닥에 붙어 그녀의 뒤를 쫓는다·
상황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마이에브가 공허를 배반한 것이겠지·
콰아앙─!
내가 책을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피육이 터지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삼십 분 뒤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읽을 때쯤·
“저기 플란님·”
또 한 번 나는 마이에브를 마주했다·
“무엇이지·”
“그게····”
마이에브가 말끝을 흐린다· 그녀의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이에브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궁지에 몰려 정말 미쳐버리기 직전에 있는 자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턱으로 마이에브의 뒤편을 가리켰다· 혈귀들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빼곡히 모여있었다·
“다들 너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맞아요·”
“마이에브· 내가 저번에 말했지·”
나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네가 솔직한 태도로 나온다면 나 또한 너를 솔직한 태도로 응대할 것이다·”
“솔직함····”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마이에브가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본인조차 자신의 생각을 갈무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내 그녀가 허탈한 말투로 내뱉는다·
“···네· 살고 싶어요· 이젠 벗어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무릎이라도 꿇고서 빌고 싶어요·”
마이에브가 호흡만 겨우 내뱉는 동생을 바닥에 조심스레 뉘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비틀거리면서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하지만 제가 배신한 건 공허에요· 충동적인 선택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네요·”
마이에브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나는 그게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말을 끝까지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공허를 등진다는 건 다시 말해 뿌리칠 수 없는 운명이 생긴다는 뜻이에요· 플란님께 빌고 빌어 도움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매시간 매분 매초를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면····”
땀범벅인 마이에브의 얼굴에서 유난히 선명한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눈물인 것 같았다·
“···플란님도 그때쯤엔 저를 원망하게 되겠죠· 귀찮다고 여기게 되겠죠· 저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마이에브가 절규하며 소리쳤다·
“나는 나는···· 그게 무섭다고요! 선의를 가진 이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롭다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사이에도 뒤편에는 혈귀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인간 형태도 있었지만 일부는 기어 다니거나 입이 다섯 개인 등 ‘흉물’이라 칭해야 할 정도로 몰골이 끔찍했다·
그중 하나가 검은 마탄을 쏘았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에브의 뒤통수에 직격한다·
“연기가 아주 일품이로구나 마이에브 지금은 누구로 위장한 거냐? 손수건이라도 챙겨야 했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기다란 키가 내 두배쯤은 되어 보이는 거구의 혈귀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인간·”
그가 마이에브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서 말을 이어간다· 물건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고 마이에브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네까짓 게 이 문양을 알아보겠느냐·”
그가 품속에서 펜던트 하나를 꺼내 든다· 검은 심장에 단검이 꽂혀있는 기괴한 모양새였다·
“공주님께서 직접 내린 특명을 의미한다· 온 공허가 마이에브를 쫓고 있는 것이지· 개입하는 순간에는 너 또한 짓밟히게 될 것이다·”
“이해했다·”
“그래·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눈앞에서 당장 사라진다면 책임은 묻지 않으마·”
나는 읽던 책을 드디어 덮었다·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군·”
동시에 들려있던 책이 염동으로 쏘아진다·
빡─!
거구의 혈귀가 허수아비처럼 넘어가고 나는 허공에 붕 뜬 펜던트를 염동으로 구겨버리기 시작했다·
혈귀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마이에브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멈춰! 당장 멈춰라!”
“뭐라고···! 공주님의 펜던트를!”
“─!”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힘을 버텨내지 못한 펜던트가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으스러진다·
혈귀 중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정녕 이해하고 있느냐?”
뒤늦게 다시 일어난 거구의 혈귀도 합세했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인간 인간 따위가 감히 공주님의 명예를 더럽혔구나! 온 공허가 너를 쫓을 것이다· 살아남을 생각 따위는 미리 버리도록!”
“말이 뭐 그렇게 많은지·”
염동력으로 녀석의 목을 꺾어버렸다·
“대화는 마이에브와 나누겠다·”
◈
마이에브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충격에 완전히 젖은 얼굴로 나와 가루가 된 펜던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잠시 내려앉은 혼란 속의 정적·
“음·”
플란은 이러한 순간에도 여유로웠다· 사내가 자신의 마나로 화중세계 전체를 천천히 물들인다·
“사족은 필요 없다· 마이에브·”
그가 선율을 지휘하듯 부드럽게 손가락을 그었다· 등 뒤로 무수히 생겨나는 푸른 마법진·
“····”
마이에브는 곁에 나란히 선 플란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 듯했다·
이윽고····
“네 솔직함은 무엇인가·”
마이에브의 심장에 쿵 와닿는 한 마디·
마이에브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
지쳐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꽁꽁 얼어붙어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진심만을 남긴다·
솔직함과 소중함을 동시에 갈망한다·
이 마음을 더이상은 헷갈리지 않을 터였다·
“살고 싶어요· 제발 벗어나고 싶어요···· 제발─!”
어떻게든 살아남아 진실된 하루하루를 보내고싶다·
소중한 관계라는 걸 누리며 살고싶다·
애원하듯 내뱉은 깊은 진심·
플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될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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