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7
공허·
권좌 앞 간부 전원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거운 정적이 이어지던 와중 어느 순간 권좌 위로 그림자들이 뭉치더니 공주의 형상으로 빚어진다·
디아나·
공허의 현(現) 주인이었다·
공주가 졸음기가 없는 얼굴로 사천왕을 바라보았다·
“내가 공허에 간부들을 왜 굳이 두었을까· 소꿉놀이를 하자는 게 아니야· 내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지·”
여덟 명의 간부들이 목청껏 대답했다·
“네 공주님·”
“레헬른 언덕에서 패배 배신자는 보란 듯이 놓쳐···· 하다 하다 이런 상황까지 만들 줄이야·”
소녀 혈귀 릴리에 그리고 가면 혈귀 더스트는 이마를 동시에 바닥으로 붙였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공주가 팔걸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비서·”
“네· 공주님 경청하고 있습니다·”
비서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비서로서 간부들에게 할 말이 있겠지· 해·”
공주의 뜻을 비서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이렇게 되면 공주는 비서가 어떤 식으로 간부들을 꾸짖는지 관찰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간부들을 벌하는 동시에 비서의 자격도 시험할 수 있는 것이다·
비서의 시선이 간부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듣도록·”
“예·”
그녀의 이야기가 딱딱한 말투로 이어진다·
“너희들은 상대를 너무나도 만만히 여겼고 동시에 자기 능력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평가했다· 반박할 수 있는 간부가 있는가·”
“이의 없습니다·”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임무 완수를 우선시했어야지 변명할 시간을 주겠다·”
소녀 혈귀 릴리에가 입술을 달싹였다·
“자존심을 내려놓고서 비굴하게 굴면 공허의 권위도 낮아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보니····”
“공주님께서는 이미 겉보기에 집착하지 말라고 언급하셨다· 너희는 패배했어· 도리어 오만과 허세 때문에 창피를 얻었다는 것을 모르겠나?”
릴리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싶거든 실력을 계속 키우도록· 애초에 넌 나약해· 처분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라·”
“죄송합니다·”
“너희가 과연 만전을 기했어도 패배했을까?”
그때 가만히 듣던 가면 혈귀 더스트가 말했다·
“그 부분은 감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마 전력을 다했다 하더라도 결국 패배했을 것입니다·”
“···이유는?”
“저희가 거만했던 것도 인정하고 방심한 것도 인정하지만 애초에 플란이 너무나도 출중했습니다·”
비서는 잠시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본인을 벌해달라든가 한 번 더 복수할 기회를 달라든가 하는 말 정도를 예상하였다· 한데 이토록 무덤덤한 고백을 듣게 될 줄이야·
그때 공주가 턱을 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지만 누구도 따라서 웃을 수 없었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막론하고·”
웃음을 그친 공주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껏 빚어냈던 간부 중에 너희가 가장 한심해· 한심하고 한심하고 또 한심해····”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너희들 전원 한 달간 내 시야에 띄지 말도록· 수단과 방식에 제한을 두지 않을 테니 알아서 수련해·”
“네 공주님·”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핵심이야· 너희같이 열등한 실패작들을 잠시 잊고 살 거고 한 달 뒤 집합시켰을 땐 쓸만한 존재가 되어있어야 할 거야·”
공주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안광이 번뜩였다·
“재회했을 때도 한심하다면 즉결 처분이야· 이해했으면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간부들이 쿵 소리가 나게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먼지가 흩어지듯 간부들이 자취를 감춘 후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에브는?”
“플란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잘됐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고는 있지만····”
공주가 자신의 보랏빛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마이에브에게 주었던 것은 애초부터 가품으로 그녀의 행태와 말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주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이 생기는구나·”
“플란의 개성 때문입니다· 그를 성장시켜서 취한다는 계획은 좋지만 슬슬 우려도 되네요·”
“어떤 점에서·”
“벌써부터 몇몇 간부가 못 이기겠다는 망발을 지껄이는데 나중에 더 강해져 버리면 어떡합니까·”
공주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해야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니까·”
우려가 가득한 비서를 향해 말을 잇는다·
“애초에 플란이 네가 우려하는 만큼의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어· 태생을 구분 짓지 않는 ‘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게 필요하니까·”
“언젠가 천(天)이되어버리면요? 마법사의 천·”
그런 말을 듣고도 공주 디아나는 태연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서 내가 자살이 아닌 수면을 택하는 거야· 하루하루 지루해도 굳이 살아있는 거라고 공허의 지배자께서도 부활하면 강자가 많은 편을 바라시겠지·”
“저는 공주님의 세계가 영원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플란이 그런 존재가 되어버리면 바꾸어 말해 새로운 위협이 생긴다는 것 아닌가요?”
공주가 픽 웃었다·
가소롭다는 웃음이 아니었고 허세도 아니다· 즐거움이 순수히 담긴 여유였다·
“그저 한없이 즐거워해라· 새로운 강자를 맞이하며 끝없이 넓어져야 하는 것· 그게 공허라는 걸 잊지 마·”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감히 하나만 여쭙고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선 플란을 지금 어떻게 할까요?”
“흐음···· 한 번 만나볼 때가 되기는 했지· 우선 네가 한 번 가보도록 해·”
“대화로 합니까? 아니면 전투로 합니까·”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지· 영리하게 접근해·”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현명하게 해보겠습니다· 공주님을 조우시킬 자격이 있는지 전력을 다해 평가해볼게요·”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확실해·”
“예·”
·
·
·
비서는 귀를 쫑긋 세우고 공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
공주는 어느덧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아카데미 마법 학부의 강의실·
플란은 마법 학부 대표의 수를 늘렸다·
베키 트릭시 유시아 루이스 마이에브· 여기에 플란까지 포함한다면 총 6명이 대표가 되었다·
플란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대표를 추가하는 것쯤은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 학부에서도 어떤 대표가 합류했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 결과····
“편입생 마이에브의 자기소개가 있겠습니다·”
마법 학부의 총장과 교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강의실 마이에브는 이곳에서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박수 소리가 터지고 뒤이어 엄청난 시선이 몰린다· 마이에브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강단에 올랐다·
위장하거나 가면을 썼을 땐 긴장했던 순간이 없다시피 했는데 본모습으로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 자신만을 바라보는 상황·
‘미쳐버리겠네····’
태어난 이래 가장 오묘한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겁박을 주는 것은 자신이 있었는데 어딘가에 소속되어 협력하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유시아와 베키는 사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트릭시가 팔꿈치로 베키의 옆구리를 찔렀다·
“발표 시작한다잖아· 좀·”
“아 응응· 미안·”
마이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은 무엇일까· 스스로조차 잘 모른다·
“마이에브···· 입니다·”
마이에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족은 여동생 하나가 있어요· 기초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마법에 흥미가 많은 편이에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조리 있게 정돈되지 못한 말은 횡설수설 나열되었고 본인은 한심할 정도로 우물쭈물하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지내본다는 게 어색해요· 그렇지만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부끄럽지 않은 마법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
마이에브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 후련함은 도대체 무엇일까·
남을 향해 내뱉지만 본인의 귀에도 여실히 들린다· 즉 이것은 사실 자신에게 내뱉는 고백이었다·
자신을 마주하고 나누는 진솔한 대화였다·
“플란에게 잘 배울게요· 배운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무리에 잘 녹아들기 위해서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마칠 때쯤 주변이 너무나도 고요했다·
후련하긴 했지만 갑자기 창피함이 밀려온다·
그때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가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좋은 분이 들어오셨군요· 알겠습니다·”
“네?”
총장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들을 비롯해 다른 대표들도 마이에브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주었다·
“····”
마이에브는 기쁘고 또 얼떨떨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적이 드문 길을 지나치게 되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흉내가 제법 어울리는구나·”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 하지만 동시에 누구인지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목소리·
마이에브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마이에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었어? 이러다 인간의 아이도 가지게 생겼네·”
공허에서 늘 공주의 곁을 지키던 비서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
뭐라 채 반응할 틈도 없이 비서의 손이 마이에브의 어깨 위로 얹어지려는 순간·
탁─!
불현듯 발현된 염동이 그 손을 쳐낸다·
“그 손 치워라·”
이번에도 역시 익숙한 음색·
두 혈귀의 고개가 동시에 옆으로 돌아간다·
“품위가 떨어지니까·”
그리고 그곳에는 플란이 있었다·
삼자대면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