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
“····”
당황스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일까· 보좌관은 한동안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한형지옥의 가시들을 한 차례 갈무리했다· 그것들이 여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있음을 인지한 후 의아해하며 묻는다·
“처음 겪는 일이군 내가 여전히 이 결계의 주인인데····”
“나 또한 주인이 되었을 뿐이다·”
“음?”
“마지막 고대 룬어를 지적하지 않은 이유지·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것으로 교체했다·”
“고대 룬어····”
보좌관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묻는다·
“플란 네가 고대 룬어에 대해 안단 말인가· 아니 알고 있군· 도대체 어떻게 활용했길래 고유 결계의 공동 주인이 된거지?”
“그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하지· 지금의 너는 결코 질문할 입장이 아니다·”
“어째서·”
보좌관을 향해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분명히 언급했을 터인데 책임질 준비가 되었을 때 나를 평가하라고·”
“책임이라···· 플란 아는 걸 전부 실토하라던 건 그런 뜻이었나·”
보좌관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기꺼이 그리하지· 어차피 너는 증명이 되었어· 공허의 귀빈 대접을 받을 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보좌관은 당혹감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도리어 빠르게 납득한 뒤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하겠다·”
“나는 분명 아는 것을 실토하라고 했을 텐데·”
“그래 설명을 장소로 대신하겠다는 이야기야·”
거짓말을 하는 눈빛은 아니었기에 결국 응해주었다· 물론 이것이 설령 함정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아카데미를 벗어난 뒤 인적이 드문 산기슭으로 향했다·
“워낙 은밀하고 또 민감한 공간이야· 이동하는 데에 시간이 꽤 소모된다는 점 양해를 구하지·”
보좌관은 바닥에 커다랗고 붉은 팔각형을 새겼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밤과 새벽을 지나 날이 밝는 순간까지도 각 모서리에 룬어를 입혔다·
나는 그녀의 행태를 가만히 관찰했다·
생소한 것이나 어렵지는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존재했다·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순간 이동의 마법진인가·”
“그래 정답이다·”
“육각형이 아니라 팔각형이라는 점이 흥미롭군·”
“말했듯 장소가 워낙 민감하다· 육각형 정도로는 안 돼· 꼭짓점을 2개 늘려야 하고 룬어는 무려 128개를 충당해야 하지····”
말을 잇던 보좌관이 문득 나를 뒤돌아본다·
“···한데 이건 흑마법인데? 어떻게?”
“결국 기조(基調)가 다르지 않아·”
“참으로 놀랍군 참으로 놀라워····”
보좌관이 그리 중얼거리며 다시 집중했다·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싶었기에 나는 나름의 보조를 했다· 주변에 결계를 생성시켜 내부의 기류가 원활해지도록 유도하는 식이었다·
보좌관이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았다·
비대칭으로 정돈되어 한눈을 가린 남색 빛 단발 드러나 있는 한쪽 눈이 나를 오묘하게 응시한다·
“플란 뭘 하는 거지?”
“이만하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다·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지금 나를 돕고 있다는 건가?”
“답답한 감정에 가깝겠지· 참 느려터졌군·”
보좌관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문득 이런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껴져서 그녀를 다시 한번 재촉했다·
“뭘 쳐다보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그저?”
“마이에브가 어떤 점에서 현혹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네게는 암컷을 홀리는 재주가 있군·”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터무니없어서·
대화는 그렇게 끝을 맞이했고 보좌관이 다시 집중했다· 결국 팔각진이 룬어로 빼곡하게 채워진 것은 해가 아득히 높게 걸린 정오쯤이었다·
“발현─·”
세상이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뒤집히더니 시야가 일변한다· 그저 어두운 공허의 무(無)· 이곳이 보좌관이 말한 목적지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상은 없나? 숨쉬기 힘들다든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어두운 공간이었지만 보좌관이 양옆으로 빛을 발하는 가시들을 세웠다· 붉은 가시들은 가로등과 같은 역할을 하며 길을 만들어냈다·
“플란 잠시 걷지·”
우리는 한동안 대화 없이 걸었다· 길이 늘 직선인 것은 아니었다· 곡선으로 휘어진 구간도 있었고 나선형으로 엮인 구간도 있었다·
문득 보좌관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플란·”
“무엇이지·”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 것이 아니야·”
대화 직후 보좌관이 농담을 내뱉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좁았던 복도의 간격이 벌어지며 흡사 전시관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이다·
틱─
틱─
불이 하나둘 켜지며 복도가 차츰차츰 밝아진다·
아득히 넓은 벽면은 새하얬고 그 위로는 경계선이랄 것이 없는 벽화가 수없이 늘어져 있었다·
보좌관이 중얼거렸다·
“지금부터는 걸을 필요가 없다·”
그녀가 손으로 가만히 벽화를 더듬었다·
“벽화를 감상하면 저절로 진입하는 방식이니까·”
“제법 흥미롭군·”
내 시선이 천천히 벽화 쪽으로 향했다·
맨눈으로는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에 각막 위로 마나를 덧씌워야만 했다·
시선이 닿자 벽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리를 이룬 인간들의 의상은 초라하다· 잎사귀 따위를 엮어 옷으로 걸친 채고 모닥불을 피운 채 한없이 신기해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인간····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인가·”
“그래·”
벽화를 감상하자 벽이 움직이며 우리를 스친다·
벽화는 대체로 시간순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규율을 정하게 되었고 격식을 차리게 되었으며 문명을 발달시키고 학습과 연구를 거듭했다·
보좌관이 조용히 물었다·
“플란 어떤 벽화인지 눈치챘나?”
“지금까지는 평범한 기록이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마침내 기사라 불리는 이들이 고유능력을 발현했다· 도태된 이들은 뒤늦게 마나의 존재를 깨닫고 마법을 익히게 되었다·
“플란 보이나· 인간은 늘 자신을 나름대로 발전시켜왔지만···· 고유 능력과 마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건 궤를 달리하는 도약이었다·”
“그렇지·”
“형언할 수 없이 획기적이었지만 인간은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 거지·”
보좌관의 눈은 감상에 젖은 듯했다·
반면 내 반응은 무덤덤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간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일이다· 그렇지 않나? 이 기적은 왜 주어진 거지?”
보좌관이 검지를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플란 정답은 이 벽화에 있다·”
하늘에서도 벽화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인간이 아닌 혈귀를 그려낸 벽화였다·
혈귀들은 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인간이 불을 보고 신기해할 때도 규율을 정할 때도 여러 기관을 설립할 때도···· 늘·
보좌관이 말했다·
“플란 발견이라는 게 무엇인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낸 것이 발견 아닌가?”
“정확하다·”
“그렇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간은 누구도 이것을 궁금해하지 않지·”
벽화는 어느덧 혈귀들이 인간 세계에 잠입하는 것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은 마법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인간계에 배치했다·
그때쯤 나는 보좌관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마법이 혈귀로부터 전해졌다는 말을 하고 싶나·”
보좌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그러하다· 기사들의 고유 능력은 자연적으로 생겨났지만 마법의 경우는 아니야·”
이게 사실이라면 이전 세계와 현재 세계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근원·’
이전 세계에서 마법은 인간들이 창조해낸 고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보좌관의 말대로라면 이 세계의 마법은 혈귀가 의도한 계획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보좌관이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다·”
칸막이가 쓰러지듯 복도가 뒤로 넘어가며 쓰러졌다· 나는 조용히 주변의 모습을 살폈다·
원형의 전시대가 계단식으로 솟아있었고 내부에는 책이나 물건 등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높이와 크기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규모였다·
나는 보좌관에게 물었다·
“이 공간의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공간에도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아예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남들이 붙인 이름은 있다·”
“얼추 예상되는군·”
“···역사(歷史) 인간들은 그렇게 부른다·”
“역시·”
감정이 복잡미묘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계의 인간들은 그간 혈귀들의 손아귀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플란 전부를 실토하라고 했나? 좋아· 지금부터는 가장 중요한 걸 알려줄 것이고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을 질문할 생각이다·”
보좌관이 책장 하나에 손을 턱 얹었다·
“고대 룬어다· 사실 실전되지 않았어·”
한쪽만 드러난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한다·
“세상에 전부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혈귀들 사이에서도 극비인 사실이다· 대륙이 고대 룬어의 힘을 활용한다는 건 공주님의 계획에 없기 때문이야·”
보좌관의 눈동자에 신묘한 빛이 어렸다·
“절대 공개하지 않았는데···· 고대 룬어를 이해한 인간이 등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
그 신묘함에는 기대와 적의가 반반 섞여 있었다·
“플란 도대체 고대 룬어를 어떻게 알고 있지·”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너는 우리의 지배자인가 적인가·”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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