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워낙 해괴한 말투였기에 상대할지말지 잠시 고민했다·
허나 응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무언가를 가르쳐서 금전을 구해야하는 입장이니·
마나를 활자 모양으로 다듬어 페이지 하단 빈칸에 적어넣었다· 이 활자는 이제 상대방에게 전달될 것이다·
[ ▷ 내가 아는거라면 무엇이든· ]
[ ▶ 가격은용? ]
[ ▷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다르다· ]
[ ▶ 혹시 경력이 어떻게 되시나용? 0ㅅ0 ]
0ㅅ0는 뭐지 다방면으로 살펴보았으나 알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언어중에서는 저런 것이 없고 마법적으로 살펴보아도 술식은 아니다·
결국 말 끝부분에 붙는 메세지는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해도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으니·
아무튼 경력이라 나는 가르침 경매에서 스스로를 남에게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 고민이 길지는 않았다·
가르침 경매는 익명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니 이전 세계의 나를 소개해도 괜찮으리라·
[ ▷ 학사 석사 박사 교수· 웬만한건 다 해봤지· ]
[ ▶ 아 그래용···? ]
그 활자를 끝으로 답이 오지 않는다· 이런식으로 물러나는걸까 싶었는데·
[ ▶ 혹시 이거 한 번 풀어보시겠어용? ㅎㅅㅎ ]
이후 복잡한 술식 하나가 페이지에 그려진다·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한 술식 미로를 이루는 회로 보는 이를 농락하는 듯한 수많은 곡선····
나는 이 술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트릭시가 출제해낸 베키를 처음 만났던 날 아고라보드에 적혀있었던 술식이다·
답과 풀이를 가르쳐주기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만 그 전에 이야기해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 ▷ 가르침을 요구하는건가· ]
[ ▶ 아 그럼용· 금화 10개 드릴게용· ]
금화 10개를 주겠다고는 하나 사실상 내 실력을 탐색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나는 옆에 앉아있던 베키를 불렀다·
“베키·”
“응?”
“한 달 식비로 얼마 정도를 쓰지·”
그러자 베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식비? 갑자기 내 식비? 왜 왜? 나 살쪄보여?”
“대답·”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베키가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입술을 떼었다·
“나는 좀 많이 쓰는데···· 한 달에 금화 1개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 열 개 정도면 나쁜 장사는 아니다·
상대방은 고작 탐색에 금화 열 개를 쓸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 거겠지· 고객의 재력이 풍부한 것은 내게도 희소식이다·
[ * 금화 10개를 받으세요· ]
때마침 상대방이 금화 열 개를 지불했다· 이건 후에 아카데미 내부의 은행을 방문하면 환전이 가능하다·
나는 상대방에게 풀이와 답을 알려주었다·
꼭짓점을 찾아내서 접근하면 어렵지 않다는 점부터 꼭짓점을 찾아내는 방법까지· 그다지 친절한 설명은 아니었다만 답이 되기에는 충분했으리라·
[ ▶ 음 그렇네용· 그렇게 하니까 풀리네용· ]
[ ▷ 더 배우고싶은건 없나· ]
이 정도면 스스로의 능력은 충분히 입증했다·
차분하게 다음 문제를 기다리는데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활자가 답으로 되돌아왔다·
[ ▶ 들어보니 출제자가 천재인 것 같네용· ]
[ ▶ 어떻게 술식으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을까용· ㅎㅅㅎ ]
트리비아를 덮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가르침을 하나 더 주는 셈 치고 활자를 입혔다·
[ ▷ 발상은 좋은데 구성이 허접하지· ]
[ ▶ 까불지 마· ]
“······?”
까불지 마· 분명 그렇게 적혀있는 활자가 금세 지워진다·
[ 삭제된 활자입니다· ]
[ ▶ 그럼 이것도 풀 수 있어용? ]
이번에는 다른 술식이 트리비아를 통해 전해져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나 스스로가 출제한 현재 아고라 보드에 보란듯이 출제되어있는 문제였다·
그때쯤이었을까·
“야 플란·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갑자기 베키가 내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트리비아를 덮었다·
“···여자친구야?”
“아니다·”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상대방 말투가·”
“소란 피우지 마라·”
그런데 그 때 경기장 한가운데에 바이올렛 교수가 남교수 한 명과 등장했다·
바이올렛은 바이올렛다운 차림이었다· 품 넓은 로브와 거대한 고깔모자· 그러나 로브로도 가려지지 않는 유려한 곡선은 가히 매력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강의 시작할게요·”
◈
모의전투는 단순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목하든 지목받든 혹은 무작위로 추첨되든 일단 대전 상대가 정해지면 마법을 펼쳐 상대방을 꺾는 것이 전부다·
바이올렛이 사전에 학생에게 걸어둔 보조 마법이 일정 강도 이상의 피해를 감지하면 강제로 관중석으로 송환시키기에 학생은 상대방을 꺾기 위해 전력을 다해도 괜찮다·
다만 탐험 과제를 앞두고 벌이는 모의 전투이기에 스크롤을 활용하라는 바이올렛의 지시가 있었다·
스크롤은 성능에 따라 그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이 모의전투는 재력으로 승부가 가름나는 불합리한 방식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바이올렛이 그 정도로 생각없는 교수는 아니다·
나름대로 공정한 점이 있다· 같은 등급의 스크롤을 무작위로 3개씩 뽑아 바이올렛이 직접 지급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현재는 베키와 헤일리의 모의 전투가 진행중이었다·
‘지겠군·’
확실하다· 베키가 질 것이다·
얼음 원소를 다루는 베키의 숙련도는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베키는 현재 스크롤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얼음 원소로만 풀어나가려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부러질 고집이자 아집일 뿐이지·
···그런데 굳이 스크롤 활용의 문제만도 아닌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베키는 경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다른 고민이 가득 들어차있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마법사로서는 많이 아쉬운 태도다·
이번에는 헤일리쪽을 살폈다·
‘그래도 기초는 있나·’
스크롤과 자신의 마법을 번갈아 사용해가며 헤일리는 각각의 단점을 상쇄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자면 아주 많다·
그 중 하나만 파고들어도 이길 수 있을 텐데· 이미 우위를 빼앗긴 베키에게는 그것을 파고들 깜냥이 없다·
거대한 대련장을 관중석이 둥그렇게 빙 둘러감싼 형태의 훈련장·
“아 아얏!”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베키가 보기좋게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지면을 굴렀다·
“그만· 충분해요· 헤일리 승·”
예상대로 헤일리쪽이 승리· 반전은 없었다·
바이올렛의 종료 명령이 떨어지자 헤일리는 베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민다· 그 상냥한 미소는 햇살과도 같다·
“다친 곳은 없니? 과격했다면 미안해·”
“아 아니야·”
먼지투성이인 베키가 먼지하나 없이 깔끔한 헤일리의 손을 붙잡고 일어난다·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헤일리와 흙먼지로 범벅된 베키· 둘의 모습은 특히나 대조적이었다·
“둘 다 크게 다친 곳 없죠?”
바이올렛의 물음에 헤일리와 베키가 나란히 고개를 끄덕인다· 교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자리로 돌아가요· 다음 순서 진행하게·”
“네· 교수님·”
헤일리가 생긋 웃으면서 먼저 관중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베키가 기운 없는 모습으로 터덜터덜 뒤따랐다·
“다음 학생 추첨할게요·”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튕기자 개구리가 명함을 툭 뱉는다· 호명이 이어진다·
“아리아 폰타인·”
아리아가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다· 바이올렛이 입술을 떼었다·
“전투 상대 지목할거면 하고· 없으면 추첨하고요·”
“플란으로 해주세요·”
아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지목했다· 바이올렛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가 나를 지목했다는 간단한 사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가십거리였다· 다른 학생들이 크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플란 쟤는 내기하고 자퇴하는게 나았을 텐데· 그럼 오늘 얻어맞을 일도 없지·”
“야 조용히해· 다 들리겠어·”
“들으면 뭐 어쩔건데? 그냥 들으라고 해·”
이 모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라서 나는 태연하게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굳이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저기 야· 플란·”
그러던 어느 순간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마주보며 걸어오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베키였다·
베키는 내 정면에 서서 우물쭈물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 졌어· 너라도 이겨·”
“······”
베키는 완전히 흙먼지덩어리가 되어있었다·
그것을 연민하거나 동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매캐한 먼지 향이 너무나도 거슬려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베키가 소매 부분을 킁킁거렸다·
“미안 향수 향 이상해?”
대답 대신 바람 원소와 염동을 활용해서 그녀의 겉면을 털어주었다· 그 추레한 몰골을 보고있자니 내가 다 숨막혀서·
그녀의 제복과 머리카락 등 골고루 묻어있었던 흙먼지가 염동에 의해 구체처럼 모여든다·
베키가 깔끔해질 때쯤엔 먼지 덩어리가 거의 탁구공만한 크기가 되어있었다·
“플란~”
돌연 다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금빛 머리카락과 나긋나긋한 미소·
헤일리였다· 방금까지 베키와 모의 전투를 치루고 왔으면서 그녀는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여자애 챙겨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본인 경기가 더 급하지 않니?”
“아 미안· 내가 괜히 말걸어서·”
베키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빠르게 나를 지나쳐갔다· 그러나 헤일리는 아직 내게 할 말이 남은 듯 했다·
“맞다· 그런데 플란은 왜 항상 베키랑만 다니는거니?”
무시하고 발걸음을 떼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어머 혹시 베키가 마음에 들었니? 나 졸졸 쫓아다닌지 얼마나 됐다고?”
하지만 이런 부류는 대답을 안 해주면 까불도록 설계되어있나보다·
“유감이네· 내가 베키 이겨버려서 어떡해· 그걸로 원망하는건 아니지?”
무슨 말을 해야 저 입이 다물어질까·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흐갹?!”
그러자 탁구공처럼 모였던 흙먼지가 팍 터지면서 헤일리를 뒤덮었다·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이 떠억 벌어진다·
자신의 몰골을 확인한 헤일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격분하여 소리쳤다·
“너 너 너···! 지금 뭐하는 짓이니?”
그녀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만 한 마디를 차분하게 덧붙였다·
“너보단 베키가 낫지·”
베키는 길안내를 잘하거든· 잔반처리도 잘하고·
내 말을 들은 헤일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해진 주변· 나는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를 기다리는 아리아의 시선에는 적의가 가득하다· 그녀는 나를 산채로 씹어먹을 듯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유감이다·
나도 마침 기분이 별로라서· 이번에는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플러스 진행 기념 연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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