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1
보좌관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엎드려서 빌라고? 나더러?”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보좌관이 내게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다· 혈귀들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도 이 대륙을 은밀히 조종해왔던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강하기에 더욱 휘말릴 수 없었다·
위기는 방향을 바꿔주면 든든한 전력이 된다· 그러니 보좌관과는 우선 심리전을 해 볼 셈이었다·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고 동시에 아군도 얻기 위함이다·
“어려운 요구인가·”
“플란 난도를 떠나서 애초에 불가한 일이다· 내가 몸을 숙이는 것은 오직 공주님 앞에서만이야· 그리고 하나 더·”
보좌관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비대칭으로 다듬어진 남색 빛 단발· 드러나 있는 한쪽 눈동자가 붉은빛을 발하는 채였다·
“우리가 해독하지 못한 고대 룬어는 겨우 네 개뿐이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고작 4개를 제외하면 연구를 모조리 끝마쳤다니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코웃음을 칠 수 있었다·
결국 ‘해석하지 못한 고대 룬어가 존재한다’는 명제가 사실임을 실토한 꼴이기 때문이다·
미연구 상태의 고대 룬어가 하나라도 있다면 내게는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내 평가는 늘 정확하다· 또한 현재 연구하지 못한 4개의 고대 룬어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플란 그래서 네게 묻는 것이다· 슬슬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싶지 않은데····”
나는 마침내 결정했다·
99가지의 진실에 단 1개의 거짓을 섞기로·
“가려야만 할 것이다· 내가 그 4개를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내 요구에 응하는 수밖에 없어·”
사실 나도 4개의 고대 룬어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다면 반드시 이해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그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관찰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교묘한 거짓을 섞었다·
정보와 지식만큼이나 거대한 힘이 있을까·
나와 보좌관 사이에서 전투 마법이 오가지는 않았으나 도리어 그런 상황보다도 치열했다·
태도 판단 주어진 정보···· 이따위 것들로 치밀하게 승부를 한 뒤 우위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뇌를 반복했다·
상대는 대륙을 쥐락펴락하는 녀석들· 이 대화에 따라 대륙 전체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쳇바퀴를 도는군· 잠시 후 다시 이야기하지·”
“그건 어느 때를 말하는 건가· 플란 이곳에 한번 발을 들인 이상 매듭을 짓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어·”
“십 분이면 충분하다·”
“십 분···?”
보좌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십 분으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많은 것이 달라지지·”
나는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렸다· 전투를 목표한 것이 아니었기에 우선은 보좌관도 지켜보았다·
책장을 재정렬하는 첫 발현 모든 도서를 한데 모아 부채꼴로 펼치는 두 번째 발현 각막에 마나를 덧씌워 이해를 돕는 세 번째 발현·
고작 세 번의 발현으로 준비를 마쳤다·
마법의 보조를 받은 눈은 빠르게 내용들을 훑는다· 학습이 아닌 관찰이 목표였기에 신속했다·
“됐다·”
정확히 10분이 지난 시점 나는 고대 룬어를 제외한 서적들의 내용을 전부 확인했다·
공간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정렬한 뒤 보좌관과 나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플란 10분간 무엇을 알아냈지·”
“너희는 인간의 마법을 깊게 연구했다· 하지만 수인 엘프···· 다른 종이 사용하는 마법은 처참하군·”
나는 조용히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 계획대로 해왔던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내 말이 틀렸나? 특히 엘프들의 마법 연구는 도중에 아예 놓은 것 같다만·”
보좌관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걷혔다·
그리고 이내 뒤덮이는 감정은 불편함과 거리가 굉장히 먼 반가움 비슷한 것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떼자 오묘한 말투가 흘러나온다·
“플란 엘프와 수인의 마법도 판단할 수 있었나· 심지어 연구 진척도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라니···· 상당하군· 상당해·”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커진다· 하지만 무언가를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고작 이십년이 조금 넘는 세월을 살았고 심지어 그 기간의 절반을 검을 휘두르는 데에 소모한 너다· 도대체 어떻게 대륙의 마법을 전부 섭렵했는지····”
자기 자신과 대화하듯 보좌관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 순간 큰 소리로 어색한 억양의 웃음을 터뜨렸다·
억양이 어색한 이유는 뻔했다· 보좌관에게 있어 웃는다는 행위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을 터·
“플란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긴 하구나· 분노가 아닌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내게 수준이 맞는 상대가 생긴 건 처음이군·”
그녀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린 뒤 선율을 지휘하듯 움직였다· 그러자 공간이 이전과는 다르게 정렬되며 담소를 나누기 좋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인간계로 치면 찻집과 비슷한 환경이었다·
보좌관이 보다 유순해진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엘프 연구는 포기한 것이 아니야· 플란 이유는 나름대로 예상이 되지 않나?”
“장수종과 단명종의 차이인가·”
“바로 그거야· 엘프는 장수종· 세월에 억눌리지 않기에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우리로서도 계획을 아주 오랜 기간으로 잡는 수밖에 없어·”
그녀가 나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눈동자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싶은 듯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훌륭하지· 대부분의 혈귀들이 본능 때문에 인간을 멸시하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서 인간만큼 매력적인 존재는 없어·”
“매력?”
“단명종은 업적을 남기겠다는 집착이 크다· 덕분에 종종 반짝이는 무언가가 탄생하지 따라서 우리는 인간들을 보존하기 위해 대륙을 나누고····”
그때 공간 전체가 뒤흔들렸다·
보좌관을 향해 검은 그림자들이 몰아쳤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림자가 그녀를 잔뜩 뒤덮는다·
기이한 속삭임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 소리는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처럼 부산스러웠다·
펑─!
그러나 보좌관이 그것을 한 손으로 걷어낸다·
“괜찮다· 괜찮아···· 공허의 수호자들은 진정하도록· 공주님께서도 이해하신 일이다·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괜찮아·”
그녀의 검지가 하늘로 향했다·
어느샌가 무척이나 커다란 보라색의 안구 하나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주의 눈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애초에 플란과는 모든 걸 털어놓아야만 대화가 통할 느낌이니 너희들은 무엇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공허의 수호자라 불린 이들을 진정시킨 뒤 보좌관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려던 말이 예상되는군· 인간 수인 엘프···· 각자가 지내는 구역을 너희가 지정했다는 것인가·”
“플란 바로 그거다·”
보좌관이 허공에 지도를 펼치며 말을 잇는다·
“플란 인간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려니 문제가 있었다· 모든 종족이 뭉쳐서 지내면 인간은 제대로 생존하질 못해·”
“그래서 대륙을 나누었나·”
“그래 대수림에는 나무를 심고 베르켈에는 마수들이 좋아하는 마기를 흩뿌렸다· 모든 것이 우리의 손아귀 안에 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보았을 때 경이로운 일이다·
물론 이전 세계에서도 이런 시도를 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종족 간의 세력 구도가 비슷비슷했기에 결코 한쪽으로 치우친 적이 없었다·
이토록 치밀하고 이토록 규모를 키워서 남을 지배하려 드는 종족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만큼 이득 독식에 성공한 종족도 없었다·
이런 녀석들이 굳이 나와 타협하려 드는 이유는····
“공허의 지배자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군·”
“음?”
“엘프 수인 마수· 전부 머리가 커져 버렸지· 슬슬 뜻대로 세력 구도를 조종하기가 어려웠을 터·”
요는 간단했다·
“혈귀들의 세력은 최대한 숨기고 싶고 슬슬 힘에는 부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4개의 고대 룬어가 필요하겠군·”
내 발언을 보좌관이 살짝 불편해했다·
“힘에 부치다니 그런 발언에는 주의해라·”
보좌관은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탕─!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지도를 손바닥으로 쳤다· 그러자 손바닥에 눌린 섬 하나가 서서히 지워졌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플란 네가 보는 앞에서 섬 하나를 통째로 지워버렸다· 다행히 무인도였지만 이게 요충지였다면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
바닥으로부터 검붉은 가시 하나가 솟아난다· 보좌관은 그것이 지팡이라도 되는 듯 손으로 쥐었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플란 너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또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어·”
그녀가 가시 끝으로 나를 가리킨다·
“이제 네 차례야· 내게 믿음을 줘라·”
“믿음이라·”
“나머지 4개의 고대 룬어를 연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성과를 살짝만이라도 보여줘·”
“보여준 뒤에는·”
“내가 엎드려서 비는 것은 안 돼· 하지만 플란 믿음이 생기게 된다면 의문을 품지 않고 지원하겠다·”
혈귀들의 지원이라면 의미가 꽤 크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상의 기틀을 짜놓은 이들이 내게 협조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럼 나는 과연 무엇을 선보일 것인가····
“좋다·”
그런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미 내가 시도해왔던 것이 있었고 지금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듯 했다·
“플란 어떻게 하겠나?”
대답 대신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전에 고대 룬어를 연구하며 어렴풋이 보았던 문· 이전 세계와 현재 세계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통로·
···지금 그것을 펼칠 생각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zakuti님 늘 감사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연재가 살짝 지연되었네요·
하지만 늘 휴재는 없도록 노력하는 작가 되겠습니다!
늘 최선의 한 화를 보여드리고 싶고 연참도 하고 싶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서 너무나도 착잡한 요즈음이네요· 회복이 되는 즉시 어떤식으로든 노력해보겠습니다·
또한 삽화를 준비중이니 조만간 삽화와 함께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고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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