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2
정신을 최대로 집중했다·
우선 보좌관과 나의 심상을 공유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같은 시야를 얻는다·
펼쳐지는 것은 광활한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도화지에 회색빛 석자재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이 제각각 아귀를 맞추며 하나의 통로를 만들어낸다·
추측컨대 이것은 현재 세계와 이전 세계를 이어놓는 통로다· 만일 문을 열어젖힌다면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 또한 가능해지겠지·
팅─!
하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고 견고하다· 우리가 함께 관찰할 수 있는 풍경도 여기까지였다·
나는 조용히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아직인가·’
도합 4개의 고대 룬어 연구를 마치지 못했기에 아직 문을 열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어쨌든 이것만으로도 내 연구에 진척이 있다는 증거는 되었으니 괜찮을 터·
아니나다를까 같은 풍경을 바라본 보좌관의 얼굴 위로 복잡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금 그건····”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이 나에게로 향했지만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보좌관 스스로가 이미 답을 알고있을 테니 말이다·
“놀랍군 놀라워····”
그녀가 같은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방금 그 통로는 뭐지? 어쨌든 인정하마·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고대 룬어를 연구하고 있었어· 놀랍다· 실로 놀라워!”
바로 그때였다·
뚝─ 뚝─
새까만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액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했다· 굉장히 미끌거리고 점성이 높은 고체와 액체 사이의 무언가였다·
그것들이 서로 엉기며 각각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짐승도 있었고 사람도 있었고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한 것도 있었다·
나를 서서히 둘러싼다는 점 정도가 공통점일까· 나는 보좌관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짓이지·”
“···플란 양해를 구하지·”
보좌관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내 욕망이 억제되지 않는다· 너를 즉석에서 완전히 취하라는 이 마음이 도저히 억눌러지지 않는구나·”
나는 ‘공허의 수호자’라 불렸던 점액질들을 바라보았다· 형세를 보아하니 고운 방식으로 나를 취하려는 건 아닌 듯 했다·
“그런가·”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생각했다· 이 전투의 결과를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패배할 것 같지 않았다·
수호자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을 때·
나는 공간의 일부를 아예 우그러뜨렸다· 염동 공간 조작· 세 가지 계열을 한 번에 다루는 기예였다·
콰드득─!
서재의 일부가 커튼 자락처럼 접히며 구겨진다· 공허의 수호자들은 그곳에 억류된 채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고 그렇게 서서히 부서져간다·
그런데 그 때·
공간의 일부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건 의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리창의 일부가 깨진 것처럼 틈새가 드러났다· 지금의 어두운 공간과는 정반대인 새하얀 틈새였다·
다른 공간이 있었나· 삶을 살다보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직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이 나를 틈새 안으로 이끌었다·
새하얀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
보좌관이 처음으로 평정심을 잃은 듯한 모습을 내비쳤다· 그것이 내 직감을 자꾸만 부추겼다·
공간에 들어서자 새하얬다·
서재가 끝도 없이 나열되어있는 것은 동일했지만 배경이 새하얗다는 점에서 검은 공간의 반전세계같은 공간이었다·
“플란 잠시만!”
보좌관이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눈 한 번 깜빡할 찰나 보좌관이 어느때보다도 다급하게 이동 마법을 펼친 것이었다·
그녀가 진지한 어투로 읊조렸다·
“이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플란 당장 뒤로 물러서도록·”
“글쎄·”
나는 보좌관의 경고를 되새기지 않았다· 이동에만 집중해서 점점 틈새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보좌관이 가로막고 내가 이동하고 가로막고 이동하고 가로막고···· 같은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보좌관의 얼굴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플란 마지막 경고다·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을 어떤 상황에서도 허락하지 않아· 자의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전력을 다해주지·”
나는 우선 이해한 척 수긍한 척을 했다·
“이해했다· 내가 호기심을 안 참는 편이라·”
살기가 바람처럼 불어 우리의 몸을 휘감았다·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긴장이 뻣뻣하게 들어가있던 보좌관의 어깨가 살짝 내려앉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것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때·
나는 공간을 가득 메운 책장들을 염동력으로 무너뜨렸다· 보좌관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때였다·
쿵─ 쿵─
“플란 네가 정녕···!”
보좌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녀가 책장들을 바로세운 뒤 붉은 가시를 쥐었다· 그 예리함이 나를 꿰뚫으려는 순간·
쭉 뻗어오던 가시가 한 순간에 정지했다· 내가 어느샌가 손에 쥔 서적 한 권으로 궤도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플란····”
보좌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턱 끝에 맺힌 뒤 지면에 떨어질때까지도 우리는 아무 대화가 없었다·
“말했을 텐데 나는 호기심을 참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책을 촤르륵 소리가 나게 넘겼다· 각막에 마나를 덧입혔기에 안의 내용을 살피기에는 충분했다·
기가 차는 내용이었다·
“하····”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고 나중에는 기가 찼다· 하지만 결국 흥미로움을 품은 채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내가 서적을 읽고 생각을 갈무리하는 사이 보좌관의 얼굴은 서서히 창백해져갔다· 나는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좌관·”
고작 세 글자를 내뱉는 사이에도 내 얼굴에는 점점 미소가 어렸다· 땀방울이 점점 많아지는 보좌관의 얼굴과는 아예 정반대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지 어쩔 줄 몰라했다· 당황감을 조금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플란 설마 내용을····”
“보좌관 우선 앉아보도록· 대화좀 하지·”
불안함을 느낀 것인지 보좌관이 재빠르게 행동했다· 깨진 유리창처럼 생겨난 틈새를 메꾸더니 급하게 의자를 만들어 앉는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며 재차 물었다·
“그래서 내용을 얼마나 확인했지?”
“전부·”
“····”
보좌관이 허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보좌관· 이 세계에서 마법적인 성취를 이뤄낼 때마다 내가 어떤 감상을 품었을 것 같나·”
“뭐 뿌듯했을 것 아닌가·”
“틀렸다·”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이 세계의 마법은 왜 고작 이정도일까· 왜 하향평준화 된 상태일까···· 늘 그것만을 고민했다·”
보좌관의 의자를 살짝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를 냉정히 내려다보았다·
“그 모든 것이 네 독단이었군·”
나는 바닥으로 던졌던 책을 다시 염동으로 끌어당겼다· 보좌관의 눈에 똑똑히 보이도록 펼친 뒤 주요 대목을 하나하나 검지로 짚어주었다·
[소환 학파가 발달하지 못하는 것에는 조작 학파의 영향이 크다· 눈에 보이는 것을 다루려는 그들은 소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베르켈의 마수들이 흉폭해지는 원인은 수인으로 보인다· 그들의 마법은 마나에 잔향을 남기기에 결과적으로 혼탁하게 만들어···]
“자서전도 아니고 논문에 이런 내용들을 교묘하게 섞을 줄이야·”
“····”
“모두가 발전에만 집중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갈등을 조장했군· 건방짐이 도를 넘었다만·”
“그만 그만해라· 굳이 말 할 필요없어·”
보좌관이 먼저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항변하듯 말을 이었다·
“대륙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이미 밝혔잖나?”
“이런 방식이라는 건 꽁꽁 숨겼지·”
“플란 어쨌든 신경쓰지마라·”
“그래? 과연 공주도 신경쓰지 않을까·”
“···!”
보좌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얼굴의 혈색이 살짝 옅어진 상태였다·
“보좌관 파악하지 못했을 것 같았나· 대륙이 공주가 아닌 네게 충성하도록 만들 계획이었군·”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예시를 보자·]
밑에 여러가지 술식들이 있었지만 교묘하게 읽는 자를 세뇌시키는 흑마법 술식들을 끼워넣었다·
첫 번째로 갈등을 조장하고·
두 번째로 갈등을 겪는 이들이 서로를 적대하기 위해 마법 서적을 찾게 만들고·
세 번째로 교묘히 숨겨든 세뇌 술식을 활용하여 자신을 위해 충성하도록 만든다· 굉장히 오랜 기간을 목표로 잡은 치밀한 방식이었다·
이 모든 것이 보좌관이 공주 몰래 벌인 만행이다·
“····”
“온 대륙을 교묘하게 세뇌시켜 휘하에 둘 생각을 하다니· 입으로는 충성을 부르짖으면서 실은 누구보다도 공허의 지배자가 되고싶었나·”
보좌관은 어떠한 대답도 내뱉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공주에게 가겠다·”
“그건 안 돼!”
보좌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숨까지 헐떡이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다급한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충성심이 깊어야 할 2인자가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니 필히 공허 전체가 뒤집어질만한 일이리라·
나는 괜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는군·”
뜸을 들이자 보좌관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흠·”
표정을 살짝씩만 바꾸어도 보좌관은 숨이 턱턱 막히는지 호흡을 헐떡였다·
“흐음·”
보좌관의 얼굴이 아예 새하얘졌을때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지· 고대 룬어 연구에 협조한다면 당분간은 비밀이 유지될지도····”
“어 어떤 방식의 협조·”
보좌관의 반응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어쩐지 꼬리를 내린 강아지같은 형색이었다·
그녀가 내게 재차 질문했다·
“어떤 방식의 협조 말인가? 일단 말을 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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