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3
“어떤 방식의 협조 말인가? 일단 말을 해· 응?”
보좌관의 태도가 제법 다급했다·
그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쇄골 위에 새겨진 문신이 보였다· 그림이나 무늬는 아니었고 187이라 적혀 있는 숫자가 고작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보좌관 직책도 대체를 피할 수 없는 모양이군· 187번째 보좌관 그게 너의 정체인가·”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향해서 말을 이었다·
“보좌관 너는 겁쟁이다·”
“겁쟁이? 내가?”
“처음에는 단순히 대체되기 싫은 마음이었겠지·”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점점 대체 당한 뒤에도 너의 것이 잔존하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이 공간이 그 결과물 아닌가·”
“····”
“한 공간에 틀어박혀 누군가가 뜻을 이어받기를 바라는 것· 겁쟁이만이 계획할 수 있는 일이지·”
보좌관은 이야기를 들은 뒤 손으로 자기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여럿 스쳐 가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그러니까 아마 자신조차도 제대로 정립해두지 못했던 자신을 이제야 막 이해한 듯했다·
“겁쟁이····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한참 후에야 입을 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플란 나는 무엇을 협조하면 된단 말이냐· 나에게는 지금 그게 가장 중요해·”
나도 본론에 들어갔다·
“4개의 고대 룬어를 내게 보이도록·”
“4개 전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좌관이 당황스러워하며 되물었다·
“그래·”
“전부를 주는 것은 좀···· 아직 대륙에 배포하지 않은 마법들이 많다· 플란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 아니었나?”
“그건 이미 머릿속에 있다· 때가 되었을 때 내가 마음먹고 가르치면 그만이야·”
보좌관이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표정 위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끝을 볼지 전투할지 요구를 받아들일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결국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보좌관·”
“음?”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마법의 발전뿐이다·”
“그게 왜·”
“타인의 기억에 남는 방법이 세뇌와 지배만 있는 것은 아니지· 네가 협력한다면 분명 그에 걸맞는 이득이 있을 터·”
“걸맞는 이득?”
“그래· 내가 약속하지· 너의 새로운 뜻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며 또한 기억하는 이들도 생겨날 것이다·”
문득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낮은 음색으로 두글자를 되뇌었다·
“기억····”
“어리석음을 끌어안은 채 가라앉을 것인가 새로운 세상에 뛰어들 것인가· 선택은 네 몫이다·”
“····”
보좌관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딱 한 마디를 했다·
“플란 이번에는 내게 십 분만 주겠나·”
◈
우리는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관망했다·
“····”
보좌관은 한동안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일 터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많아질 테니까·
위에서 바라보는 이곳은 하나의 미로처럼 보였다· 정교한 사회를 이룬 개미집 같기도 했고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린 듯 손을 들어 올렸다가····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다시 내린다· 이 공간을 어찌 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한 모양이었다·
“플란·”
“무엇이지·”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겁쟁이야· 줄곧 나만의 세계가 생겨나기를 이곳에서 바라왔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대 룬어는 내놓을 것인가·”
“내놓는다· 내놓는다···· 플란 그건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좋지 않군· 단순히 복종하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달라·”
보좌관이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인지라 몇 가지 감상을 늘어놓고 싶은데· 들어주겠어?”
“그러지·”
“우선 십분간 모멸감과 이득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했다· 모멸감의 크기가 더 컸더라면 나는 기꺼이 자멸을 택했을 거야· 이 공간도 스스로 없애버렸겠지·”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의외로 모멸감이 크지 않았다· 플란 네 계획을 들으면서···· 마법의 발전만을 위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나도 모르게 궁금해졌어·”
보좌관이 문득 손 하나를 뻗었다·
그러자 서적 한 권이 휙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손아귀 안으로 부드럽게 안착한다·
그녀는 그것을 내게 건넸다·
“도합 네 개 중 첫 번째 고대 룬어다·”
아직 해독되지 않은 탓일까· 서적의 표지에는 ‘미완성 1’이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세 개는?”
“워낙 중요한 룬어이니 한 곳에 모아두지 않는다· 전부를 구해오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려· 심지어 마지막 한 권은····”
보좌관이 말끝을 흐렸다· 내가 되묻는다·
“마지막 한 권은?”
“···공주님이 지니고 계셔서·”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99의 진실에 1의 거짓을 교묘하게 섞었듯 그녀 또한 조금의 거짓을 섞었던 모양이었다·
보좌관이 슬그머니 내 눈을 피했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새하얀 공간이 드러나게 될 줄도 몰랐고 내가 너에게 고대 룬어를 건네주게 될 줄도 몰랐어·”
“어쨌든 나머지도 조속히 구해오도록·”
“알았다· 알았다고·”
그런데 그때였다·
휙─·
공허의 수호자 한 명이 보좌관 앞으로 내려앉았다· 입에는 웬 서찰을 물고 있는 채였다·
보좌관이 내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을 살펴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내 그녀가 서찰의 내용을 빠르게 살핀다·
“흐음····”
보좌관이 서찰을 말없이 내게 건넸다·
[최근 세간이 소란스러웠던 점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황실은 미뤄왔던 검성을 결정하기 위해····]
활자가 많았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대륙 최강의 인간· 검성을 결정한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곁에 서 있던 보좌관이 먼저 침묵을 깼다·
“대륙의 일은 우리도 주기적으로 보고받지· 흘러가는 형국에 따라 서재의 내용을 수정하니까·”
“그래·”
“플란 나는 검성을 정하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 또한·”
보좌관이 말을 잇는다·
“황실에서 정권 교체가 있었던 모양이야· 영웅들이 황실에 충성하는 것을 보여주고 황실은 그들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입지를 공고히 다질 생각이겠지·”
“그건 너무 뻔한 이야기다· 중요한 건····”
“그래 바로 이 부분이지·”
유난히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으니·
[우승자를 영웅으로 지정한다· 기사의 경우 검성의 칭호가 주어지며 마법사의 경우 원하는 칭호를 만들어내 공인(共認)하겠다·]
“플란 마법사의 참가도 허용되는 모양이다· 새로운 정권은 마법의 입지를 꽤 인정하고 있어·”
“그렇다면····”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상 대륙에 존재하는 ‘인간’중 가장 뛰어나다는 자격을 공인받을 자리이기 때문이다·
“마침 잘 됐군·”
이번에 얻은 고대 룬어 ‘미완성 1’을 사용해보기에도 꽤 적절하고 여러모로 시기에 맞았다·
“보좌관·”
“왜·”
“바로 복귀해야겠다· 내가 일일이 공허를 방문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일주일 간격으로 찾아오도록·”
보좌관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내 시선을 마주하자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룬어 연구의 진척을 그때마다 확인하지·”
◈
플란이 떠난 뒤 보좌관은 다시 공주를 알현했다· 187번 보좌관이 미동조차 없이 대기하자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난 공주가 말했다·
“직접 만나보니 어때·”
“항상 의외인 사내입니다·”
“항상?”
“예·”
보좌관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의외인 점에 적응하려 하면 또 의외인 점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항상 의외인 존재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공주가 자세를 바로 하고 보좌관을 응시했다·
“보좌관·”
“예· 공주님· 듣고 있습니다·”
“플란에게 관심이 좀 생겼어?”
보좌관은 공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관심이라 하시면···?”
“마음속에 점점 생겨나는 관심이 흥미인지 애정인지 철저하게 구분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걸 못하면 마이에브처럼 되는 거지·”
“절대 마이에브처럼은 되지 않겠습니다·”
보좌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공주의 시선은 어쩐지 즐거운 듯 보이기도 했다·
“보좌관·”
“예· 공주님·”
“너는 아직 쓸모가 있어· 그래서 지켜보는 것이지만 플란의 존재가 너에게 독이 된다는 건 알아야 해·”
“예· 주의하겠습니다·”
짧은 알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공주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늘 애매모호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보좌관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제 공간을 방문했다·
“····”
여전히 새하얀 공간·
늘 계획대로 살아왔던 삶이거늘·
처음으로 자신의 앞일이 예측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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