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8
아침·
“생각보다 엄청 북적거리네···?”
고서관 안에 진입한 후 베키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란 이러했다·
이해할만했다· 고서관이라면 으레 오래된 종이 냄새와 고요함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새벽에 무슨 소동이 있었다는 모양인지 꽤 시끄러웠다·
웅성거리며 모여있는 교수들이 그 증거였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중 바이올렛이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아 플란· 왔나요·”
“고서관 내부가 꽤 소란스럽군·”
“새벽에 누군가가 고서관 내부로 무단침입했던 모양이에요· 뒷수습으로 조금 소란스럽네요·”
무단침입이라는 말은 꽤 과격하다· 아니나다를까 베키를 비롯한 대표들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생겨났다·
“무단침입···?”
그중에서도 특히나 불안해하는 것은 베키였다· 하긴 영웅전을 준비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장소가 고서관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음 그래도 안심하세요·”
바이올렛이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봤는데 서적들은 전부 안전해요· 경보 결계가 빠르게 반응한 덕분이겠죠· 아마···· 침입자가 무언가 수를 쓰기 전에 도망친 것 같아요·”
“휴우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베키가 그제야 몸의 긴장을 풀며 안심했다· 바이올렛은 플란을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간다·
“이런 일이 생긴김에 경비도 강화하고 청소도하고 했는데···· 혹시 또 필요한 거 있을까요?”
“충분하다· 자리만 비워주면 될 것 같군·”
“좋아요· 제 위치에서 늘 응원할 테니까·”
바이올렛이 교수들에게 돌아가서 몇 마디를 건넨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서관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대표들에게 눈빛으로 인사한다·
그러고보니 이제는 대표들을 업신여기는 눈빛이 하나도 없었다· 의심하는 눈빛도 없고 그저 응원하는 기색일 뿐·
대표들 역시 그러한 것을 새삼스러워했다· 알게모르게 작은 부분에서 큰 부분에서 자신들의 생활과 주변이 모두 변해가고 있었다·
트릭시가 조용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여기구나 마법 학부의 고서관·”
“웬일로 그렇게 신기해해?”
베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택엔 이런 게 없으니까·”
“네 저택에 없는 것도 있었구나·”
고서관은 사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연식이 있는 장소다· 늘 세련된 공간을 접하며 살아왔던 트릭시 입장에서는 신기할 법도 하지·
이곳에 있는 오래된 지식도 외관으로 드러나는 오래된 풍경도···· 그 전부가 말이다·
“어라?”
루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이 있었다·
“「섬광」? 이거 빛 원소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되게 유명한 서적이잖아·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베키가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
“섬광? 그건 비전공자여도 알지· 와 근데 그게 있을 정도면···· 혹시 얼음 계열 서적도 있나?”
“무조건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러네?! 이쪽은 통째로 얼음 원소잖아!”
이들이 들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악기를 다루고자 하는자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곡 하나씩을 품고있다· 고수의 경지에 이르게되면 반드시 연주하겠다는 결심을 매일같이 다진다·
그러나 그러한 날이 오기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쉬운 곡을 연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밟아나가야 할 계단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길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목표하는 서적과 마법이 있더라도 선행해야 할 훈련들이 굉장히 많다· 따라서 도달하는 길이 참으로 먼데···· 그것이 지금 눈 앞에 놓여있었으니 눈이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이건····”
트릭시의 눈도 문득 감상에 젖었다·
“어쩐지 고서치고는 새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푸른 화염에 관한 기록이 있어· 우리 어머니때에 써졌던 책인가봐·”
루이스와 베키 그리고 마이에브도 책을 각자 한 권씩 꺼내들었다· 당연히 자신의 전공 분야와 관련되어있는 고서였다·
베키가 문득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플란 이것좀 봐봐· 옛날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해야할까? 고서에는 그런게 녹아있어서 참 재밌어·”
마치 하루 있었던 일중 인상깊은 것을 자랑하는 어린 아이같다· 본래 호들갑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기꺼이 응해주었다·
물론 한 마디는 덧붙였다·
“너무 호들갑을 떨지는 마라·”
“알았어 알았어· 근데 이 사람 쓰다가 졸았나봐· 아니면 손목이 너무 아팠나? 이부분에 오탈자가 있거든· 이런 게 은근 소소한 재미가 있네·”
“재밌나·”
“재밌지! 개정본에는 이런 게 없잖아·”
베키가 신난 채로 조잘조잘 말을 이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오탈자가 있을 줄이야· 187번 보좌관이 생각만큼 일처리를 해내지 못한 것 같아서 답답한 기분이 치밀었다·
“와···· 근데 마법 학부가 보관을 엄청 잘해놨다 싶어· 고서인데 고서같지가 않아· 어라?”
나는 결국 베키가 읽고있던 책을 낚아챘다· 상태가 어떤지 한 줄 한 줄 유심히 읽어내린다·
고서같지 않은 게 아니라 실제로 고서가 아니긴 했다· 문제는 그 티가 상당히 보인다는 것· 방금 써내린 기색이 적어도 내 눈에는 역력했다·
‘187번 보좌관····’
아득히 많은 양이었고 또 촉박한 시간이었기에 심정 자체는 이해가 간다만 그게 꾸짖음을 미룰 사유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재회하게 된다면 교육이 필요할 듯 하다· 그리고 그때 루이스도 중얼거렸다·
“어라···?”
루이스의 목소리에 의문이 워낙 크게 담겨있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여든 대표들의 얼굴 위로도 의문이 번졌다· 루이스가 펼친 「섬광」의 어느 한 페이지에 데칼코마니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베키가 몇 번정도 눈을 깜빡였다·
“이거···· 이거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예쁘게 데칼코마니처럼 찍힌 수준이 아니었다· 붙어있는 페이지를 벌리자 검은 잉크가 거미줄처럼 주욱 늘어질 정도였으니까·
“아~!”
그때 마이에브가 과장된 목소리로 감탄을 토했다·
“무단침입자때문에 새로 점검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못알아볼 정도로 오래된 서적들은 새로 써주셨나보다· 배려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아? 그런건가?”
베키가 눈을 반짝였지만 트릭시는 아니었다·
“못알아볼 정도면 새로 쓰는 건 어떻게 해·”
“그건····”
허를 찔린 마이에브가 말꼬리를 흐렸다·
“일부를 복원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흥·”
하지만 다행히 다들 ‘아카데미 측에서 새로 했다’는 전제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긴 혈귀가 내용 전체를 수정했다는 걸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한편 나는 서재의 아주 위편에 꽂혀있는 단 한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도록 미세한 결계가 쳐져있는 한 권이었다·
나는 그것을 염동으로 집어내렸다· 표지부터 내용까지 전부 반투명 필름으로 되어있는 서적이었다·
“엥? 플란 그건 뭐야?”
베키가 먼저 물었다· 이내 다른 대표들도 옹기종기 모여든다·
“그러네· 처음 보는 책이다·”
“···아무 내용도 없는데 책은 맞아?”
대표들이 먹이를 기다리는 참새처럼 얼굴들을 붙이고 그것을 살폈다· 한편 나는 187번 보좌관을 향한 분노가 꽤 누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왜 오탈자가 많았는지 왜 서적들에 크게 신경쓰지 못했는지 제법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만드느라 그랬군·’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보좌관은 정말 훌륭한 것을 만들어냈다· 나는 대표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 섬광을 잠시 빌리지·”
“응? 아아·”
루이스가 관심을 보였던 「섬광」위로 보좌관의 서적을 덮어씌웠다· 그리고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커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이건!”
페이지 위로 반투명한 필름이 덧씌워지자 수식이나 글로써진 설명 등이 그림의 형태로 바뀌어 보여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입을 떡 벌린 채였다·
“그림으로 보여주네?”
“와···· 뭔데? 이게 뭔데? 어떻게 되는건데?”
“이러면 이해하기가 너무 좋은데?”
보좌관이 일전에 인간들이 불을 보고 신기해하는 벽화를 보여주었던가 그 모습이 지금 이곳에서 완벽히 재현되고 있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그림번역기’라 불리며 이미 있었던 것인데···· 이 세계에서는 보좌관이 고대 룬어의 힘을 빌려 이제야 완성한 모양이다·
“이건 혁신이다···· 혁신···!”
베키가 눈을 반짝였다·
“이럼 더이상 논문같은 걸 요약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니야? 그냥 이렇게 스윽 대서 그림으로 보고 이해하면 끝이잖아!”
“요약하는 행위 자체가 학습에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꾸준히 시킬 생각이야·”
“아·”
베키의 얼굴 위로 희노애락이 빠르게 스쳤다·
트릭시도 흔치 않게 눈을 반짝인다·
“좋긴 하네· 이게 있으면 고서관을 빠르게 한 번 훑어보는 게 가능해지겠어·”
“아하하 그러게· 우선 그럼 쭉 둘러볼까?”
루이스가 동의했다·
“바로 출발하자·”
점심시간 무렵이었지만 누구도 내색하지 않는다· 고서관 내부를 살피는 데에 전념할 뿐· 애초에 배고픔조차도 잊어버린 듯 했다·
플란은 잠시 서재에 몸을 기대었다·
“···와 옛날 소환수들은 이렇게 생겼구나!”
“그림으로 보니까 생각했던 거랑은 또 다르네· 덩치가 크다길래 맹수를 닮았을 줄 알았거든·”
“귀엽게 생겨서 어이없어·”
다들 기념일에 쌓여있는 선물 상자들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바쁘게 서재를 돌아다닌다·
“저쪽도 볼까?”
“우리 밥은?”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듣기 좋은 소리를 선율이라 칭한다면·
고서관에서는 비로소 플란이 기다리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록 대표들만이 이런 선율을 내고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마법사들이 이리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쉬잇·”
트릭시가 자신의 입술 위로 검지를 얹었다· 모든 소리가 아주 조용하게 잦아든다·
루이스와 베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숨소리조차도 감히 내는 법이 없었다·
마법 학부 대표들을 이끄는 인물·
반드시 또 한 번의 혁신을 가져올 사내·
플란 그가 서재에 기댄채로 잠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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