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9
대부분이 잠을 청할 야심한 시각· 하늘에 달이 보란듯이 걸려있었지만 나는 도리어 개운함을 느꼈다·
“거의 처음이군·”
졸아본다는 행위가 이 세계에 온 이래 처음이었다·
날 고깝게 생각하는 기사 가문의 태생을 강제로 받게되었고 심지어 그 상태로 아카데미에 재학하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이제는 잠시 졸아도 되는 환경이 갖추어지기는 했다· 마법 학부가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마법사들도 이전보다는 의욕을 가지게 되었으니 분명 그렇다만····
···역시 졸았다는 행위 자체가 썩 반갑지는 않았다· 여유가 조금 생겼으니 이제 본인을 혹독한 수련으로 몰아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스로의 전력이 곧 마법계의 전력이 된다· 이러한 전제를 잊어본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제법 충분하다· 지식에 굶주려있던 대표들에게 고서라는 먹거리를 잔뜩 던져주었으니 말이다·
나는 차를 한 모금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개인 수련에 매진하는 것으로····”
똑똑─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레 방 문을 노크했다·
문 밖으로부터 느껴지는 살기는 조금도 없었기에 나는 염동으로 천천히 문을 열어주었다·
“아 플란·”
모습이 드러난 것은 암청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여인· 동시에 검은 동공 위로는 황금빛 달이 둥둥 떠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둘째 황녀 다름아닌 오로라였다·
“····”
하지만 나는 오로라의 인사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굴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모습이 이전과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품이 넓고 새하얀 로브를 입고있는 모습· 황녀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직자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오로라가 기숙사 내부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자신의 복장에 나의 시선이 머물러있음을 확인한 뒤 짐짓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녀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나는 이제 황녀가 아니지 않느냐· 병상을 벗어난 이후 황실의 의복은 자연스레 입지 않게 되었다·”
물론 달라진 것은 복장만이 아니었다· 표정의 오만함이 씻은 듯이 지워져 유순해졌기에 얼굴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짧게 한 마디만 했다·
“지금이 더 보기 좋으십니다·”
“보기 좋다라···· 고맙구나· 너에게 들을 수 있어서·”
오로라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이 고맙다는 말을 우리가 재회하게 된다면 반드시 하고싶었다· 내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것을 찾아볼 고민을 한 것이 소소한 행복을 찾아나선 것이 전부 플란 네 덕분이니까·”
“잘 된 일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여명 나비를 잡은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 에는 이미 많은 것을 느꼈다는 듯한 기색이 가득했으니 이런 순간에는 딱히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라는 한동안 감상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이 제법 길게 이어지다가 그녀가 어느순간 다시 입을 열었다·
“플란 그러고보니 확인하였느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번에 황실에서 영웅을 가리겠다는 것 말이다·”
“확인했습니다·”
오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자리에서 물러나며 내가 유일하게 추진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유시아의 정권은 공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나는 그 이유가 듣지 않아도 예상되었다·
“저를 위해서입니까·”
“그래·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네가 반드시 활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아주 작은 속죄이자 고마움의 표시야·”
오로라는 이내 망설이는 음색으로 덧붙였다·
“아 물론 자리가 자리이긴하다· 네 참여가 여의치 않다면 내가 어떻게든 다시 가서 사소한 수정을····”
“그럴 필요없습니다· 제가 반드시 우승할 테니까·”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경악을 불러일으킬 답변이었을지도 모르나 오로라는 오히려 안도했다는 듯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대답해줄 것 같았다·”
그녀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이런 확신이 곧 너의 정체성이지 해낸 것이 있으니 그 답변을 의심할 수는 없고· 믿을 수밖에·”
“그렇습니까·”
“그래···· 우리의 내기도 되돌아보면 참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해내지 않았더냐·”
나도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내기 이후 우리가 마주하지 못했던 기간동안 오로라는 정말 많은 것을 되짚으며 반성했던 모양이다·
손에 쥐어진 찻잔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것의 향이 기숙사 방 내부에 전부 퍼졌을 무렵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볼일은 이걸로 끝입니까·”
“아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진정한 본론이라는 듯 오로라가 몇 번 정도 목을 가다듬었다·
“안부 인사도 중요하지만 그게 당연히 끝은 아니지· 어차피 곧 알려지게 될 일이지만 미리 말하고싶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보겠다는 의미였다·
“아직 어떤 자리에도 초대받은 적이 없지? 이번 일에 참여하는 이들끼리 모임을 가지는 모양인데 말이다·”
“없습니다·”
“그게 문제로구나· 그게 문제야·”
“다만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오로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너를 제외한 참여자 전원 기사들끼리만 모여서 모임을 갖는다니까·”
나는 거듭 강조하는 오로라의 어투를 듣고도 어떠한 위기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태연한 내가 어이없는 듯 했지만 나는 조급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말했다·
“기사들이 모여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오직 경기의 승패일 뿐이니까·”
“그건 맞지만 말이다·”
“이토록 격하게 말씀을 하시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터· 말씀해주신다면 듣겠습니다·”
“경기의 세부 사항 대부분이 그 모임에서 정해진다· 그래서 나는 중요하다 강조하는 것이야·”
“세부사항?”
세부사항이라 황실로부터 내려왔던 공문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았던 내용이다· 조금의 흥미조차 느끼지 못하던 내 마음에도 드디어 작은 관심이 생겼다·
오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경기의 세부사항· 말이 세부사항이지 무려 세 가지나 되기에 승패에 미치는 영향이 많이 크다·”
그녀가 자신의 팔보다도 훨씬 길이가 긴 로브 소매를 걷어올린다· 새하얀 손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인다·
“영웅이라는 것은 말이야· 모든 부분에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야 비로소 그리 불릴 자격이 있지·”
“동의합니다·”
“따라서 영웅을 가리기 위한 승부는 평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승부를 하는 사람들이 직접 무려 세 가지의 세부 조건을 합의하게되지·”
“세가지라····”
“나는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할 것이야·”
말을 길게 이어가는 오로라의 목이 제법 탈 것 같다· 나는 집무책상 위에 추가로 놓여있던 찻잔 하나를 오로라에게 건넸다·
원래라면 마이에브가 마실 것이었지만 그녀는 대표들과 공동 학습이 있다며 고서관으로 떠났다·
“아 고맙다·”
오로라가 차를 한 모금 했다·
황실에서 생활했던 시절의 습관이 깔끔하게 털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 동작이 많이 고풍스러웠다·
“첫 번째로 결투 장소를 지정한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어디든지 지목할 수 있어 의미가 깊은 장소여도 되고 전투에 유리한 지형이어도 된다·”
“두 번째는?”
“결투 시간을 정할 수 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로라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떤 무기로 결투할지를 정할 수 있다·”
장소 시간 무기·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사전에 정한다는 결론이었다· 두 가지 부분은 곧바로 납득이 되었지만 마지막 하나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기사들마다 다루는 검이 다를 텐데 무기?”
“검성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고작 한 자루를 연마한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의미죠·
“····”
플란은 잠시 턱을 붙잡고 고민했다·
“꽤 건방지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점이? 아···· 너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 번째 조건 말입니다·”
“세 번째 조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검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마법사는 딱히 완드나 스태프같은 무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마나를 갈무리하여 정제하는 것이 마법이고 고작 그 뿐인 일이기에 무기는 필요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사가 무기에 크게 구애받는 경우도 존재하긴 한다만···· 그건 대개 흑마법사의 경우가 그렇다·
“마법사는 무기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세 번째 조건에서 굉장히 유리합니다·”
“듣고보니 그렇구나·”
“이토록 터무니없는 조건이 유지되었다는건····”
오로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마법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구나·”
나는 곧바로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로라가 눈을 깜빡인다·
“···어디가느냐?”
“바로 출발합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망설여서도 안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건강이 악화되어 연재가 늦었습니다···!
공지로 따로 작성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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