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여자들의 세계는 진짜 잔인하네~ 그렇지 않냐 루이스?”
마틴이 루이스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떨어져있는 자리로 이는 전적으로 조용히 관람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루이스의 뜻 때문이었다·
둘은 방금 있었던 베키와 헤일리의 모의 전투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는중이었다·
“여자들의 세계?”
“그래 여자들의 세계· 넌 어차피 잘생겼으니까 관심도 없다 이거냐?”
쯧 혀를 차면서 마틴이 말을 잇는다·
“플란 알지? 요새 말 많잖아·”
“플란···· 알지·”
루이스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수가 없다· 요즘 A등급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플란이었으니까·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소문도 있고 스크롤을 안 쓰겠다고 하지를 않나 아리아와는 자퇴를 건 내기도 할 뻔 했었고···· 화제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걔가 헤일리한테 고백했었는데 지금은 베키랑만 다니잖냐· 그러니까 헤일리가 바로 저렇게 패놓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어?”
“기싸움하는거지· 네가 지금 같이 다니는 여자는 이렇게 한심하다· 이런식으로 확인사살도 해주는거고·”
루이스는 베키와 헤일리를 바라보았다·
베키를 부축해 일으켜주는 헤일리·
그에게는 저 풍경이 모의 전투 후 승자가 패자를 챙겨주는 훈훈한 풍경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시 잘 모르겠는데·”
“둔한 놈· 넌 진짜 여자를 멀리해라·”
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갑자기 슬그머니 웃으면서 루이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루이스· 근데 헤일리 쟤는 너 좋아하지 않냐?”
“그냥 친구사이야·”
“친구는 무슨···· 내가 보기엔 아닌데· 어 다음거 시작한다·”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튕기자 개구리가 명함을 툭 뱉는다· 호명이 이어진다·
“아리아 폰타인·”
아리아가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다· 바이올렛이 입술을 떼었다·
“지목할거면 하고· 없으면 추첨하고요·”
“플란으로 해주세요·”
아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플란을 지목했다· 바이올렛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켜보던 마틴이 흥분해서 외쳤다·
“역시는 역시네! 이건 이거대로 재밌지!”
“어떤 점이 재밌다는거야·”
마틴이 신나서 대답했다·
“플란 쟤 완전히 두들겨 맞을거 아니야· 부정행위자가 밑천 보여주는 것만큼 재밌는게 또 있겠냐?”
“···너는 말을 좀 순화해· 아직 확실한 건 모르잖아·”
“이 정도면 이미 확실하지· 그리고 이것도 많이 순화한거다?”
바이올렛이 다시 한 번 관중석과 경기장의 경계면에 결계를 세웠다· 혹시라도 격렬한 마법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흠·”
한편 마틴의 이야기를 들은 루이스는 고뇌한다·
‘밑천이라·’
마틴이 이야기한 플란의 밑천이 루이스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당당한 태도로 보여주는 기백도 그렇고 아리아의 입술을 다물게 했던 염동도 그렇다·
‘평민이 그럴 수가 있나?’
그에게는 근심이나 걱정따위가 결여된 듯 보였다·
평민이라면 의식해야할 신분을 향한 눈치가 이렇게 행동하면 불리하겠다하는 걱정과 우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플란에게는 사실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루이스의 마음 밑바닥에서 추측 하나가 슬그머니 피어오른다·
“어 저기 들어온다· 보고있냐 루이스?”
“보고있어·”
루이스는 경기장으로 걸어들어오는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표정은 더없이 날카롭다· 그 비범한 외모에서 풍기는 위엄과 자기확신은 상당하다·
주변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영역으로 만드는 듯한 한 걸음· 한 걸음·
역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비루하고 마른 신체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지나칠정도로 평범해서····
“하아·”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눈꺼풀을 닫았다·
역시 그럴 리는 없으리라·
◈
바이올렛으로부터 건네받은 무작위로 추첨된 스크롤 세 개를 살폈다·
『 급속 빙결 』 『 지점 타격 』 『 덮치는 화염 』이 세가지가 내게 주어진 스크롤이다·
술식을 살펴보니 차례대로 원소계열의 빙결 마법 국소부위 타격 화염 원소를 머금은 파괴 계열 마법이었다·
웬만하면 셋 다 사용하고 싶지 않다만·
바이올렛이 하나 이상은 꼭 사용하기를 강조했다· 탐험때 안 쓰더라도 활용법 자체는 의무적으로 익혀야한다나·
“플란·”
장애물 하나 없는 경기장· 여러가지를 고민하는 사이 아리아 폰타인이 내 앞에 섰다·
“아카데미 그만두면 뭐하고 살지는 정해놨어?”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마나를 가다듬었다·
아리아가 어떤 스크롤들을 손에 넣었는지 아직 모르기에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또 대비한다·
바이올렛이 나와 아리아를 번갈아가며 한 번씩 살핀다·
“준비 됐으면 둘 다 경기장 끝으로 이동해요·”
우리는 경기장의 각 끝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꽤 되다보니 그녀가 손가락만하게 보였다·
바이올렛이 크게 말했다·
“셋 세면 시작하는거야· 하나·”
후우우 아리아 폰타인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둘·”
그녀는 허리춤에 걸쳐놓은 스크롤에 손을 얹었다· 나는 저게 무슨 스크롤일지 차분히 예측한다·
시작하자마자 발동할 셈으로 스크롤을 만지작 대는거라면 아마 소환이나 연성 계열로 예측된다·
“셋·”
바이올렛의 모습이 사라지고 아리아는 기세좋게 스크롤을 펼친다·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뒤덮는다·
쿠오오오ㅡ!
역시 소환 계열이었나 덩치가 다섯 배는 되어보이는 골렘이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체가 주는 위압감이 제법 훌륭하다·
아리아가 이번에는 골렘을 향해 스크롤을 던졌다· 화아악 골렘의 몸체에 불이 붙는다·
꺼지지않는 불꽃· 전에 메이벨이 잘못 활용해서 치료소까지 갔던 그 스크롤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면서 화염의 방향을 유도했다· 불꽃을 골렘의 몸체에 골고루 펴바른다·
그리고 그녀가 펼쳐내는 마지막 세 번째 스크롤·
그녀의 몸이 푸른 기운에 휘감긴다·
‘간섭 저항인가·’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저항력을 올려주는 마법으로 보였다·
여기까지가 정확히 3초· 신속하게 연계를 마친 아리아가 허공에 커다란 술식을 그려냈다·
그러자 경기장과 관중석 경계면의 결계가 서서히 검게 물들었다· 이내 관중석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아리아가 씨익 웃었다·
“누가 보면 곤란하잖아· 죽기 직전까지 패버릴건데·”
쿠오오오ㅡ!
동시에 화염을 두른 골렘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있다·
술자인 아리아는 간섭 저항의 보조를 받고 있다· 골렘쪽을 활용하는 것이 맞을 터·
주변으로 마나를 그물처럼 넓게 풀었다· 범위 안으로 뛰어들어온 골렘의 구조를 낱낱히 살핀다·
골렘의 기동 원리 신체 구조 등등을 파악하는 데에만 마나가 절반 이상 소모되었다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등가교환이었다·
나는 마나 그물을 한 번에 회수했다·
콰드드득 육안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골렘의 미세한 틈새로 마나가 간섭한다·
골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관성만은 여전했다· 그 거체는 여전히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해오는 채다·
움직여서 피해야할까· 아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파고드는 마나의 속력을 높인다·
서서히 서서히 골렘의 질주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질주는 달리기가 되었고 달리기는 이내 보행이 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멈추어 섰다·
쿠오오오ㅡ!
골렘의 지능은 높지 않다· 녀석은 자신의 움직임이 느려졌다는 사실이 그저 답답한지 포효했다·
“왜 그래? 계속 가!”
답답한 것은 아리아도 마찬가지였는지 똑같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골렘의 생명력을 보조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보조를 멈추는 순간 골렘이 쓰러지기 때문에 아리아는 사실상 묶여있는 신세나 다름없었다·
마나를 밀어넣고 염동으로 골렘의 등을 툭 툭 쳐서 떠미는 것이 전부다·
“얘가 왜 이래! 마나가 부족해서 그래?”
아리아는 골렘에게 자신의 마나를 더더욱 무식하게 밀어넣었다· 나의 간섭이 더 쉽게 만들어주는 꼴이다·
스크롤의 한계는 이렇듯 명확하다·
술자가 스크롤의 마법을 상위하는 수준을 보유하지 못하면 원인조차 살피지 못하고 역으로 마법에 잡아먹힐 뿐이다·
나는 골렘에게 충분히 스며든 내 마나들의 경로를 수정했다· 사방으로 파고든 마나들이 아리아를 주인으로 인식한 골렘의 회로를 찾아냈다·
그리고 찾아냈다면 다음으로 할 일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꾸역꾸역 코앞까지 걸어온 골렘이 주먹을 짓쳐든다·
쿠오오오오오ㅡ!
거대한 주먹이 하나의 운석처럼 떨어져 내린다·
그 거대한 주먹이 코앞까지 도달한 그 순간·
탁·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녀석은 행동을 정지했다·
“······?”
아리아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뭐해 뭐하는거야? 뭘 망설여 씨발!”
간섭을 인지하고 방어해낼 능력이 아리아에게는 없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댈 뿐이다·
기기긱ㅡ
“······?”
그 순간 타오르는 골렘이 아리아를 향해서 그 거체를 돌렸다·
허벅지 어깨 발꿈치······ 골렘의 모든 부위에 철저하게 간섭했다· 거대한 소환수는 이제 나의 의지를 받들어 행동하는 인형에 불과하다·
골렘의 시선이 이제 아리아 폰타인을 향했다·
“······?”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주인이었던 아리아를 향해 골렘은 쏜살같이 쇄도한다·
쿵 쿵 쿵 거체의 다리가 지면을 밟을 때마다 암석이 허공으로 튀어오른다· 아리아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왜 왜이래· 오지마· 오지말라고!”
자신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골렘을 부리기 위해 아리아는 전력을 다해 마나를 밀어넣었다·
부질없다· 그녀와 나의 마나는 밀도부터가 다르니·
쿵 쿵 쿵 여전히 골렘은 아리아를 향해 망설임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히익···!”
아리아는 결국 골렘의 조종을 포기했다· 발등에 불이 붙은 듯 요란한 행색으로 경기장의 구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는 바이올렛과 레너드의 시선을 느꼈다·
‘하나 이상은 꼭 활용하라고 했던가·’
규칙은 규칙이지· 스크롤을 펼쳐서 덮치는 화염을 발동했다·
허나 아리아가 아닌 지면을 향해서였다·
화악ㅡ!
지면 위로 화염이 불타오르며 아리아가 행동할 수 있는 구역을 제한했다· 그녀는 이제 넓은 공간으로 뛰쳐나올 수 없다·
“으··· 읏!”
구석으로 몰리는 것만이 아리아의 선택지였다· 아리아가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쿵 골렘이 아리아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아리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소환물을 올려다본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주변을 뒤덮는다·
그녀의 다리는 지진이라도 난 듯 후들거리는 중이다· 반면 나는 태연자약하게 골렘을 향해서 걷는다·
결계 표면을 검게 물들인 아리아의 마법을 살핀다· 핵심부위를 찾아『 지점 타격 』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콱 소리를 내며 화살처럼 틀어박힌 마법은 그 검은 장막에 하얀 균열을 일으킨다·
점에 불과햇던 균열은 이내 거미줄이 생겨나듯 갈라진다· 머지않아 아리아의 모습을 온 관중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골렘의 옆에 섰다·
아리아가 나와 골렘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뭐···· 뭐야· 뭔데·”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아리아를 향해 나지막히 되물었다·
“보면 모르나·”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