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3
들떠있는 분위기· 발 디딜틈 없는 정원·
대표들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특히 베키는 신기하다는 듯 옆머리를 긁적였다·
“···저번이랑은 느낌이 너무 다른데?”
“아하하 그러게· 황궁의 정원에 방문하는 건 나름 두 번째인데···· 저번에 방문했을 때랑은 너무나도 다르네· 사실상 첫 방문이라고 생각해야겠어·”
황궁의 정원은 공존하는 사계절을 품고 있으며 또한 모습을 바꾸는 것이 자유자재로 가능하다· 대표들이 처음 방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트릭시가 혀를 쯧 찼다·
“우린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로 온 거잖아· 이것저것 신기해하는 티 좀 내지마·”
“안 내려고 최선을 다한 게 이거란 말이야·”
“···그럼 어쩔 수 없고·”
베키의 대답에 트릭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로 이해했더라도 몸이 따르는건 별개지·’
베키는 어렸을 때부터 평민의 태생을 지녀 자라온 녀석이다· 귀빈들이 모이는 자리가 나름 익숙한 트릭시조차도 긴장되는데 본인은 얼마나 떨릴까·
베키가 나름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근데 나만 좀 엄숙한 분위기를 생각한 거야? 왜 정적 속에서 회의처럼 본론만 딱딱 끝내는····”
“그렇게 될 수가 없지·”
트릭시가 베키의 말을 툭 잘라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는 영웅이 되는거야· 인사를 한 번 해둬서 안면을 터두기만해도 장래에는 엄청난 이득이 된다고·”
“어···· 그건 그렇겠네·”
“그러니 다시 말해서 이곳에 있는 누구도 엄숙한 분위기를 바라지 않아· 사교회장의 분위기를 바라지·”
“아아·”
곁에서 듣던 다른 대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별로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법 학부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플란 덕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혜택을 누리는 상황인데 그게 영웅쯤되면 얼마나 거대한 이득이 되겠는가?
‘워낙 중요하니 공백기도 길었겠지·’
공백기를 줄이기 위해 영웅을 무턱대고 선발했더라면 영웅의 위치가 이토록 높아보이진 않았으리라·
마이에브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지어 오늘은 본 경기도 아니잖아요· 그냥 사전 모임이 있을 뿐인데···· 인파가 정말 엄청나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어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
베키가 음료수와 디저트를 손에 하나씩 집어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예법이랄 것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 식사법이었다·
그때 대표들의 얼굴이 한 곳을 향해 돌아갔다· 사람들을 바글바글 몰고 다니는 한 기사였다·
“와아····”
“수도 기사인가봐·”
베키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영웅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저런식으로 뒤를 쫓았다· 인사 한 번을 하기 위해서 말 한 마디를 붙이기 위해서 열심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법 학부를 향한 관심은 적었다·
가끔 시선이 향해오기도 했지만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들어보면 딱히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지?”
“딱 보니까 마법사잖아· 마법 학부겠지·”
“마법 학부? 아 플란!”
“플란을 따라온 모양이구만·”
긍정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플란에 관한 것인지라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대표들은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아야했다·
“플란을 제외하면 별 볼일 없겠지·”
“그건 뭐 당연한 소리 아닌가·”
“마법사들한테는 이런 날도 흔하지 않겠지· 이럴 때 많이 구경하라고 해·”
“하하하 그게 맞는 말이야·”
스쳐지나가는 구경꾼 입장에서는 수많은 가십거리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당사자인 대표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자신을 향한 이야기들을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베키가 먹던 디저트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렇게 듣고있는 것도 바보같고 그런데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자니 도망치는 것 같고····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 때·
“놓치지 말고 잘 들어주시지요·”
그녀의 어깨 위로 보드라운 손 하나가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법 학부의 총장 코네트가 생긋 웃고 있었다· 대표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고 시선이 모인 것을 확인한 뒤 총장이 말을 이었다·
“저 반응을 바꿔주시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또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고 또한 사실이었다·
주변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면 결과를 내밀어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고 반향을 일으켜 시선을 뒤바꾸는 것은 역시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이에브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냥 숙소에 있는 게 좋겠어요·”
다들 그 생각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누구랄 것 없이 한 걸음 두 걸음 숙소를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이 숙소에 닿기 전에· 아니 정원을 벗어나기도 전에 전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베키가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올라?”
“조금 달라·”
수도 기사 비올라·
눈 앞에 있는 소년은 비올라를 꼭 닮은 모양새였다· 흰 머리카락에 악보를 연상시키는 검은 가로선까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는 틀림 없었다·
서로를 대치하듯 마주보게 되었다·
우연이라기보단 어느 한 쪽에서 철저하게 의도한듯한 마주침이었다· 병풍처럼 거느린 병사들을 좌우로 쫙 펼친 뒤 소년이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아···· 마법 학부의 총장님? 오랜만입니다·”
“예·”
코네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고개를 으쓱였다·
“당사자인 비올라가 너무나도 바쁜 마당이라서 부득이하게 제가 온 점을 이해하십시오·”
“물론 이해합니다·”
베키가 트릭시의 옆구리를 툭 쳤다·
“트릭시 저게 누구야?”
“직함상으로는 호위 기사인데 기사 비올라의 수행비서쯤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겠네·”
“···고작 수행비서가 총장님한테 저런 태도라고?”
“저것도 많이 나아진 거야· 예전에는 수도 기사들의 수행비서가 직접 찾아오는 일조차도 없었으니까·”
참 많은 것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해도 역시 냉혹한 현실의 잔재가 있었다· 베키는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비올라의 호위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올라님께서는 플란님의 실력이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더불어 검을 맞대며 친교도 나누고 싶어하시고···· 마법 학부의 입장이 어떤지 묻고싶습니다만·”
“나쁠 것 없지요·”
베키가 또 한 번 트릭시의 옆구리를 툭툭 두드렸다·
“트릭시 이거 내가 이해한 게 맞아?”
“어떻게 이해했는데·”
“비올라님께서 친히 나서주시겠다니 한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승부에 응해라· 영광으로 알아라· 뭐 그런 거 아니야?”
“정확히 이해했네·”
“해도해도 너무하네····”
그러는 사이 코네트와 호위 기사의 대화가 이어졌다·
상대방이 꽤 고압적인 태도이다보니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대표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히려 그런 반응을 바랬다는 듯 상대방이 말했다·
“뭐···· 그럼 슬슬 장소 시간 무기를 정해볼까요? 굳이 미룰 것 없이 지금 당장 어떠십니까·”
“그러지·”
모두의 고개가 옆으로 회전했다·
이번 대답은 총장이 뱉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플란·
그의 대답이었다·
◈
노을이 질 무렵·
플란과 비올라의 호위 기사가 마주본 채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앉았다· 마법 학부의 인물들은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호위 기사가 플란에게 물었다·
“규칙은 모두 숙지하셨습니까?”
“그래·”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요·”
규칙은 단순했다·
플란에게는 포커를 하듯 카드들이 쥐어져있다· 각 카드에는 ‘새벽녘’ ‘평야’ ‘황혼’ 등 시간대 장소 무기 등이 다양하게 적혀있다·
플란은 그 중 세 개를 정해 내려놓으면 된다·
이는 모든 선택지를 양보해도 플란을 상대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비올라의 자신감이기도 했다·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하시다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차와 디저트를 내어오도록 하죠· 날씨도 좋네·”
“사양하지·”
플란이 카드 세 개를 연달아 내려놓았다·
[ 황혼 ]
[ 절벽 ]
[ ]
호위 기사는 그것들을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대는 황혼 장소는 절벽 무기는 검···· 이걸로 괜찮으신 겁니까? 수정하실 기회를 한 번 드립니다·”
“그것 또한 사양하지·”
플란이 또 한 장 내려놓는다·
[ 새벽녘 ]
“···?”
호위 기사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여전히 플란은 내려놓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 새벽녘 ]
[ 자정 ]
[ 대검 ]
[ 공원 ]
·
·
결국 플란은 모든 카드를 내려놓았다·
“역시 상대방을 몰라서 정해주질 못하겠군·”
“그게 무슨····”
“직접 정하라고 해라·”
플란이 호위 기사를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편한대로 고르라고 해·”
호위기사가 말 없이 두 눈을 깜빡였다·
플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고 마법 학부의 대표들이 한 박자 늦게 그 뒤를 졸졸 따른다·
“어? 프 플란!”
“플란!”
숱한 부름에도 그는 멈춰서는 법이 없었다·
이제 또 한 번 증명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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