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5
황궁의 정원·
모습을 뒤바꾼 정원은 오늘 대전(大殿)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단 한 명을 위한 상석을 중심으로하여 쭉 뻗어있었고 상석은 당연히 셋 째 황녀의 것이었다·
실루엣만 보이는 막이 황녀의 모습을 가린 채였다·
그 고귀한 실루엣이 기품있게 움직인다· 황녀는 주변의 모든 인물들을 하나하나 빙 둘러본 후 말했다·
“영웅을 가리는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았을 그대들에게 저는 칭찬을 조금이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황녀가 먼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실 다른 이들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은 황녀의 얼굴 뿐만이 아니었다· 청아하고 멀리 퍼지는 목소리에도 나름의 변조 마법이 입혀진듯 보였다·
그 목소리에 각각의 영웅 후보자들을 비롯한 다른 관계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모여있는 인원이 원체 많았기에 가장 뒤편에 위치한 마법 학부의 대표들은 잡담을 나눌 여건이 되었다·
베키가 트릭시에게 말했다·
“트릭시 황녀님이 바뀌었다던 소문이 진짜였네·”
“그런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잖아·”
“이전의 황녀님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네· 그땐 너무 무서워서 숨쉬는 것조차도 눈치를 봤었는데···· 이번 황녀님은 되게 인자하신 느낌이야· 그렇지?”
“우선 조용히 해· 이러다 혼나겠어·”
트릭시가 주변을 살피며 베키에게 눈치를 주었다· 베키도 이내 수긍하고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한편 황녀의 근처에서는 각 수도 기사들이 기사로서의 예를 다한다· 자신의 왼손을 오른쪽 어깨 위로 올리는 그러한 동작 말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올라였다·
천천히 떠지는 영롱한 눈동자 위에는 오묘하게 일렁이는 높은 음자리표가 박혀있었다·
“굳이 영웅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었더라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무려 황궁에서 부른 것인데 무엇이든 내려놓고 참석하는 것이 응당 옳은 자세 아니겠습니까?”
“비올라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실루엣을 통해 보였다·
“본 황궁에서 영웅의 공백기를 없애고자 마음 먹은 계기란 단순합니다· 기사와 마법사의 대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너무나도 큰 손실 아니겠습니까·”
기사 마법사· 그리고 대립이라는 단어에 다들 표정이 어색해졌다· 검마태제가 진행되지 않는 기간인지라 서로간에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으나 무언가 화해가 이루어졌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황녀의 말이 이어진다·
“빛의 가치가 어두울수록 큰 법이듯 화합의 필요성이 증대된 작금입니다· 서로가 규합되어야만하는 판국에 오히려 대립하게 된다면 그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영웅을 지금 가려내는 것은 나름대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오늘과 같은 장(場)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느 한 쪽이 부러져야만 끝이 났을 터·
셋째 황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이번 자리를 통해 영웅을 확실하게 가리고자 합니다· 마법사와 기사들 사이에도 유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곳에 모인 한 분 한 분의 책임이 너무나도 중요한 겁니다·”
마법이 덧입혀졌더라도 기품있는 억양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베일에 가려져 실루엣만 겨우 보이는 몸동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 누구도 혈통의 고귀함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황녀님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목소리· 모두의 고개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돌아간다· 많고 많은 인파중에서도 가장 뒤편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플란·
그였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뒤 목을 길게 빼고서 황녀를 가려둔 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고까운 눈으로 플란을 바라보았는데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황녀가 흔쾌히 수락했다·
“듣겠습니다· 질문도 의견도 최대한 많이 들은 뒤 취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들 황녀와 플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황녀에게 질문을 대놓고 하겠다는 플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건 어찌보면 대단한 것이었고 또 무엇을 질문할지 알 수 없었기에 우선 지켜보았다·
“단순히 화합만을 위해서 이 자리가 마련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플란의 말에 지켜보던 누군가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무엄한 말인가! 지금 황녀님께서 다른 속내라도 품고있다는 말이야!”
“속내라····”
플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누구나 생각을 전부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게 듣고싶었을 뿐이니 네가 멋대로 몰아갈 것이 아니야·”
“····”
플란의 시선을 마주한 이가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그 뒤로 직접적으로 플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으나 어딘가 탐탁치 못한 시선은 계속되었다· 황녀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속내를 숨길 의도는 없었습니다· 어느 시점이 적절할지를 고민했지만···· 알겠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지금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죠·”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했다·
“대수림에 있는 세계수· 생명의 원천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 나무의 가지가 오염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아마 사실인 것 같더군요·”
“세계수···?”
“오염?”
예상할 수 없었던 사실이었기에 모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갑작스레 질문한 플란의 태도를 고깝게 여겼던 인물들조차도 이내 앞다투어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제법 있는 이가 물었다·
“황녀님 그것이 정녕 사실입니까?”
“혈귀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모양입니다· 나뭇가지가 오염된 것은 확인되었다고 하니까요·”
“음····”
황녀는 나름대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다들 아시다시피 엘프의 권역에 혈귀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좌시할 수가 없습니다· 놔두었다가는 결국 대륙의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요·”
“황녀님 혈귀가 아닌 다른 것이 원인인 가능성은 없습니까? 왜 아주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잖습니까· 엘프들이 새로운 마법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저 또한 그러한 일을 바랐지만 아니었습니다· 왜곡된 고대 룬어의 힘이 관측되었다고 합니다· 혈귀들의 흔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죠·”
플란은 가만히 고민했다·
‘대수림이라·’
이 세계에서 대수림은 엘프들의 본거지로 알려져있지만 그 요소 하나만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그들 특유의 오랜 시간이 깃든 마법들이 잠들어있는 것으로도 위명이 굉장히 높은 것이다·
‘엘프도 결국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이지·’
나아가서 그들과 규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
또한 문제를 일으킨 고대 룬어는 아직 공허의 보좌관이 손에 넣지 못한 글자일 것이다· 쉽게 말해 혈귀 공주가 직접 다룬다는 그 글자일 터·
그러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은 이 일에 개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입지로 개입해서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관건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웅의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했다·
황녀가 말을 이어간다·
“정화의 상징이라 알려진 세계수가 오염될 정도면···· 후폭풍이 얼마나 거대해질지는 뻔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견이 없습니다·”
몇몇 기사들이 동의하며 내뱉었다·
“대수림 전체가 혈귀들의 본거지로 쓰이겠죠· 정화의 상징은 멸망의 상징으로 변모할 것이며 세상에는 재앙이 강림할 것입니다·”
다들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영웅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활약하는 영웅이 필요해진 시점입니다· 그러니 어느때보다도 엄중하게 영웅을 가려낼 것입니다·”
분위기가 한층 엄숙해졌다·
특히 수도 기사들 사이에서 감도는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대륙의 평화 숭고한 정의···· 듣기 좋은 이유들은 참으로 많았지만 신경쓸 것은 또 있었다·
영웅의 힘이 필요해졌다는 것은····
바꾸어말해 영웅의 힘이 그만큼 강력해졌다는 뜻·
기사들의 머릿속에 동일한 생각이 떠오른다·
‘영웅은 반드시 내가 된다·’
모두 아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으니 참여자들의 의욕을 불태우는 것이 황녀의 목적이라면 효과가 훌륭한 셈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영웅을 가려보겠습니다·”
“예!”
“마지막으로 거듭 강조드리지만 이 자리는 분쟁이 아닌 화합을 위한 것입니다· 그럼 이상·”
모두들 황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슴에는 다른 생각을 품은채였다·
‘이번에 영웅이 되는 이는 그간 존재했던 어떤 영웅보다도 커다란 영예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수도 기사들의 눈에 불꽃이 깃들었다·
딱 한 명 마법사 사내만이 지겨울만큼 태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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