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6
마이에브와 셀펜이 경기장에 마주보고 섰다·
셀펜이 빗으로 자기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플란이 아니네· 플란이랑 붙고싶다고 했을 텐데·”
마이에브도 셀펜의 그러한 발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히려 들었기에 이렇게 경기장 위로 올라올 결심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셀펜이 허리를 살짝 낮추더니 마이에브를 넌지시 약올리듯 올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심지어 좀 긴장한 것 같은데?”
마이에브는 도발을 노골적으로 해오는 셀펜을 움직임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감정에 동요가 전혀 없는 것 같은 무표정한 눈으로 대답했다·
“긴장하긴 했죠·”
“으음?”
이토록 쉽게 인정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셀펜이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잠시 후 분홍 머리의 수도 기사가 웃음을 터뜨린다·
“긴장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건 또 처음보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거야 그렇지· 솔직해서 좋네· 나도 직진 좋아해~”
셀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왜 굳이 앞으로 나선거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이건가? 아니면···· 뭐 플란을 보호하고 싶었나?”
“그런데·”
마이에브의 음색이 셀펜의 말을 툭 토막냈다·
“그쪽한테 질 것 같아서 긴장했다는 건 아닌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셀펜의 고유 능력이 ‘매혹’이라는 점· 그리고 플란을 대전 상대로 희망한다는 말· 마이에브는 그따위 것들이 신경쓰여서 경기장에 올라서게 되었으니까·
“···오?”
셀펜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면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실제로 마이에브의 눈동자에는 싸우겠다는 듯한 투지가 가득했는데 그것이 수도 기사의 흥미를 더더욱 자극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뭐 그럼 굳이 긴장할 이유라도?”
“힘조절이요·”
“····”
셀펜의 얼굴 위로 그려져있는 미소가 더 강해졌다· 그녀가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그 말은···· 그러니까 네가 수도 기사인 나보다 더 강해서 힘조절을 고민하고 있다· 뭐 그런 뜻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설마 맞아?”
마이에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비슷해요·”
마이에브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 눈동자는 인간의 것 같지가 않은 살기를 띄고 있었다·
단순히 승리를 쫓기만 하면 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현재의 마이에브에게는 한 가지의 제약이 더 붙어있었다·
‘혈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태생·
마이에브가 원했기 때문에 혈귀로 태어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러한 태생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절대 아니었다·
한때는 혈귀인 자신의 태생이 자랑스럽다 여겼다·
공허의 일원으로 태어나 대륙을 쥐락펴락하는 공주의 뜻을 이어가는 자신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쓸모있으며 원대한 목표로 움직인다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플란·
그와 함께 인간의로서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
“전 준비 됐어요·”
셀펜이 계속해서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건방진 구석이 있네· 알았어·”
수도 기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잘 빗어진 분홍빛 머리카락이 윤기있게 찰랑였다· 꼬리빗을 셀펜이 하늘 위로 휙 던졌다·
저 높이 튀어오른 꼬리빗에게 마이에브의 시선이 향한 순간·
쾅!
무언가가 섬전처럼 마이에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마어마한 기습이었다·
“!”
쿠웅─!
마이에브는 다급하게 손을 위로 휘저었다· 허공에 먹물같은 선이 세로로 그어지며 검을 튕겨낸다·
“흠····”
마이에브가 지면을 박차 뒤로 멀찍이 물러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빗을 던진 후 기습할 것이라는 것이 뻔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자면 전부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촤악─!
그때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뭐···!”
마이에브가 그어둔 화중세계의 선이 셀펜의 무딘 검 앞에서 보란듯이 반으로 끊어지고 만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촤악─!
이번에도 셀펜이 검을 가로로 긋자 마이에브가 수묵화처럼 그려낸 선이 끊어진다· 적어도 마이에브의 상식으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마이에브가 눈살을 찌푸리며 관찰에 집중했다·
그러자 새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끊어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가?’
자세히 보니 먹선이 단순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비키고 있잖아·’
선이 빠른 속도로 흩날려 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먹선이 자의를 가지고 셀펜의 검을 피해가는 듯한 움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셀펜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치챘어?”
쐐애애액!
말도 안 되게 빠른 셀펜의 검이 또 한 번 가로로 그어졌다· 마이에브는 허리가 꺾일 정도로 몸을 뒤로 꺾어 그것을 피해내는 것이 전부였다·
뒤로 굴러서 자세를 잡는 사이 셀펜의 말이 이어졌다·
“매혹이라는 건 사람한테만 통하는 게 아니거든·”
“····”
마이에브가 가쁜 호흡을 골랐고 셀펜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꼬리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네가 그어낸 선조차도 매혹의 영향을 받아· 나를 좋아하게 되면···· 어느 쪽을 주인으로 따르게 될 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이해하겠지?”
“터무니없는 능력이네·”
마이에브가 비릿한 입술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고유 능력이라는 것이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머릿속의 계산이 이래저래 복잡해진다·
‘이러면 마법은 의미가 없는데·’
마나는 자의를 가진 것처럼 흘러가는 정교한 힘이다· 셀펜의 매혹에 의해 그 통제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마법을 구사하든 마이에브에겐 독이 될 터였다·
‘흑마법은 또 불가능하고····’
공격을 상대방의 급소에 적중시키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은 전부 방어한다· 이론상으로는 이토록 쉬웠지만 도무지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벌써 포기한거야?”
셀펜이 검을 세로로 내리쳤다·
후웅!
경기장 위의 태양빛을 받은 검날이 밝게 빛난다· 은빛 실선이 적나라하게 궤적을 그리며 세로로 내리찍힌다· 어마어마한 내려치기였다·
하지만 마이에브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퍽!
빠르게 움직인 마이에브의 손바닥이 셀펜의 손목을 밀쳐냈다·
우득!
힘에서 밀려 마이에브의 손목에서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검격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뭐야· 체술로 승부를 보겠다는 거야? 마법사가?”
셀펜은 가소롭다는 듯 검격을 이어갔다·
마이에브는 대답 대신 계속해서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손목이나 어깨같은 관절을 잘 가격한다면 어쨌든 자신의 몸이 검에 토막나는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이 손목을 튕겨내려는 순간 난데없이 셀펜의 무릎이 복부에 작렬했다·
퍼억!
“컥!”
토할 것처럼 장기가 쏠리는 감각과 함께 마이에브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곧바로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긴했지만 이미 만신창이의 꼴이었다·
“퉤·”
마이에브가 기침하듯 핏덩어리를 뱉어냈다· 먼지투성이인데다가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셀펜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셀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버티네? 마법사가·”
하지만 이번에는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단해·”
셀펜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마법이 매혹으로 인해 무효화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마이에브는 마법 사용을 중단했다·
그리고 기초가 단단하게 다져진 체술로만 자신을 상대하려했다· 체술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에서 마법을 과감히 포기했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했다·
“플란이랑 싸우지 못한게 너무 아쉬웠는데····”
셀펜이 씨익 웃었다·
“···만족할게· 이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어·”
“건방진 소리는 그만둬요·”
“그 입은 어떻게 안 되는 모양인데· 뭐 기다려· 질질 끄는 식으로 약올리는 건 이제 하지 않을 테니까·”
동시에 셀펜의 기운이 더없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을 딛고있는 지면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파앗!
마침내 셀펜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마이에브가 화중세계를 그려냈듯 셀펜의 기다란 검이 허공에 궤적을 그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허공에 붙들려있다가 일시에 쏘아진다·
“마이에브!”
베키와 트릭시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소리쳤다·
관중들도 경악했다· 검 위로 자신의 기운을 바르는 것조차 놀라운 일인데 그것을 투사체처럼 쏘아낸다는 것은 이루말할 수 없이 고도의 경지였기 때문이다·
공간을 통째로 절삭해버릴 듯한 검기들이 일개 기사따위는 절대 흉내조차 못할 기예들이 무방비한 마이에브를 향해서 일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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