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
이른 아침부터 나는 훈련장이다·
아리아와의 전투는 애초에 질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만 앞으로 있을 일들이 그처럼 간단하지는 않겠지·
이어지는 탐험 과제에 대비하려면 꾸준한 훈련은 필수였다·
방금은 마나의 총량을 늘리기 위한 훈련을 했다·
방금은 중급 난이도를 마쳤다· 중요한건 해냈다는 점이다· 방법을 아니 성장이 느리지는 않으리라·
‘앞으로 조금이다·’
짧으면 이주일 길면 한 달· 그 정도 기간이면 고급 마법도 가용할 수 있는 육체가 되리다·
진정한 문제는 지금 따로 있었다·
덥다· 훈련보다는 이 더위가 더 거슬리고 싫다·
웃옷을 아예 벗어버렸다· 훈련장 입구에 사용중 표시가 떠있으니 멋대로 들어오는 학생은 없을 터·
그렇게 쉬던 와중 트리비아의 표지에 푸른 불이 들어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 생각없이 페이지를 펼쳤다·
[ ▷ 이런 것도 못푸나· ]
[ ▶ 가르쳐주세용· ㅠㅅㅠ ]
탐색에만 금화 10개를 사용한 그 고객이다·
가르쳐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만 우선 가격을 협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가격을 협상하기 위해서 고객에게 이 가르침이 얼마나 간절한지 파악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인간은 간절한 일에 더 많은 금액과 시간을 쏟는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 바쁘군· 나중에 다시 연락을 보내지· ]
활자를 입힌지 1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 ▶ 금화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용 ]
금화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라·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한다면 삼류일 것이다·
[ ▷ 금화가 급하진 않다만 말했듯 바쁘다· ]
[ ▶ 물품도 구해다 드릴게용· ]
[ ▶ 뭐든지 할게용 !ㅅ! ]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고객이다·
흡족한 시선으로 트리비아를 바라보며 나는 몇가지 요구사항을 적었다·
이 요구사항을 쫓아오는 것은 지금부터 고객의 몫이다·
[ ▷ 어느 부분까지 접근했는지 서술해보도록· ]
[ ▷ 어느 부분에서 막혔는지도 서술하도록· ]
[ ▷ 앞으로 8시간에 한 번씩은 내게 풀이 상황을 보고하도록· ]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쪽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어 반사적으로 트리비아를 덮었다·
“야 플란! 음료수좀 가져왔···· 어라·”
베키였다· 그녀가 바쁘게 손을 저었다·
“아 보려고 본 게 아니야· 정말로· 나 그냥 오늘 피드백해준거 고마워서 가져온건데···· 꼭 훔쳐보려고 한 것처럼 보이네· 상황이·”
이번 아침에는 어제 있었던 베키의 모의 전투 피드백을 해주었다·
모르는 마법이 있으면 물어봐도 되냐는 그녀의 부탁을 일전에 수락했었기에 어젯밤에 갑작스레 받은 부탁이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음 많이 더웠나보네·”
별안간 베키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내 눈을 마주보지를 못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나는 벗었던 웃옷을 다시 입었다·
다 입고나니 베키가 그제서야 다시 말을 붙였다·
“야 플란· 그런데···· 연락하는 사람이 너한테 관심 많나보다?”
“무슨 소리지·”
“아니 막·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너한테 뭐든지 다 해주겠다 그러고···· 해줄 수 있는게 많나보네· 귀족인가····”
왜 하필 보더라도 그런 내용만 봤을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무시했다· 이런건 상대하는게 시간낭비다·
“상관없다· 내가 저쪽에 관심 없으니·”
“아 그런거야?”
머리카락을 배배꼬던 베키의 동작이 멈추었다· 이대로 대화가 끝나는 듯 싶더니 베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플란 탐험 과제 준비는 잘 되어가?”
“하던대로지·”
“그럼 잘하겠네· 나는 걱정이 태산인데·”
에휴 베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뚫어갈 생각만 해도 어지러운데 심지어 경쟁 형식이라 다른 조 견제까지 해야하잖아· 돌아버리겠어·”
“하면 되지·”
“야! 다들 너처럼 대단한 줄 알아! 길 뚫는 와중에 다른 조 위치 파악하는게 쉽냐!”
베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이내 혼자서 풀이 죽는다·
“난 게다가 조원들이랑 인사 한 번 나눈게 고작이야· 이런 날에 호흡 맞춰봐야 하는데···· 서로 아무 말도 없어····”
그 울적한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평민 신분에 재능조차 천부적이지 못한 그녀에게는 모든 과정이 외롭고 또 괴로울 것이다· 성장통은 격통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위로는 내 천성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행위다· 그렇다보니 마땅히 그녀를 위해서 해줄만한 말이 없었다·
역시 마법을 가르쳐주는것이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연민이다·
“베키·”
“응?”
나는 턱으로 훈련장 가운데를 가리켰다·
“가서 서라·”
베키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왜? 피드백 끝났잖아· 나 전부 기억하는데?”
“서·”
“갑자기?”
의문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베키는 결국 그렇게 했다· 나는 짧게 지시했다·
“얼음 방벽을 다시 펼쳐보도록·”
“그 그래· 나 뭐 잘못했어?”
잠시동안 정신을 집중한 베키는 얼음 구체를 생성해낸 뒤 얇게 펼쳐서 넓은 직사각형 형태의 막을 만들어냈다·
어제에 비해 색이 맑고 투명해졌으며 마나가 촘촘하게 엮인 것을 보니 강도 또한 좋아졌다· 차이가 확연하다·
“마나 전부 소진될 때까지·”
“응? 전부 소진?”
“반복 시작·”
그러자 베키의 얼굴이 얼음처럼 새파래졌다·
◈
바이올렛은 아카데미의 집중치료실에 있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학생이 중태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에게는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강의에서 사건사고가 생긴 것은 교직원으로 활동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건데·’
바이올렛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플란과 아리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바이올렛은 궁금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리아는 극독 스크롤을 사용하려는 마음을 품었는가· 그러한 것들을 고민하던 와중·
“아리아?”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세련된 남성의 목소리가 바이올렛의 상념을 부수었다·
그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 침상에 누워있는 아리아 폰타인을 향한다·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아리아 학생 관계자분 되시나요?”
“예· 폰타인 가주님의 수행비서입니다·”
바이올렛은 고깔모자를 벗고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극독 스크롤을 뒤집어썼어요· 전신 마비 상태지만 빠르게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금방 괜찮아질 거에요·”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남자는 미소를 짓더니 아리아 쪽을 바라본다· 그러나 아리아쪽을 바라보는 그 표정이 묘하게 차갑다·
바이올렛이 위화감을 느낀것은 그때쯤이었다·
그에게는 바이올렛이 예상한 반응이 조금도 없다·
아리아 폰타인을 향한 걱정 아카데미를 향한 책임전가 분노···· 폰타인 가문 사람이라면 으레 느낄만한 감정의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아리아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겁니까?”
“본인 과실입니다· 아카데미 규정을 어겼고 사적으로 지참한 스크롤을 사용하다가 휘말렸어요·”
바이올렛은 예의를 지키면서도 차근차근 사실을 전해나갔다·
“사적인 스크롤 지참을 왜 사전에 눈치채지 못했는가· 스크롤 표면에 인식 저해 아티팩트가 붙어있었어요· 이것 역시 아카데미 규정 위반입니다·”
“아하· 그렇게 된겁니까·”
남자는 예의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서가 창문 너머의 아리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말을 바이올렛은 들어버렸다·
“······한심한 것·”
그는 분명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 오빠 반도 못닮는 한심한 것· 그냥 죽어버리지····”
그러나 그 중얼거림은 짧았다· 그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바이올렛을 향해 정중히 고개숙였다·
“폰타인에서 부담할 것이 있다면 서면으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징계가 필요하다면 내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돌아섰다·
남자가 유유히 떠나고 바이올렛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행비서에게 험담을 듣는 영애라니·
기분이 오묘했지만 가정사는 교수인 그녀가 멋대로 끼어들어 판단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내 자신의 집무실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정확하게 옮기지만 눈으로는 손에 들려있는 문서를 확인했다· 지금 살피는 것은 플란 학생의 정보였다·
사실 기구한 면으로 따지자면 이쪽이 더 기구해보인다·
신분은 평민 가족사항에는 불명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부모도 없다· 심지어 마법학부 등급은 F로 했고····
“······?”
바이올렛은 어느 순간 멈추어 섰다· 자신의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주황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로브 차림의 여자가 바이올렛쪽으로 엉덩이를 쭉 내밀고는 성적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염동으로 빗자루를 들어올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쳐버렸다·
짝!
“꺄핫?!”
바이올렛과 똑 닮은 주황빛깔 마녀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오른다·
고개를 돌려 바이올렛과 눈을 마주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언니이이이!”
“세피아· 내가 함부로 집무실 드나들지 말랬지· 분명 잠가뒀는데 또 어떻게 연거야?”
바이올렛이 한숨을 푹 내쉬자 세피아는 능글맞게 웃었다·
“마법학부 기자 일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일이라는게 어쩔 수 없잖아· 위에서 시키는 일이 있으면 해야지! 그리고 이거 합법이다?”
“기자부에 너보다 위가 어딨어·”
“유디트 가문에서 요구해온거랍니다~ 해주는 수밖에 없지·”
유디트 가문이라· 그 드높은 기사 가문의 위용을 바이올렛역시 익히 알고있었다·
그러나 왜 자신의 집무실을 찾았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기사 가문이잖아· 유디트 가문에서 마법학부 성적표를 왜 요구해?”
“일이 일이라 더 자세한건 말 못하고~ 아무튼 성적은 다 봤으니까 볼일 끝!”
세피아는 총총걸음으로 바이올렛의 지척까지 다가온다· 그리고 바이올렛이 살피는것을 본인도 흘끗 살핀다·
“어머 언니도 이 학생 알아? 관심있어?”
“알지· 얘 때문에 지금 머리아파·”
“응응· 되게 재밌는 학생이긴 하더라·”
“왜·”
“글쎄~ 왜일까~”
세피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다 바이올렛의 신경질적인 시선을 받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알았어 알았어· 다른 건 아직 말 못하고· 얘 노숙하는건 알아?”
“노숙?”
“응· 기숙사 짐만 풀 수 있고 입소는 안 되는 기간 있었잖아· 그동안 야외에서 노숙했더라· 되게 웃기지?”
세피아는 생글생글 웃었지만 바이올렛의 표정은 차게 식었다·
“넌 그런것도 조사해?”
“그게 일이니까·”
“······그리고 그게 웃긴 일이냐? 나가·”
“아 자 잠깐만· 살살해! 으갸악! 맞다! 그러고 보니 곧 마법학부에 엄청난 편입생이 올거야! 아 그 그만 때리라니까!”
“나가·”
염동으로 세피아를 집무실 밖으로 던져버린 후 바이올렛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노숙을 해가면서···· F등급 실력을 A까지 끌어올렸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스크롤이 싫다던 그의 발언은 바이올렛을 제법 즐겁게 해주었다· 바이올렛도 스크롤을 좋아하는 처지는 아니기에·
게다가 그녀가 육안으로 확인했던 아리아 폰타인과 플란의 모의 전투·
그 전투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플란은 A등급 학생에 제격인 기량을 보여주었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간섭 계열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이미 새내기들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뜻·
급속 빙결을 활용해 아리아 폰타인의 스크롤을 막아내는 반응 역시 훌륭했다·
덕분에 일이 커지지 않았다· 극독 스크롤이 제 효과를 원래대로 발휘했더라면 훈련장 내부의 모든 학생들이 집중치료실에 누워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흐음·”
그녀는 턱을 문지르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그의 신분과 가난함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아니 동정하는 것 자체가 안 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인정받을 노력은 인정받아야하고 보상받을만한 행동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라야하는 법이다·
바이올렛은 책상 밑 서랍으로 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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