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1
하루가 저물어가고 수도 기사들이 다시 모였다·
이전과 같은 인원들이 모였지만 분위기만큼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땅 아래로 움푹 꺼질 것 같은 침묵 속에서 한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으로 형편 없어····”
새하얀 수도 기사 비올라·
악보를 인간으로 빚어낸듯한 그녀는 숨기지 않고 불편하다는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패배한 셀펜과 클로트를 노려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 참 형편 없다고요· 뭐라도 반응을 보이세요·”
“····”
셀펜과 클로트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비올라에게 있어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비올라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검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최고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영웅의 자리에 올라서도 모자랄 판에 수도 기사의 명예가 매 경기마다 떨어지고 있으니····”
천상의 선율과도 같던 비올라의 목소리는 지금 심히 흐트러져 있었다· 음으로 치자면 불협화음·
“····”
패배자는 변명할 수 없는 법· 변명해서도 안 되는 법· 셀펜과 클로트는 잠자코 그 힐난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때·
“비올라님· 괜찮습니다· 비올라님께서는 어차피 영웅의 자리에 오르게 되실 테니까 다른 수도 기사들의 명예 정도는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을겁니다·”
어르고 달래려는 듯한 호위 기사의 말에 비올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뭐라고?”
비올라가 그 호위기사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영웅이 된다 하더라도 수도 기사의 명예는 늘 드높아야해· 높은 사람이 더 높은 칭호를 얻는 것· 늘 높은 길만을 걸어왔다는 것· 그게 내 길이라고·”
비올라가 살기와도 같은 기운을 뿜어내자 악보의 오선지 비슷한 것이 황금빛을 띈 채 아지랑의 형태로 피어오른다·
그러한 상황에서 입을 연 것은 셀펜이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있어· 비올라·”
“···?”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는다· 다시 묻는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비올라· 너 내 말 똑바로 들어·”
“못 들어서 다시 묻는 게 아닌데·”
“한 번 더 강조하겠다는 말이야· 중요한 이야기니까·”
셀펜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비올라 네가 결과만 보고받아서 뭘 모르는 모양인데···· 그 마법사들 절대로 평범한 수준이 아니야·”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는게 어느 정도인데?”
“이런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셀펜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참고로 그녀의 몰골은 아직도 만신창이였다·
“걔네 수도기사 수준이야·”
공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비올라는 방금 자신이 들은 사실이 정녕 사실일까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셀펜의 말에 공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경기를 직관했다면 못봤을 수가 없다· 마법 학부의 대표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이다·
셀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장소나 시간이 달랐다면 승패가 확실히 갈렸을지도 몰라· 그리고 무승부가 아니었다면 패배한 쪽은 분명 나였을 걸·”
“···이런·”
그러나 셀펜의 말에 비올라는 더더욱 분노한 듯 했다· 그녀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그따위 이야기를 지금 당당하게 하는 게 맞아?”
비올라의 눈에 새겨진 높은 음자리표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빛을 발했다·
비올라는 답답했다·
마법사들이 강해진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그러한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왜 수도 기사들은 경지를 더 높이지 못했는가·
어떻게든 동기부여하기 위한 점을 찾아 검을 휘두른다· 어느 경지에 올랐든 고개를 세워 높은 곳을 바라보며 목표해야하거늘 이들은 마법 학부의 모습을 보고 살짝 꺾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약해· 나약해· 어찌 이리도 나약할까·’
비올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예전과 다름없이 수도 기사의 직함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딴 소리를 내뱉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나약하게 느껴지는 비올라였다·
‘우리의 선대 수도 기사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고유 능력에 편승한 쓰레기들 같으니····’
바로 그때였다·
“비올라님 다음 경기가 곧 진행됩니다·”
비올라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새벽 마법 학부와의 다음 경기를 진행해야만했다·
“알아서 할게· 기다려·”
“예 비올라님·”
호위기사가 곧바로 돌아가려했지만 비올라가 그를 문득 한 번 붙잡았다·
“아 잠시만·”
“···!”
비올라가 불러세우자 호위기사가 급하게 멈추어선다·
“마법 학부 측에서는 누가 출전하지?”
“역시 플란이 아닙니다· 트릭시에요·”
비올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평범한 대표란 말이지·’
플란은 마지막으로 나올 심산인지 이번에도 출전하지 않는다· 다만 트릭시라면····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름 이름있는 가문 아닌가?”
“네 맞습니다· 프리츠 트릭시가 속한 가문의 이름입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유명해요·”
“그렇다는 건····”
마법 학부의 대표들 사이에서 이름이 유명하지 않은 학생들도 성과를 낸 판국이다· 트릭시가 그들보다 훌륭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일 터·
호위기사가 건넨 종이에는 트릭시에 관련된 자료들도 함께 섞여있었다· 비올라의 숙련된 눈동자가 그것을 아주 빠르게 읽어 내려간다·
“최근 가주의 자리를 승계받았고 아카데미 성적은 죄다 최상···· 다른 대표들과 달리 천재 소리를 수도 없이 많이 들었던 수재····”
그리 중얼거리는 비올라를 다른 수도 기사들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굳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소이다·”
그때 누군가가 검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삿갓을 쓰고 풀을 질겅이는 기사 기억을 베는 자 리브라였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플란은 비올라 그대가 직접 상대할 것 아니오? 그리고 지금은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야하는 상황이고 내가 출전하는 것이 응당 옳을 것 같소·”
“아니·”
하지만 삿갓 끈을 고쳐매는 리브라를 비올라가 단호하게 불러세웠다· 리브라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의뭉스럽다는 눈빛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비올라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트릭시·’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던 것은 천재·
천재라고 불리었던 이가 현재 플란의 일행으로 남아있다면 후에 훨씬 더 강할 것은 자명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엄청 강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리브라·’
기억을 베는 자 리브라·
그녀는 강하다· 그것에 있어서만큼은 비올라도 이견이 없다· 무려 기억을 베는 고유 능력을 지닌 데다가 검술 역시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 예측대로 된 것이 없었잖아·’
셀펜과 클로트의 패배라는 선례를 겪고나니 이제는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약 기억을 베는 자 리브라마저 패배하게 된다면?
사실상 비장의 카드마저 잃는 셈이 된다· 그러니까 비올라는 조금 다른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분 정도가 지난 후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라·”
“듣고있소이다·”
“미안하지만···· 넌 아직 순번이 아니야·”
“음?”
그 발언에 리브라는 제법 당황한듯 보였다· 삿갓을 살짝 들어올려서 비올라를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올라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린다· 리브라가 아니라 저 멀리 우두커니 서있던 리브라의 호위기사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저 호위기사가 나가는 편이 좋겠어·”
“경기장 위로 내 호위기사를 올리겠다는 말이오?”
“그래·”
리브라가 잠깐의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마법 학부를 너무 우습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오? 호위 기사의 수준으로는····”
“우습게 안 봤어· 오히려 그 반대야·”
“반대라고?”
“그래· 너희들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그렇다는 건····”
리브라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올라 그대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가 맞아·”
그러자 비올라의 눈을 마주보는 리브라의 눈길이 굉장히 매서워졌다·
“···내가 트릭시에게 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무조건 패배할 것 같은 호위기사를 내보내겠다는 것 아니오· 내 말이 맞소?”
“정확해· 이러는 편이 나아· 이렇게 된 김에 나머지 대표들은 전부 호위 기사들이 상대해줘야겠어·”
비올라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리고 플란을 내가 직접 상대할게· 이해했어?”
“말도 안 되는 짓 그만두시오·”
리브라가 곧장 항의하려했지만 비올라는 재빠르게 종이에 이름을 적어넣어 대진을 완성시켜버렸다·
리브라가 종이에 손을 뻗으려하자·
“말도 안 되는 건 너희야─!”
비올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녀의 목에 핏대가 뚜렷하게 선다·
“수도 기사가 패배해! 수도 기사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수도 기사가─!”
공간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숨을 헐떡인 뒤 비올라가 말했다·
“···닥치고 내 말대로 해· 더이상 어떤 수도 기사도 져서는 안 되니까 무조건 이렇게 하라고· 싹 다 죽여버리기 전에·”
플란·
비올라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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