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4
승리를 만끽하는 그 순간마저도 완벽했다·
굉장히 중요한 경기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트릭시의 상태는 경기 시작전과 비교했을때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무결한 모습이었다·
“···승리했네요·”
교수들 사이에 앉아있던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승리했어요·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그러나 바이올렛이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할때까지도 주변에서 입을 여는 인물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경기가 가져온 충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법 학부가 왜 짜릿함을 주었는가· 왜 지지를 받았는가·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사람들은 약자의 입장에 처한 마법 학부를 응원했다·
숱한 시간을 기사들에게 억눌렸었지만 보란듯이 반란을 일궈낸 마법 학부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보여진 승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트릭시는 엄연히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에 속한 호위 기사를 힘으로 찍어눌러버렸다·
“트릭시에 관한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그 실력과 성장세가 이 정도일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비서가 당황스럽다는듯 안경을 밀어올렸다· 바이올렛은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생각 못하는게 당연해요· 실제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트릭시의 실력은 호위 기사 정도가 아니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플란 플란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죠·”
그러한 술렁거림은 관중석으로도 번져갔다·
“이 정도면 마법 학부가 더 강한 거 아니야?”
“그건 상식적이지 않은 소리인데·”
“이제는 상식적인 소리지· 마법 학부가 전승을 거두었어· 아 한 번은 무승부니까 제외할까? 그렇다 치더라도 패배한 적이 없단 말이야!”
사람들의 인식이 어떨지는 몰라도 결과라는 것은 너무나도 냉정했고 또 솔직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기사가 거둔 승리가 없다시피했으니·
“게다가 이번 승부는 너무 압도적이었어·”
누군가가 툭 내뱉은 말·
반박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영웅이 될까 싶은 마음에 이곳까지 왔다· 마법 학부가 이만큼 선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지금 무참히 깨어진 상태였다·
경기장의 흐름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바뀌었다·
◈
“····”
악보를 인간으로 빚어낸듯한 수도 기사· 새하얀 비올라가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초에 호위 기사는 버리는 패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경기장에서 점점 마법 학부를 강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있자니 심사가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
호위 기사는 비올라의 눈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터덜터덜 대기실로 돌아갔다· 아까운 패배도 아니고 완패를 당했으니 수치심이 머리 끝까지 올라왔으리라·
“비올라·”
그 때 기억을 베는 자 리브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들어내고 싶었던 결과라는 게 겨우 이거요?”
리브라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융퉁성이 없다’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던 기사였다· 늘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도에는 다른 수도 기사와 상호간에 존중을 갖춘다는 내용도 있으나····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리브라를 화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사들의 명예를 신경쓰는 척 하더니 결국 스스로의 안위만 생각했던 것이로군· 처음부터 예상하고 막았어야했는데····”
비올라가 혀를 쯧 찼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소· 그 비올라가 다른 수도 기사 조차도 카드패 취급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리브라!”
비올라가 목청 높여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음악이란 건 말이야····”
리브라가 피하지 않고 비올라의 눈을 마주보자 비올라는 씹어뱉듯이 말을 이어갔다·
“1악장 2악장 3악장···· 순서대로 있는거야· 중요한 구간이 있으면 그냥 도입부를 위한 부분도 있을 수 있는 거야· 너희가 어떻게 그런 큰 그림을 알겠어?”
“그러니까 우린 도입부에 불과하다?”
“나도 너희를 도입부로 하고싶지는 않았어· 너희가 스스로 그런 처지를 만든 것 뿐이지·”
누가 패배하래? 와도 같은 말·
비올라의 의중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 리브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곳에 적어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기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사도 아니고 영웅 후보라는 자가·’
비올라는 원래 이러지 않았었다·
선율처럼 고운 기사· 마주하는 이들마다 비올라를 보면 감탄했었고 어느 순간 비올라의 검을 견식하게 된다면 마음마저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나 리브라는 지금 그런 감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버려진 악보를 펼쳐서 봐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름다운 선율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고 음표는 엉망진창에 종이는 엉터리로 구겨져있는 그런 추한 모습· 그것을 마주해버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리브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 있는 플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여유·’
그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리브라가 늘 꿈꾸었던 것은 자연의 품에서 자적하며 무위도식하는 것· 흡사 그것과도 비슷한 여유가 그에게는 있었다·
플란의 곁에서 마법 학부의 대표들이 뛸듯이 기뻐하며 트릭시를 맞이한다· 그들의 얼굴에 씌어져있는 미소가 티 없이 맑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저기···· 비올라님·”
그때 다른 호위기사 한 명이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비올라가 아주 신경질적으로 호위 기사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그 눈빛만으로도 호위 기사가 무릎을 꿇어야 할 정도지만 그는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야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법 학부에서는 벌써 대표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기사들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향했다· 몸보다 훨씬 큰 고깔모자가 인상적인 붉은 색의 소녀 베키가 경기장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저 소녀가 마법 학부의 대표중에서는 마지막이고 저 소녀 다음에는 드디어 플란이 올라옵니다· 문제는····”
호위 기사가 거기까지만 내뱉었지만 듣는 기사들은 왜인지 그의 다음 말이 무엇인지 벌써 알 것 같았다·
“···비올라님의 계획대로라면 이번에도 호위 기사가 올라가고 수도 기사가 플란을 상대해야하는데 남은 호위 기사가 없습니다·”
비올라가 아랫 입술을 짓씹었다·
이 흐름대로라면 또 한 명의 수도 기사가 패배를 겪을 위험이있다· 그때쯤에 기사들의 위상은 이미 땅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아니 지면에 놓이게 되는 수준이 아니다· 지면 어딘가로 꺼져버릴지도 모르겠다·
비올라가 빠르게 수도 기사들의 얼굴을 훝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
“어어···!”
“저 저거 뭐야?”
관중석의 수군거림이 산불처럼 번지더니 웅성거림이 되고 이내 다들 소리를 지르는 듯 소리가 커졌다·
비올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왜 이래?”
잠시의 소란일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더욱 경기장이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여기서 이렇게 가다니!”
“아예 끝장을 볼 생각이구만!”
그리고 비올라도 마침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베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경기장 밑으로 내려간다·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더 커졌지만 비올라는 그것을 인식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이가 경기장 위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경기장의 중앙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흩뿌리는 기품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출전했던 이들과 격을 달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
기사들은 문득 전율이라고 할만한 것을 느꼈다· 현재 전투중이 아닌데도 말이다·
“─!”
“─!”
사람들이 무언가를 입을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한 박자 뒤 그것이 사내의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플란!”
“플란이다!”
“플란!”
비올라는 문득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혈액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이 전장에서 결전의 순간이 왔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비올라가 곧바로 발걸음을 떼려는 그 순간·
“아니야·”
한 기사가 보다 빠르게 경기장으로 올라섰다·
“···!”
모두들 충격받은 얼굴로 기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스칼렛?”
그녀는 잔불의 기사 스칼렛이었다·
“스칼렛 네가?”
모두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경기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경기인데 플란과 스칼렛이 같은 가문이라는 것을 수도 기사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스칼렛은 웃었다·
“플란이랑은 매듭지을 이야기가 있어·”
매듭·
그건 감사인사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사과일 수도 있었다·
스칼렛은 한동안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딱 한 번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비올라·”
소리내어 비올라 한 명을 콕 집어 불렀지만 모두들 알고 있었다· 스칼렛이 이 순간 모든 기사들을 향해서 이야기 하고 있음을 말이다·
“우리 기사답게 가자· 기사답게· 명예롭게· 그렇게·”
기사 진영이 정적에 뒤덮였다·
스칼렛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기든 지든 그렇게 가자고· 알았지?”
모두들 멍하니 스칼렛의 등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기사도를 위해 가문마저 희생할 수 있는 그녀의 등을 보고 있노라니·
···기사들의 마음에서도 무언가가 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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