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5
잔불의 기사 스칼렛은 다소 오묘한 감상을 느꼈다·
검을 휘두르는 데에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많은 이들을 베어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가슴이 뛰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 그녀는 심지어 설레하고 있었다·
‘플란·’
관중들은 그녀의 사정을 모른다· 따라서 그저 평범하게 수도 기사와 플란의 승부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칼렛에게 있어 이 자리의 의미는 굉장히 달랐다· 한 번의 패배 이후 자신이 무엇에 정진하여 무엇을 일구어냈는가· 그것을 증명하는 자리였으니까·
“스칼렛이다·”
플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스칼렛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덕분에 스칼렛도 플란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넌 여전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치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 이상 다듬을 곳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데도 불구하고 플란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해져있었다·
태산처럼 거대하고 탑처럼 높다· 그는 그랬다·
마법 학부의 대표들 사이에서는 응원의 말조차 터져나오지 않았다·
응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적어도 그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플란이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뿐·
스칼렛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플란·”
그리고 상대방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과거에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플란의 행실 말이다·
플란은 스칼렛으로 인해 고유 능력을 잃었다· 바꾸어 말해 현재 눈앞에서 당당하게 서있는 플란의 모습은 그야말로 노력과 극복의 산물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스칼렛의 마음 한 켠이 어렸다·
그가 없었더라면 스칼렛이 잔불의 고유 능력을 얻게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서 애초에 목숨을 붙이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칼렛은 플란에게 천천히 검을 겨누었다·
“시작하겠다·”
플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스칼렛은 심호흡을 하면서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한때는 『잔불』이라는 능력을 과신하던 때가 있었다· 그 불꽃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작열』에 이르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것에 의존할 생각도 없다·
그저 검 한 자루·
손에 쥐어진 이 장검 한 자루· 이것과 자신을 믿을 뿐·
그리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을 알렸다·
쿠웅!
지면을 박찬 스칼렛이 쏜살같이 플란을 향해 돌진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스칼렛의 검과 플란의 마법이 허공에서 충돌한다·
촤악─!
플란의 마나가 뭉쳐있는 것을 안개처럼 흩뜨린다· 순전히 스칼렛이 근력으로만 이뤄낸 성과였다·
그리고 마나가 흩뜨러지면 스칼렛의 무차별적인 연격이 플란을 향해 날아든다·
“···꽤 늘었나·”
플란의 중얼거림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플란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힘으로 마나를 찍어누르려는 스칼렛을 두고 속도를 통해 우위를 점한다· 조목조목 급소만을 노리는 날카로운 움직임이었다·
칵!
마나로 잘 짜여진 바늘들이 스칼렛의 급소를 노렸다·
“하앗!”
하나라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질 터· 스칼렛이 빠르게 그것들을 쳐냈다·
그리고 플란을 향해 검을 있는 힘껏 내리친다·
콰아아앙─!
플란은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서있었다· 그가 펼쳐낸 보호막과 스칼렛의 검이 힘을 잔뜩 담아서 서로를 계속해 밀어낸다·
먼저 후들거리기 시작하는 것은 스칼렛의 팔이었다· 몇 백개의 술식이 겹쳐진 보호막을 순수 근력으로만 깨부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보호막이 전진하자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칼렛이 다음 행보를 결정하려던 그 순간·
콰아앙─!
보호막 전체가 하나의 폭발물이 된 것처럼 격발했다· 튕겨져 나간 스칼렛이 바닥을 여러번 굴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에 관중석에서 워 하는 탄성이 터졌다· 스칼렛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하고 섰다·
“스칼렛·”
그리고 마침내 플란이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아직은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고유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구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스칼렛은 살짝 웃었다·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나·”
“글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있어·”
스칼렛이 숨을 고르며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과거를 관찰한 이후로 정말 순수하게 마음 속에 품었던 언젠가 플란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
그것을 잇새로 내뱉는다·
“네가 내게 건넨 시간을 결코 소홀히 보내지 않았다고· 그리 생각해주었으면 하는데·”
“···그쯤 되겠군·”
플란과 스칼렛이 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스칼렛은 조용히 자신의 잔불에 대해 생각했다·
‘의존하고싶은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야·’
잔불이 그렇게 무심히 버릴 수 있는 능력이던가· 그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도 잔불을 미친듯이 휘두르고 싶다·
순수 근력만 가지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리고 그 검격이 막힐 때마다 한 번씩 생각한다·
내가 도리어 약해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의 나는 수도 기사로서의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스칼렛은 문득 수도 기사들이 있는 진영을 바라보았다· 다들 왜 고유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스칼렛이 현재 여기는 기사도란 이런 것이다·
플란이 나지막이 말했다·
“슬슬 끝내도 되겠나·”
플란의 웅혼한 마나가 경기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건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이 넓었고 또한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스칼렛은 문득 자신의 어깨가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소 비루해진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비루하다라·’
스칼렛의 몸이 어떠한 기운에 둘러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잔불을 아무리 다듬어도 작열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수 자신이 만든 힘을 찾는다·
설령 그 힘이 약하다 할지라도····
‘···이것만큼은 온전히 나의 것이야·’
‘화염’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힘이라 하더라도 설령 비교했을때 위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일구어낸 자신만의 것은 영원히 주인인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다·
“하아압─!”
또한 약하다는 것은 포기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더욱 노력해야 할 이유 아니겠는가?
미련 미련 미련···· 그것을 지금 이 순간 떨쳐낸다·
‘똑똑히 봐라 플란!’
이 순간 전력을 다해야만 자신의 진심을 플란에게 전할 수 있을 터다·
스칼렛의 검 끝에서 펼쳐져 나오는 기운은 그저 하얗다· 수레에 짓밟히기 직전의 가느다란 꽃같이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피어있었다·
콰아아아앙─!
둘의 공격이 맞부딪힌다·
문득 주마등 비슷한 것이 스칼렛을 스쳐 지나간다· 플란이 자신을 구해주었던 것 고유 능력을 양도한 것 자신이 플란을 괴롭힌 것····
쿠구구구구─!
마나의 양이 압도적이었다·
반면 스칼렛의 검은 아름다움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뒷심이 부족하고 또 엉성하다·
그러나·
‘그게 나여도 받아들일 것이다!’
스스로의 한심함을 깨달은 이가 다시 노력하는 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가· 그러한 면으로 보았을 때 과거의 자신보단 현재의 자신이 더 대단하다·
콰아아악─!
“···!”
관중석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마나의 격류가 스칼렛의 왼쪽 팔 하나를 통째로 뽑아낸 것이다·
“스칼렛!”
“스칼렛님!”
스칼렛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약하다·’
머리로 무언가를 떠올리더라도 몸이 따라주질 못한다· 남들이 보기엔 일말의 승률조차 없겠지· 아마 한없이 절망적인 상황일 것이다·
푸욱─!
이번에는 막아내지 못한 격류가 스칼렛의 오른 눈을 바늘처럼 관통했다· 시야가 단번에 어둑해진다· 또한 의식이 흐려질 정도의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스칼렛은 안다·
‘네가 더 힘들었겠지·’
플란이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힘들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검을 휘두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쿠구구구구─!
스칼렛을 둘러싼 하얀 기운이 더더욱 크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깔끔하게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한 송이의 꽃은 분명 만개하고있었다·
철컥!
손잡이를 쥔 한 손에 힘을 넣는다·
‘네가 보란듯이 이겨냈으니까····’
플란 네가 나를 위해 보란듯이 이겨냈으니까·
‘나도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 터!
마침내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새하얀 기운이 일 순간 마나의 격류를 갈랐으나 잠시에 불과했다· 이윽고 그것이 스칼렛의 전신을 덮친다·
“─!”
“─!”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안타깝게도 스칼렛의 귀는 그런걸 들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격류가 전부 지나가고난 후·
“····”
팔 하나를 잃고 눈 하나를 잃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스칼렛은 숨을 헐떡였다· 여전히 서있었지만 서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승부가 난 것 같군·”
플란이 중얼거렸다· 스칼렛도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질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스칼렛은 이상하게 여전히 버티고 서있을 수가 있었다· 신기하면서도 불쾌한 감각이었다·
차라리 쓰러져야만 편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한 와중 플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훌륭하다·”
스칼렛은 여전히 숨만 헐떡였다· 이명이 들리는 이 상황에서 플란의 목소리만 들렸다·
“화염이 아닌 고유 능력을 만들어냈군· 확인했다·”
스칼렛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참히 패배했는데도 불구하고 플란에게 그 말을 듣자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칼렛은 천천히 플란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스칼렛···· 스칼렛님?”
급하게 다가온 황실 관계자가 스칼렛을 불렀지만 스칼렛은 계속해서 플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황실 관계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어 어떤걸 말씀하시는지···?”
“····”
스칼렛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황실 관계자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음성 증폭기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건넸다·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인 뒤 음성 증폭기를 입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저 스칼렛은 정정당당히 승부하여 패배했습니다·”
관중석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플란도 우선 스칼렛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하나 더·”
스칼렛이 천천히 자신의 목걸이를 푼다· 유디트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였다·
그것을 목에 걸어줄까 하다가····
자신은 팔이 하나 뿐이다· 하는 수 없이 플란의 겉옷 주머니에 그것을 천천히 넣었다·
“유디트 가문은 마법 가문이며 가주가 플란 유디트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참 뱉내기 힘든 말일줄 알았는데·
스칼렛은 도리어 마음이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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