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8
“····”
비올라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걸 바라보는 감각이 좋지는 않았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일 터·
“후····”
비올라가 다시 한 번 차분하게 검을 휘두른다·
음악의 선율을 닮아 자연스레 이어지지만 안에 담고있는 내용물은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한 번 한 번의 일격이 플란을 덮쳤다·
포르테·
악보 위에 새겨진 음표를 강하게 연주하는 기예·
비올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궤적이 남기 시작한다· 한 줄의 악보가 생겨나고 또 생겨나고 생겨난다·
하나의 악장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많아진 궤적들이 정확히 한 순간에 플란을 찍어눌렀다·
아니 찍어눌렀어야만 하는데·
“···!”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또 펼쳐지기 시작했다·
플란은 비올라의 검격을 파훼하거나 피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도리어 비올라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다·
‘아니 피한 건 맞아!’
그 발걸음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 같지도 않았다· 그는 진정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평지에서 걷는 사람같았다·
딱─!
플란이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모든 것이 변한다·
카아앙! 캉!
플란이 검을 휘두른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악보들의 궤적이 꼬이며 스스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쾅! 쾅!
불협화음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을만큼 끔찍한 소음· 경기장의 관중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표정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개중에는 귀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딱─!
그리고 플란이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종이 악보가 찢어지듯 허공에 남아있던 궤적들이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비올라의 공격은 결국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아무일도 없도록 만들어낸 장본인인 플란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 털었다·
‘뭐지?’
제아무리 비올라라도 이 순간만큼은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준비했던 비장의 일격이 막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령 평범한 일격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은 문제가 된다·
플란 또한 이것을 평범하게 막아냈기 때문이다·
‘저 녀석도 비장의 수는 따로 있다는 건데·’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만큼 훌륭한 기본기였다·
비올라는 플란의 모습을 아주 세세하게 훑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플란을 보면서 솔직히 어느정도는 감탄했다·
“···비올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비올라가 한껏 젖어있던 상념으로부터 벗어난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고 옷매무시를 마친 플란이 말했다·
“앞으로 단 한 번이다·”
“···?”
워낙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비올라는 무어라고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쩐지 플란이 내뱉을 말이 예상되었다·
“다음 공격도 동일하면 즉시 죽이겠다·”
그리고 플란은 예상 그대로의 말을 내뱉었다·
잠시 후 비올라의 몸이 살짝 떨렸다· 제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평정심을 지키기 힘들었던 탓이다·
다음 공격도 동일하면 즉시 죽이겠다니·
이것과 동일한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방어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스스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비올라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지 않나·
그러니까 바꾸어말하면····
‘네가 봐주기라도 했다는 거야? 나를?’
“하 하하 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한 번 터뜨린 호흡이 이내 실소로 번져나간다· 비올라가 삶을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실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만일 플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올라는 방금 더할나위 없이 큰 모욕을 겪은 셈이기도 했다·
“기억이 나버렸네· 내가 왜 마법사를 싫어하는지·”
“이제는 더 싫어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플란이 픽 웃었다·
“존경하게 될지도 모르고·”
머릿속에 잡혀있었던 가닥들이 끊어지는 느낌이다·
수도 기사의 명예 영웅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청사진···· 수많은 것들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눈 앞의 대상을 향한 생각만이 수없이 불어난다·
손에 쥐어진 것이일류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검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필시 비올라의 악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졌을 터·
“거 건방····”
비올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앞에서 감히 건방지게─!”
비올라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거대한 살기를 품고 지면을 박찼다·
이전과는 다른 보법 다른 움직임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플란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어린다·
“저 저거··· !”
“저건!”
관중석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터져나왔다·
경기장 전체를 밀어올리는 듯한 살기에 모두들 눈을 부릅떴다·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거대해져야만 저런 살기를 뿜어낼 수 있을까?
비올라와 플란의 대화가 들리지 않더라도 모두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승부는 이제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생사결이다·
콰아아아앙!
비올라의 검이 지면을 내리치자 무수히 많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스스스슷!
그리고 허공으로 튀어오른 파편들이 큐브 조각처럼 베어진다· 다음 순간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촘촘한 먼지로 베어진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짙은 살기였으며 또 훌륭한 검술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같은 생각을 했다·
이게 영웅·
영웅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 이 정도의 싸움은 해야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포르티시모·
포르테보다도 강하게· 하지만 검의 위력을 키워봐도 공격은 먹히지 않았다·
콱!
보이지 않는 팔들이 수없이 나타나 비올라의 팔을 붙잡는다· 허공에서 마주친 둘의 시선 비올라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있었다·
“기사라는 건 결국 전부 비슷하군·”
“입 다물어라!”
비올라가 순수 힘으로 플란의 마력 손을 전부 뿌리쳤다· 하지만 오히려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플란이 마력 탄환을 쏘아냈다·
“영웅이라는 칭호가 아쉬워·”
“네가 뭘 알아!”
촤악─!
마력탄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진다· 양단된 채 비올라를 스쳐 지나간 마력 탄환이 좌우에서 제멋대로 한 박자 뒤에 폭발한다·
그러한 경기 양상을 지켜보는 이들은 호흡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어····”
베키가 감탄사인지 뭔지 모를 것을 흘렸다· 어쩌면 두려움의 표현에 가깝기도 했다·
이름 높은 이들의 경기가 펼쳐지면 품격과 격식이 차려진 수준 높은 경기가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실제로 품격이 있긴 했으나····
“으····”
베키는 저도 모르게 제 팔을 스스로 쓰다듬었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은 진정 서로의 숨통을 어떻게든 끊어두려는 잔혹한 모습 뿐이었다·
후웅─!
비올라의 검 끝은 매번 플란의 급소로 향해있었다·
쾅! 쾅! 콰앙!
맞부딘친 일격 하나하나의 위력이 엄청났으나 곧바로 다음이 이어진다·
끼기기기기긱─!
그 때 비올라의 검이 이상한 것을 베었다·
새 소리 물 소리 발걸음 소리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온갖 소리가 갑자기 플란의 귀 안으로 불현듯 스며들었다·
단순히 소리가 재생되는 듯한 감각이 아니다·
뒤에서 실제로 누군가가 걷고있는 듯 했고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세우는 듯 했고 어디선가 공격이 날아드는 듯 그것들은 전부 생생했다·
평범한 이었다면 분명 혼란에 빠졌으리라·
그러나 플란은 이번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플란은 자신을 보조하는 수많은 감각중에서 ‘청력’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와중에 비올라의 검격이 뿜어낸 초음파 비슷한 것이 플란의 옷자락 끝 부분을 뜯어냈다·
비올라가 플란을 향해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청력을 제거해둔 상태였기에 플란은 그녀의 입모양을 읽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비올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뜨자 망막 위에 새겨졌었던 높음 음자리표가 어느덧 다른 문양으로 변해있었다·
플란도 익히 아는 그것의 이름은 도돌이표·
“···도돌이표야!”
호위 기사중 하나가 소리쳤다·
검이라는 것이 한 번 휘둘러지는 것으로 끝이라면 비올라의 도돌이표는 그 개념을 처참히 부순다·
한 번 휘두르면 무한히 휘두른 효과를 갖는다· 평범한 기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예였고 동시에 이능이었다·
쿠구구구구─!
엄청난 기운을 담은 그 검이 마침내 휘둘러졌다·
플란이 아주 살짝 뒤로 물러났다·
비올라는 맹격을 이어갔다· 도돌이표 속에서는 검을 휘두르고 다시 자세를 잡는 상식이 없다·
그저 휘두른 상태 휘두른 상태 휘두른 상태가 이어진다· 덕분에 비올라는 온갖 방향에서 검이 휘둘러지도록 생각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수많은 악기가 조화를 이뤄내는 오케스트라처럼 각기 전혀 다른 방식의 검격들이 하나의 선율을 이루며 플란의 목을 섬전처럼 노린다·
그 일련의 『교향곡』을 바라보면서·
“···쓸만한데·”
플란은 짧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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