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
“황녀님···· 안 좋은 일로 방문하시는건 아니겠죠?”
이른 아침 유디트 저택의 하녀들은 각을 맞추어 도열해있다·
제 3황녀 유시아· 하녀들이 평소 충성하여 모시는 가주보다도 높은 인물인 황녀가 저택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러겠니? 가만히 있으렴· 입 다물고 가만히·”
“가사(假死) 상태를 십 년 만에 벗어나셨는데 깨자마자 유디트의 저택부터 찾는다니 이건 불안하잖아요·”
“가만히 있으래도·”
유디트의 인물들이 황궁을 방문하는 일은 있었어도 그 반대는 결코 없었다· 그래서인지 하녀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혹시 아직도 도련님을 못잊으신걸까요? 그 때 일 말이에요·”
어린 하녀의 철없는 말에 카타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이 되는 소리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런가요? 음 그래도···· 마수 침공때 도련님이 목숨을 구해준거나 다름없는데요· 못 잊으셨을지도 몰라요·”
“도련님이 지금은 검을 놓으셨잖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 스칼렛 아가씨께서 들을까 무섭다·”
카타리나가 하녀들에게 이리저리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화제가 많았기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쉽게 잦아들지를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현관문이 훤히 열리더니 도도한 발소리가 저택 내부를 울렸다·
머리카락은 칠흑을 온전히 담았고 잔불처럼 남은 붉은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깊다·
잔불의 기사 스칼렛 유디트·
그러나 그녀의 등장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 뒤를 쫓는 여인때문에 하녀들은 숨을 참고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빛·
황녀 유시아는 빛과 같았다·
순백색의 머리카락은 기존의 평범한 흰색을 검어보이게 만들 정도였고 황금색의 눈동자는 그녀의 고귀한 태생을 증명한다·
인간의 태생을 일절 부정하는 듯한 외모· 초월적인 천사가 강림한 듯한 광경에 하녀들은 넋을 잃었다·
“아 반갑습니다!”
별안간 무언가가 카타리나의 손을 덥석 붙잡는다·
그 조막만한 것이 유시아의 손이라는 것을 인지한 그 순간 카타리나는 혼절할 뻔했다·
“하녀장님이시지요! 기억하고있습니다!”
“아 아 아 아···· 예 예 예 예···?”
“다른 하녀분들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시아가 인간을 멸시하더라도 모두가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성품마저 온화했다·
하대받는 것에 익숙한 하녀들은 오히려 이러한 환대가 더더욱 반응하기 어려웠다·
하녀들이 유시아의 따스함에 녹아내리는 사이 스칼렛이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만류했다·
“황녀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반가워서 그만·”
“아니 황녀님· 저희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실 필요는····”
스칼렛은 진이 다 빠질때쯤에야 유시아를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집무실은 황녀와 대화하기에는 너무나도 누추하지만 그 자체가 불충이 될 수 있겠지만·
오늘 이 저택을 방문하겠다는 것이 누구도 아닌 유시아의 의지였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녀장 카타리나가 엄선하고 엄선한 차를 대령한 후 신속하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 편하게 앉으셔도 됩니다!”
앉은 유시아가 우두커니 서있는 스칼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칼렛은 결단코 그럴 생각이 없어서 말을 돌렸다·
“황녀님 몸소 방문하신 이유를 감히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게····”
유시아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칼렛은 부디 자신이 예상하는 이유는 아니기를 바랐다·
바라고 또 바랐지만·
“···혹시 플란 경은 어디에 계십니까? 좀 뵙고싶은데·”
그 말에 스칼렛의 기대는 무참히 부서져버렸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고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동자세를 유지해야했으니까·
유시아가 찾는 플란 유디트는 10년 전의 플란 유디트·
스칼렛을 쫓아 검을 부지런히 휘둘렀고 마수 침공에서 유시아의 목숨을 구해내는 데에 기여했던 기사·
그건 분명 대단하고도 강렬한 업적이다· 설령 운이 좋아 그리 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 된 유시아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때의 플란이 있을 테지만 그의 현재 모습을 아는 스칼렛은 머리만 아플 뿐이다·
어디부터 설명해야할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도무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사정이 있어 잠시 저택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유시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번진다·
“아···· 아쉽습니다· 곧 아카데미에 가봐야해서 그전에 꼭 얼굴을 뵙고 싶었는데·”
“······아카데미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유시아는 환하게 웃으면서 품속에서 문서를 꺼냈다·
황실 특유의 금색 장식이 화려하게 잔뜩 박힌 문서였지만 결국 메르헨 아카데미에 편입한다는 내용이었다·
“마법학부로 갑니다· 누워있었던 세월을 메꾸려면 부지런히 배우고 움직여야지요!”
“마법 학 부 말씀 이십니···· 까?”
스칼렛은 태어난 이래 거의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유시아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열심히 배워야합니다! 아 그런데 벌써 시간이····”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고 아주 살짝 열었다· 황실측의 인물들이었다·
유시아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혹시 플란 경이 돌아오면 꼭 기별을 주셔야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황녀는 떠나버렸다· 활기차게 달리는 그녀의 뒤를 황실 측 인물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뒤쫓았다·
“······”
스칼렛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의자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충격이 워낙 큰 탓에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다· 허나 그러한 와중에도 머리는 빠르게 굴렸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침착해야하는 것이 기사니까·
고심끝에 나온 결론은 짧고도 명료했다· 유시아 황녀가 플란과 마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추레해진 지금의 플란을 유시아가 본다면 얼마나 실망할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황녀의 실망은 유디트를 향한 실망으로 이어질 터·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빌어쳐먹을···”
그깟 쓰레기가 유디트의 일원이라는 것이 새삼 원망스럽다·
그때였다· 카타리나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스칼렛 아가씨· 아카데미로부터의 편지입니다·”
“가져와·”
일전에 아카데미측에 플란과 관련된 경과보고서를 요구했었지· 그게 이제서야 도착한 모양이다·
두께가 제법 되는 종이 뭉치를 건네받는 와중 스칼렛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조기 퇴학·”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은 여전히 존재했다·
플란의 성적은 더없이 형편없다· 조기 퇴학을 당하기에는 적격인 상태일터· 답신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면 오늘 내로 조기퇴학 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카타리나가 고개를 기울인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보도록·”
하녀장이 방을 빠져나간 후 스칼렛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편지의 밀봉을 뜯었다·
아카데미 내부의 기자들로부터 온 것이니 정확한 사실만이 담겨있을 터·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숙련된 기사의 눈동자가 빠르게 활자를 훑는다·
남동생의 철없는 행동을 더는 인내할 수 없다·
굳이 중간평가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 오만방자한 내기를 일찍 끝낼 시간이 왔다····
“뭐?”
그러한 생각이 바로 다음 순간 토막난다·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A·
플란의 현재 등급이었다·
◈
오늘따라 날씨가 퍽 좋았다·
햇빛을 받은 아카데미는 찬연한 정경으로 빛나며 바람은 알맞게 선선하다· 예민한 마음이 절로 누그러든다·
오후에는 탐험 과제 대비 실기 수업이 있다· 아늑한 풍경을 누리며 훈련장으로 이동하는 와중 트리비아가 계속해서 울렸다·
[ ▶ 이번 것도 그림인 것 같아용· ]
[ ▶ 그래서 이런식으로 접근해봤어용! ]
아고라 보드에 새 문제를 출제한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오늘까지만 유효한 문제라서 그런지 경매 고객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연락을 보내오는 중이다·
“어설프다·”
좋게 접근하지만 그 이후 상황을 영 풀어가지를 못한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 ▷ 세가지 술식을 보내주지· ]
[ ▷ 풀어보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
[ ▶ 알겠어용! ]
[ ▶ 오늘 하루종일 풀어볼게용 ㅎㅅㅎ ]
그래도 고객이 ‘정답부터 알려줘라’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는다·
내가 시키는 것을 그저 묵묵히 수행한다· 학습태도로 보자면 나름 흐뭇해지는 면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때였다·
“플란 학생·”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 바이올렛 교수였다·
피로해보이는 기색은 평소와 다를 바 없다만 특유의 날카로움이 오늘따라 무디다·
“어때요· 탐험 과제 준비는 착실하게 하고있나요· 고작 이틀 남았는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빨리 마치느냐 늦게 마치느냐의 차이일 뿐 대충 준비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거 받아요·”
느닷없는 바이올렛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일단 받아들었다· 수정구 모양의 아티팩트였다·
“정수의 샘이라고···· 그렇게 좋은 아티팩트는 아닌데 그래도 훈련하는데 도움이 될거에요·”
나는 정수의 샘을 이리저리 살폈다·
안으로 마나를 흘려넣는 것이 가능했고 역으로 뽑아내는 것도 가능했다·
마나 저장고 역할을 해주는 아티팩트인가· 이전 세계에서도 이러한 아티팩트들은 꽤 있었다·
등급에 따라서 넣을 수 있는 양이 천차만별이겠지· 이건 바이올렛의 말대로 그냥 평범한 수준인 것 같다·
“저한테 왜 이걸·”
“볼일 끝났으니 가볼게요· 편입생 처리때문에 바빠서·”
바이올렛은 대답 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갑자기 다시 몸을 돌린다·
“맞다· 짠하게 지내지 마요· 잠은 기숙사에서 자고 학식도 챙겨먹어요· 마법에는 귀천 없으니까 힘내고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이 여자는 갑자기 뭐라는걸까· 채 이해하기도 전에 바이올렛이 저 멀리 멀어져간다·
손해본 것은 아니니 괜찮을 터· 정수의 샘을 품 속에 집어넣은 후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탐험 과제 직전 실습이라·’
어떤 식으로 실습을 시키겠다는 것인지 흥미가 동한다·
탐험을 미리 시켜보려면 던전 앞으로 소집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장으로 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훈련장 앞이었다· 망설임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정육면체 형태의 넓고도 흰 공간· 학생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그 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흰 명찰이 아닌 금색 명찰을 단 학생들이 있어서 조금 신경쓰였다· 금색은 2학년의 명찰일 터인데·
소매 부분을 킁킁거리던 베키가 나를 발견하더니 손을 번쩍 든다· 당연하다는 듯 내쪽으로 다가와서 붙었다·
“야 플란· 왔어?”
“절반도 안 왔나·”
모여있는 1학년 학생들의 수가 굉장히 적었다·
베키와 나를 제외하면 1학년은 세 명 정도다· 한 명은 나와 같은 조인 마틴 그리고 나머지 두명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베키가 대답했다·
“이게 다 온거야· 오늘 실습은 두 조씩 로테이션으로 이루어지잖아· 이번에는 우리 5조랑 너희 11조·”
“트릭시가 없다만·”
“아 걔는 오늘 불참이래· 사정이 있나? 아무튼 교수한테 따로 이야기했나봐·”
이야기하면서 베키는 2학년들의 모습을 스윽 훑었다·
그 시선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새내기에게 선배란 한없이 높은 존재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야 플란· 근데 오늘 2학년 선배들은 왜 있는 걸까···? 설마 오늘 실습 같이하는 건 아니겠지?”
베키가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레너드 교수가 학생들 앞에 섰다·
“다들 주목·”
모두가 그의 입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소란스러움이 금세 잦아드는 데에는 교수의 험악한 인상도 크게 한 몫 했다·
“트릭시를 제외하면 결원은 없겠지· 탐험 과제까지 고작 이틀 남았기 때문에 오늘은 실습을 해 볼 예정이다·”
마틴이 손을 들었다·
“성적에 반영되는건가요?”
“당연하지· 실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실습처럼·”
평가에 반영된다는 말에 몇 안 되는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레너드는 오히려 그러한 모습들이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려운거 아니니까 엄살 피울 생각은 버려라·”
레너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훈련장이 그 모습을 변모시킨다·
정육면체 형태의 흰 공간이 직사각형으로 끝도 없이 늘어난다·
마치 미로같은 벽이 주구장창 솟아오르더니 저 멀리 끝쪽 허공에 붉은 깃발 하나가 걸렸다·
동시에 레너드 교수와 2학년들이 서있는 곳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1학년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베키가 내게 소곤거렸다·
“야 플란· 그래서 결국 뭐 어떻게 하겠다는거야? 그냥 위에서 저렇게 보기만 하겠다는거야? 그럴거면 공간은 왜 바꾼거고 깃발은 왜 꽂은거고 2학년 선배들은 왜 있는건데?”
“왜 내게 묻지·”
“너 모르는거 없잖아·”
그 말은 칭찬인지 아닌지 다소 애매하다· 이쪽을 마법사가 아니라 점성술사쯤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만·
그 때 레너드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거긴 왜 떠들어· 자신있나봐?”
나와 베키를 번갈아보며 쳐다보던 그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고정되었다·
그가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모의전투때 그놈이구나·”
이것 역시 칭찬인지 아닌지 그 의중을 알 수 없다· 그는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잇는다·
“이번에도 자신 있나보네· 무슨 이야기길래 그렇게 신나게 해? 교수 말도 무시해가면서·”
마법과 관련하여 자신없던 적은 없다· 다만 나조차도 아직 이 실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른다·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베키가 어서 해보고싶답니다·”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베키 너 앞으로 나와· 어떤 테스트인지 직접 하면서 다른 애들한테 보여주게·”
“네? 어 아니· 네· 네? 네에? 어? 저 저 저요?”
베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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