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붉은 깃발이 꽂힌 지점까지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짧은 지령을 끝으로 레너드가 시간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와르르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베키는 출발한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얼음 원소를 펼쳤다· 푸른 결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재빠르게 달려 베키가 벽면 위로 올라탔다·
‘활용이 제법 늘었군·’
높이 올라선 그녀가 벽과 벽 사이를 얼음으로 잇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깃발을 향한 일직선의 길이 생성되었다·
원소 마법을 활용하여 ‘미로’라는 제약을 훌륭하게 제거한 베키에게는 이제 어떠한 장애물도 남아있지 않다· 소녀는 붉은 깃발을 향해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나는 레너드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표현 그대로다·
실습치고는 과하게 단순하며 득보다는 실이 많다· 당장 베키만 하더라도 자신의 전략을 남들에게 노출한 셈이나 다름없어졌다·
그러네 레너드 교수는 전력을 다해 달리는 베키를 가만히 서서 관망할 뿐이다· 고작 이 정도 실습으로 무엇을 평가하겠다는건지·
그러한 의문을 품은 순간·
“시작!”
레너드의 외침이 신호탄이 되어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일정했던 높이의 벽들은 제각기 높낮이를 달리하며 오르내리고 추가로 솟아오른 벽들이 미로를 미궁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모시켰다·
“읏!”
벽과 벽 사이를 이어두었던 얼음이 부서지며 베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나를 엮은 무속성의 화살 화염구 얼음창···· 2학년들의 다양한 마법이 베키를 향해 쇄도했다· 베키가 벽을 엄폐물삼아 스티커처럼 달라붙는다·
“으에? 자 잠깐만요!”
베키는 눈을 휘둥그레뜨고서 레너드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호통 뿐이다·
“실전에서 기습당해도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만 볼 거냐! 대처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베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한건 이거였나·’
붉은 깃발과 시간 측정은 허상일 뿐이다· 기습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유연한 대처를 보여주느냐가 이번 실습평가의 실체일 터·
제법 괜찮은 구성으로 느껴졌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마법이야말로 비로소 ‘본인의 것’이라 칭할 수 있는 본실력일테니·
깃발에 닿지 못해도 상관없다· 본인의 기량을 최선으로 발휘할 수 있느냐가 이번 평가의 관건일 것이다·
베키는 과연 어느만큼 증명할 수 있는가·
허공을 향해 넓은 얼음 방벽이 펼쳐졌다· 모의 전투때에 비하면 강도도 훌륭하고 넓이도 넓다만·
‘막을 생각은 왜 하는건지·’
공격을 전부 막아내가면서 상황을 해결하려 한 점부터가 이미 패착이다·
쾅! 콰앙!
쇄도해온 공격이 베키의 얼음 방벽에 틀어막힌다· 허나 그뿐이다· 방어에 전력을 다해야하기에 베키는 제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못했다·
“중지!”
레너드 교수의 외침에 들쑥날쑥하던 벽들이 원래의 높이를 되찾았다· 또한 2학년들의 마법 발현이 멈춘다·
“평가 끝· 들어가· 첫 순서인걸 감안해서 보정했다·”
베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그 어떠한 말소리도 나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이다· 미로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던 실습 평가가 그 내면에 상상치도 못한 제약들을 추가로 숨기고 있었으니·
“올해 1학년은 물이 좀 별로네·”
“우리때에 비하면 쉬운거 아닌가?”
2학년들은 제멋대로 떠든다·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본인들 평가도 아니고 마음 편하게 마법을 난사할 수 있고 대상은 만만한 1학년이고· 그들에게는 이 시간이 가벼운 유희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의 수군거림이 아래 서있는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 들린다는 점이다·
주변의 시선과 수군거림 역시 ‘예기치 못한 상황’의 일부로 치는 것인지 레너드 교수는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어떤 평가인지는 이제 다들 알았겠지? 다음 캐럴 로미엔·”
◈
베키가 소속한 5조의 조원들이 차례대로 불려나갔다·
“그만 더 안 봐도 되겠다·”
“에?”
예상보다 훨씬 빠른 종료에 학생의 눈에는 절망감이 내비쳤다· 사형을 선고받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만그만· 들어가·”
“네····”
이후 마지막 조원이 불려나가고 아니나다를까 혹평을 받았다· 아직까지 붉은 깃발에 도달한 학생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채다·
“5조는 그냥 기권해야겠는데·”
“세 명이 다 이러냐· 애들 깔아주는 역할밖에 안 되겠다·”
2학년으로부터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지지만 베키네 조가 할 수 있는 저항은 전무했다·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어떤식으로 대응할지 잠시 고민했다· 마나의 용량이 제한되어있는 상태니 최선의 수 그 이상을 찾아야했다·
‘기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만한 그런 수 말이다·
물론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다·
그래서 내게는 우려가 걱정이 그 어떠한 것도 없다·
“이제 11조 차례지· 바로 시작한다·”
“잠깐만요·”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어 실습 평가를 속행하려던 레너드의 시선이 훈련장 입구쪽을 향했다· 나도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뒤쫓는다·
커다란 고깔모자의 모습이 이제는 눈에 익다· 로브 차림의 바이올렛이 피곤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있었다·
“바이올렛 교수?”
“레너드 교수· 잠깐 나와봐요·”
“지금 실습평가중인데·”
“나와요· 편입생 관련해서 꼭 해야하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레너드 교수가 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는 잠시 휴식하면서 대기해· 훈련장 벗어나는건 당연히 안 된다·”
레너드 교수가 훈련장 밖으로 사라진 그 순간·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새기 시작했다·
“우리조 어떡하냐····”
“훈련장 들어올때 다른 조 마주쳤었는데 걔네도 표정 안 좋았어· 다들 이랬을 수도 있어·”
5조 조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눈다· 베키는 대화에 끼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렸는데 그러던 어느순간 나와 보기좋게 눈을 마주쳤다·
“야 플란·”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베키가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첫순서로 평가받았잖아· 어떡할거야·”
“다른 순서였다면 달랐을 것 같나·”
“그건···· 그건 그렇네· 너무하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베키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이름 팔았잖아· 대신 피드백 정도는 해줘·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나는 하는 수 없이 트리비아의 메모 페이지를 펼쳤다· 이번 피드백의 경우 언어로만 설명하면 설명하는쪽도 설명을 듣는 쪽도 이해하기 어렵다·
“보아라 베키·”
손 끝으로 페이지에 술식을 세 개 그렸다·
순서대로 마나화살 화염구 얼음창· 2학년들이 베키를 향해 쏟아부었던 일부 공격들의 술식이다·
“주목해야하는 것은 파괴를 담당하는 회로쪽이다· 네가 보기엔 마나 배합의 비율이 어떻나·”
“어···· 생각보다 배합이 안 되어있네? 이렇게 적은 양으로도 써져?”
“바로 그 부분에 집중하는거다· 출력과 겉모습에 치중한 마법들이기에 파괴력이 결코 높지 않아· 방어하려 한 것이 패착이다· 무시하고 주파할 방법을 찾았어야지·”
“아~!”
베키가 감탄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평가 이후 울적해있었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신난 그녀가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게 이런거구나···· 나한테 들어오는 공격이 뭔지 몰랐어서 무작정 막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네·”
“그렇지· 조잡한 공격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 거기·”
이번에 끼어든 목소리는 위쪽으로부터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2학년 두 세명이 불쾌한 시선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였다·
“넌 임마 뭐 그렇게 건방지냐?”
“선배 마법 가지고 출력과 겉모습에 치중했네 조잡하네···· 그만큼 자신있어?”
“어차피 쟤 차례 금방이야· 한 번 보자·”
쯧 혀를 차고서 트리비아를 덮었다·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것 자체가 성미에 맞지 않아서 우선 무시했다·
누군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곧 내 차례가 온다·
레너드 교수의 부재중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베키가 그녀의 조원들과 진중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별안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니 정확히는 건드리려고 하길래 피했다· 타인과의 접촉은 여전히 싫다·
“뭐야 어떻게 피했대·”
눈을 반쯤 가린 앞머리와 옆으로 쭈욱 찢어진 눈· 고양이같은 얼굴이 인상적인 그의 이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틴 루크·”
“어 맞아· 그래도 같은 조원 이름은 아는구나?”
마틴이 미소지었다· 사실 미소라기보단 비웃음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무슨 일이지·”
“조원끼리 인사는 나눠야지· 맞다· 어제 이긴거 축하해· 운도 좋더라?”
촐싹대는 모양새가 썩 거슬린다· 농간당한 아리아를 보고도 촐싹대는 것은 이 녀석의 자신감인가 아둔함인가· 그에게 되물었다·
“모의 전투때 졸았나·”
“다 봤지· 너 운 좋은거 맞잖냐? 아리아가 부정행위해서 부전승으로 이겼으면서·”
아리아가 결계를 물들인 덕에 후반부만 겨우 관찰한 모양이다·
“운이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마틴쪽의 운이 더 좋았다· 이깟게 내 상대였다면 지면 위에서 흔적도 없이 뭉개졌을것이다·
“서로 인사 나눴군· 이제 볼일은 끝났나·”
“와~ 너 근데 말투 원래 이러냐? 난 그냥 조원끼리 친하게 지내자는 뜻에서 말 붙인거야· 왜 이렇게 무게를 잡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빙글빙글 웃던 마틴은 갑자기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플란· 너 오늘 실습 평가는 좀 어떠냐· 뭐 계획은 있냐?”
“있다만·”
“오~ 그래? 나도 좀 자신있는데·”
이어지지 않을 대화를 녀석은 굳이 억지로 잇고 있었다· 나는 결국 미간을 좁히고서 그에게 물었다·
“본론이 뭐지·”
“아하하 본론이라니· 그냥 이런이야기 저런이야기 다 하는거지·”
그는 여전히 웃고있다· 목소리를 더 줄이더니 굉장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플란 너 혹시 트릭시한테 관심있냐?”
“······미쳤나·”
“아하하하 역시 그렇지? 넌 베키한테 관심있잖아·”
거기까지 말한 마틴은 입술을 핥으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보아하니 이제서야 본론을 이야기하겠다는 행색이다·
“나는 트릭시한테 관심 있거든· 좀 잘해보고 싶은데·”
경탄스러울정도로 흥미가 안 생기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틴은 열변을 이었다·
“오늘 실습 평가때 내가 잘하면 네가 트릭시한테 내 칭찬좀 해주라· 우리 셋이 같은 조잖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할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훈련 아고라 보드 동아리 치유마법 도서···· 유감스럽게도 빌어쳐먹을 마틴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 마법학부 인맥 꽤 있어· 나중에 너한테도 여자 소개해줄게· 야 솔직히 이건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냐· 서로서로 돕자 좀?”
무시했다· 트리비아에 푸른 불이 들어와있길래 그거나 확인했다·
[ ▶ 저 세개 다 풀었어용! ]
[ ▶ 다음 가르침 주세용! ㅎㅅㅎ ]
“내 말 듣고있는거냐? 지금 무시하고있는거 아니지?”
트리비아를 덮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푹 쉬었지? 지금부터 실기 평가 재개한다·”
때마침 레너드 교수가 훈련장 내부로 복귀했다·
다만 그는 홀로 복귀하지 않았다· 옆에 트릭시 폰 프리츠를 대동한 채였다·
교수가 트릭시에게 물었다·
“뭐 중요한 사정있다며· 아픈거 아니었어?”
“안 아파요·”
“실기 평가 받을 수 있는 상태야? 확실해?”
“네·”
트릭시가 특유의 무표정을 짓고서 우리 곁에 섰다· 마틴이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바쁘게 입을 움직였다·
“야 야 야· 내가 한 말 똑똑히 들었지? 칭찬은 최대한 티 안 나게· 자연스럽게· 알지?”
말을 마친 마틴이 트릭시를 끈적한 시선으로 훑는다·
트릭시 폰 프리츠에게는 결코 그 나이대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도도함과 고혹스러움이 있다·
당장 그녀의 지금 모습만 살피더라도 그렇다·
더없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있지만 아카데미의 제복으로도 결코 가려지지 않는 굴곡은 더없이 남성들에게 친절하다·
“야· 나 하는거 잘 봐· 저런년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야· 달라붙어서 막 앙앙댄다니까·”
“······”
“너도 좀 의지를 가져봐· 쟤랑 자면 너한테도 꼭 이야기 풀어줄게· 응? 쟤랑 자면 어떨 것 같냐· 벌써부터 흥미가 막 생기지?”
뺨을 한 대 갈길까· 그마저도 동선낭비처럼 느껴져서 그만두었다·
“11조 시작한다· 마틴 루크·”
레너드 교수의 호명에 마틴이 나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앞으로 나섰다·
옆에 서있는 트릭시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었다·
트릭시는 자신의 트리비아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마틴이라는 생명체를 향해 가진 관심은 조금도 없다·
앞으로 나선 마틴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준비 됐으면 시작해·”
“네!”
우렁차게 대답을 뱉은 마틴이 기세좋게 달려나간다·
그는 바람 원소를 활용하여 본인에게 날아드는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나갔다·
그러나 겉멋에 치중하는 모습이 훤히 보여 눈쌀이 찌푸려진다· 동선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작 관중을 의식하는게 여실히 느껴지는 마법 발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법은 추레할 뿐이다· 정확히 십초만에 흥미가 식어버린 나는 결국 트리비아를 꺼내 펼쳤다·
[ ▷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
[ ▷ 이것까지만 익히면 아고라 보드에 적힌 문제는 풀린다· ]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고객이나 놀아줘야겠다·
그런데 문득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흥흥흥 하는 콧소리·
놀랍게도 트릭시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허공에서 우리의 눈이 자연스레 마주친다·
“······너·”
눈이 마주친 트릭시 폰 프리츠의 표정이 금세 싸늘한 온도를 되찾는다· 그녀가 더없이 서늘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쪽 쳐다보지마· 아니 눈을 뜨지마·”
볼 생각도 없었다· 다시 본인의 트리비아를 살폈다·
[ ▶ 너무 좋아용 !ㅅ! ]
늘 그랬듯 고객의 답장은 미친듯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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