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평가 실습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다만 트릭시의 관심은 평가에 있지 않다· 평가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는 트리비아의 페이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배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던 순간이 그녀의 삶에는 없었다· 아마 그녀 스스로보다 노력하는 학생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부정하는 듯한 술식들이 트리비아의 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새겨지는 중이었다·
[ ▷ 지금부터는 평면이 아닌 입체를 떠올려라· ]
페이지의 한 켠에는 일전에 트릭시가 출제했던 문제의 술식이 그려졌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보조 계열의 술식이 그려지고 그 두가지를 잇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적인 방식·
그러나 다른 말로는 가장 정석에 가까운 가르침이었다·
[ ▷ 이번 가르침에 질문은 받지 않는다· ]
[ ▷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암기를 선행해라· ]
검은색에 불과하던 술식들이 각 부분에 따라 그 색을 여섯가지정도로 달리했다· 가독성을 고려하여 핵심 회로의 색상을 달리한 듯 하다·
‘살아났어·’
접근했다·
아고라 보드의 이번 문제는 트릭시의 스페이드 평면 그림을 입체로 옮긴 술식이었다·
표현 그대로 평면에 불과했던 스페이드 그림이 입체적인 도형으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트릭시는 저도 모르게 트리비아를 들고있는 손을 떨었다·
학습의 희열 타인에게 받는 순수한 가르침····
이 모든것이 트릭시에게는 너무나도 반갑다· 아니 거의 최초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녀에게는 홀로 학습해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페이지에 새겨진 술식을 손으로 매만지며 느끼려했다·
[ ▶ 너무 고마워용 ㅎㅅㅎ ]
그렇게 답장을 보내려는 순간·
“트릭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트리비아를 덮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느끼하게 생긴 이 남학생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11조 조원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의 명찰에는 마틴 루크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방금 나 하는거 봤어?”
안 봤다· 하는지도 몰랐다·
마틴의 시선이 트릭시가 들고있는 트리비아를 향했다·
“아 트릭시· 우리 트리비아 코드 교환할래?”
“싫어·”
“에이 탐험 과제 관련해서만 연락할게· 우리 같은 조잖아· 원활하게 소통해서 좋은 성적 받아야지·”
트리비아는 개인의 고유 코드를 교환하면 개인 연락을 할 수 있게되는 식이다·
그러고보니 트릭시는 그 누구와도 고유 코드를 교환한 적 이 없었다· 교환은 커녕 연락을 하는 인물도 없다·
아니 굳이 따져보자면 한 명 있다· 가르침 경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관심과 흥미가 동시에 솟아오른다·
“다음 플란·”
그 때 레너드 교수가 플란을 호명했다·
호명당한 소년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뿜어내는 기백은 이미 평민의 것이 아니다·
마틴이 키득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트릭시· 쟤 하는거 잘 봐· 내가 하는거랑 많이 비교될걸?”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지켜볼 생각이다· 모의전투때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 플란이니까·
의외 우연···· 이따위 요소들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실력이다· 그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해볼 생각이다·
“준비되면 말해· 바로 시작해도 되겠어?”
교수의 말에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
“요즘 1학년 왜 이러냐· 교수 말에 고개만 끄덕이네·”
“아까 아는척하던 애네? 우리한테도 좀 알려줘라· 야·”
2학년을 올려다보며 일일이 말다툼을 할 생각은 없다· 대답 대신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후우우 호흡과 마나를 동시에 가다듬는다·
굳이 달리지 않는다·
붉은 깃발까지 향하는 과정은 경쟁이고 경쟁이라는 것은 경쟁자보다 뛰어날 수만 있다면 승리다·
“여유를 부리네· 미쳤나?”
2학년중 누군가가 불퉁스럽게 중얼거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공격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콰앙! 쾅!
훈련장 바닥 파편이 튀어오를 정도의 위력·
각 공격에는 숨길 수 없는 악감정이 실려있었다· 다른 학생들의 평가때 쏟았던 공격과 비교하면 훨씬 강도가 높다·
쾅! 쾅! 콰앙!
그래봐야 단순한 공격이다· 침착하게 방어해나가며 나는 골몰한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다양하다·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으며 직선인 공격들을 피해나가며 붉은 깃발까지 주파하는 것도 가능하다·
역으로 반격에 나설 수도 있고 깃발을 이쪽까지 끌어오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지만·
‘마나·’
최선의 수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무릇 자기 객관화부터 이루어져야하는 법이었다·
며칠간 단련하며 드러나는 결과는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마나 정화 마나 총량 이 두가지 훈련을 같은 양으로 병행했지만 현재 정순함의 레벨만이 눈에 띄게 오른 상황·
이 육체는 마나의 총량을 늘리기에 다소 부적합하지만 마나의 정순함을 끌어올리는 면에 있어 더없이 높은 효율을 자랑한다·
물론 나는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지금 당장은 정해진 양으로 극도로 높은 효율을 내는 데에 치중하겠으나····
쌓아둔 경험과 이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게될 노력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또다시 모든 부분에서 최고를 증명하리라·
‘이번에는 우선·’
양보다는 질에 집중한다·
마법의 사용 횟수를 향한 집착을 버리는 대신 그 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것이다·
팍!
무속성의 화살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친김에 나도 무속성의 구체를 하나 생성시켰다·
원소 계열 공격의 기본으로 통용되는 이전 세계에서 ‘매직 미사일’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구체다·
시험삼아 벽면을 향해 발사해본다· 아니나다를까 그 위력이 약소하다·
이전 생이라면 백 개의 구체를 동시에 생성하여 백 배의 위력을 내려했겠지만····
후우우웅ㅡ
이번에는 다르다· 매직 미사일의 회로와 신체를 결합하여 감응시켰다·
앞으로도 꾸준히 단련해나간다면 평균 이상의 마나 총량은 보유할 수 있게 되겠지·
그러나 총량 부분의 성장 효율은 낮다·
억지로 높이려면 높일 수는 있다만 그러한 방식의 성장을 결코 ‘최선’이라 칭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마나의 정순함만을 신경쓴다· 총량에 굳이 집착해야할 이유를 제거한다·
같은 양의 마나를 사용하되 위력은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그 회로를 개조시킨다·
이 매직 미사일의 개조는 그 방향성의 첫걸음이다·
파괴력과 관련된 회로에 치중한만큼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는 버려야한다·
나는 매직 미사일의 ‘형태’를 버렸다· 조형미 있던 구체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손을 떠난 무속성 원소가 2학년을 향해 쇄도한다·
“커헉!”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직격당한 2학년이 뒤로 넘어간다·
그들의 얼굴에 물감번지듯 퍼지는 당황감·
‘아주 괜찮은데· 마음에 드는군·’
매직 미사일의 개조는 성공적이다· 버릴 부분을 버리고 위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방식·
그 위력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이전 생에 굳이 채용하지 않았던 방식이기에 사용하면서 나름 재미도 쏠쏠했다·
“기습을 할땐 반격도 각오했어야지·”
방해요인을 제거하는 것 역시 훌륭한 전략이지· 2학년들을 향해 한 마디 해주었다·
“뭐 뭐야·”
“아니 반격을 하는데요? 교수님 저래도 돼요?”
2학년들의 수군거림에 레너드 교수는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너희는 그래도 되냐? 2학년이 1학년한테 반격당해도 돼?”
그 한 마디에 2학년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나는 방어막을 걷어내고 오로지 공격에만 남은 마나를 안배했다· 무속성의 구체 두어개가 몸 주변에 떠오른다·
“쟤···· 뭐야···?”
뒤에서 구경하는 녀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2학년들은 조용해졌다는거다·
빠악-!
“아 아얏!”
이번에는 손목을 맞은 2학년이 손을 붙잡고 주저앉는다·
이제 고작 두 명 쓰러졌을 뿐인데 나를 향해 쇄도하는 공격은 벌써 멎은채였다·
나는 여전히 걷고있다·
2학년들은 더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높낮이를 달리하는 벽따위는 애초에 그리 큰 제약이 아니니 달릴 이유가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건방지기 그지없던 2학년들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미 나와 눈을 마주치려 드는 녀석이 없었다·
◈
이후 평가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오늘 실습 평가는 여기까지 하겠다· 다들 고생했어·”
레너드 교수의 말에 훈련장이 원래의 정육면체 형태로 되돌아오고 2학년 학생들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들은 떠나는 와중 한 번씩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레너드 교수의 말이 이어진다·
“오늘 평가는 반영 비중이 크지는 않으니까 너무 상심하지마라· 애초에 스크롤도 없이 했잖아· 중요한건 이틀 뒤에 있는 탐험 과제다·”
탐험 과제·
그 말에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켰다·
레너드의 말마따나 탐험 과제는 중요하다· 성적에 반영하는 비중도 크기 때문에 다들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을 터·
“각자 조 전략에 알맞은 스크롤 준비 잘하고 컨디션 관리 잘하고· 뭐 기본적인거지? 오늘 강의는 여기서 종료다·”
교수가 먼저 훈련장을 떠나고 다른 학생들도 본인들의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트릭시가 미묘한 눈빛을 하고서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막 벌어진 그 순간·
“트릭시 강의 끝났는데 같이 차라도 한 잔 할래? 내가 분위기 좋은곳 알고 있거든·”
마틴 루크가 끼어들었다· 트릭시의 시선을 뒤쫓은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플란한테 볼 일 있어? 잘하긴 했는데···· 솔직히 2학년한테 반격하는거 나도 하려면 할 수 있었거든· 근데 난 참았던거지·”
“······하아·”
트릭시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내 긴 다리를 뻗어 훈련장 밖을 향해 걷는다·
“어 트릭시? 바빠? 그럼 오늘은 트리비아 코드만 교환하자!”
그 뒤를 마틴이 급하게 뒤쫓는다·
트릭시의 다리는 원체 길어서 키가 작은 마틴은 거의 뛰다시피하는 행색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추레해서 나도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면 베키는 그렇게 하는걸로 하고· 내 쪽에서 스크롤을····”
“응응· 그게 낫겠다·”
베키는 자신의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쁘다· 그러다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어 야· 플란····”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지만·
“그러고보니 베키 이 부분은 확인했어?”
“악·”
다른 조원이 보기좋게 베키의 팔을 붙잡았다·
나· 중· 에· 꼭· 얘· 기· 해·
베키가 나를 향해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러더니 영락없이 끌려가서 다시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발걸음을 떼었다·
마법을 어느 쪽으로 성장시킬 것인지 그 방향을 잡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자연스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아카데미 교정 내를 걸으며 나는 수면 직전까지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
아카데미 내부의 은행에 들러 금화를 환전하고 목욕을 마친 다음에는 마나 정화에 여력을 쏟을 생각이다·
그 후에도 여유 시간이 남는다면 지식을 탐독하는 것이 맞겠지· 식사를 어떻게 해야할지가 나름 난제다·
“아! 세상에! 플란! 플란 경!”
누군가의 부름에 상념이 깨어진다·
심지어 이 누군가는 나를 껴안으려했다· 당연히 몸을 비틀어 피해냈지만 경계심은 배로 키웠다·
누구지·
2학년? 실습 평가때 앙심을 품고 돌진해온건가?
기꺼이 전투라도 준비하려했던 그 순간·
내 품 안으로 무언가가 와락 안겨들었다· 무엇인지 채 파악하기도전에 향긋한 체향이 코끝을 찔렀다·
동시에 해맑은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세상에! 플란 경! 플란 경을 여기서 다 뵙습니다!”
······천사 비스무리한것이 내 품에 안겨있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