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이쪽도 마침 끝난 참인데·”
학생은 크레이그를 바라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 표정에는 여유가 만연하다· 벌로 청소를 하러 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모습이다·
그는 방금 자신이 보았던 풍경을 천천히 되짚었다·
수채화·
그가 펼치는 과정은 마법이라기보다는 한 폭의 수채화에 가까웠다·
다채롭고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형형색색을 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다·
그 다음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건 아름답다는 감상·
자신이 맡은 구역은 청소를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이라도 혹은 너는 청소가 끝났으면 가봐도 좋겠다는 말이라도 해주어야 할 텐데·
입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눈을 감았다·
이기적이지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 풍경을 잠시 되뇌고 싶었다·
◈
“어색하군·”
위화감이 크다· 다른 사람의 신체로 마법을 사용해보는 것은 처음이니 그렇겠지·
허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 부분은 있었다·
‘이전 세계와 마법의 골자가 같다·’
그동안 학습해온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염려했으나 그는 마법의 기본 골자가 같음을 인지했다·
머리에 남아있는 이론은 이 세계에서도 쓸 수 있다는거지·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 안도해도 될 듯 하다·
물론 아직 이 세계를 자세히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곳곳에서 생길 가능성도 있다·
···허나 그렇더라도 두렵지 않다·
이 육체에 들어있는 것은 카플란이니까· 변수가 생긴다면 새로이 증명할 뿐이다·
얼빠져있는 청소부를 뒤로하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화장실이 더없이 깨끗했으니 그는 굳이 나를 붙잡을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붙잡을 이유가 없는데·
“학생!”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표정에 놀라움이 가득한걸 보니 적어도 화가나서 붙잡은 것은 아니다·
“진짜 대단하네! 혹시 아고라 보드를 통째로 차지했다는게 학생이야?”
“아고라 보드?”
청소하던 손에 붙잡히는건 썩 유쾌한 감각이 아니다만 아고라 보드라는 단어가 내 관심을 모조리 끌어버렸다·
마법사들끼리 서로의 이론을 겨루는 칠판· 아고라 보드·
적혀있는 술식을 푼 자는 기존에 적혀있던 술식을 싸그리 지워버리고 자신의 술식을 아고라 보드에 적는 것이 가능하다·
서로의 이론을 증명하는 일종의 투기장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허나 그것은 마탑에만 있을 것인데· 이곳은 아카데미 아닌가·
“···학생이 아고라 보드를 손 댈 수가 있나?”
“학생이 손댈 수 있냐고?”
청소부가 고개를 기울인다·
“당연한 거 아니야? 학생만 손 댈 수 있잖아· 교수는 개입 못하고·”
“교수는 개입을 못해?”
“당연하지· 학생을 위해서 만들어진건데·”
이해했다·
이 세계의 아고라보드는 이름만 같지 사실상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위한 장치인 모양이다· 흥미로운데·
청소부는 머쓱한듯 머리를 긁는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닌가보구만· 하도 마법을 멋지게 막 쓰니까 학생이 그 소문의 주인공인가했지·”
“무슨 소문이지·”
“그야 당연히 익명으로 보드 전체를 채워버린 학생에 관해서··· 아니 그런데 학생이면서 청소하는 나보다도 몰라? 아무리 신입생이라도 그렇지·”
“그런 소문이 있는가·”
“그래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가서 시도해봐· 아고라 보드에서 화제성을 얻으면 그 뒤로 스카우팅도 엄청 온다더만· 그나저나 원래 그렇게 마법을 잘해?···”
마법에 관해서 의례적인 칭찬 몇 마디를 더 들어주고서 아고라 보드의 위치를 물은 후 나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때마다 아고라 보드를 생각했다·
이름을 밝히면 명예를 과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익명으로 그리했다는 점이 내 주의를 끈다·
문득 과거의 자신을 떠오른다·
익명으로 마탑에 난제의 답안 몇 개를 제출한 다음 뒤집어진 마탑의 반응을 즐겼었지·
그렇게 또 한 걸음· 아고라 보드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플란!”
누군가가 불러세운다· 처음보는 여교수였다·
◈
“개인 짐이라·”
여교수는 그에게 강의실에 두고간 짐이 있다며 가방을 건네주었다·
책 필기구 마법 도구 공통점이 있다면 그 모든게 낡아빠졌다·
학생인지 잡상인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새것처럼 빛나는 것은 학생증이었다·
그러고보면 청소부부터가 그를 신입생이라고 언급했었지· 실제로 이 아카데미에 입학한지는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메르헨 아카데미 1학년
아카데미와 학년따위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만·
플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면서도 또 명백히 다른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학생증까지 확인하자 새삼 남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확 체감된다·
‘이 몸으로 이제 살아야한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아니지만 받아들이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는 한동안 관자놀이를 짚고서 가만히 서있었다·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원래 세계에는 이런 명칭의 아카데미가 없었다·
마법은 똑같이 통용되지만 세계 자체는 미묘하게 다르단 말이지·
후우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카데미의 복도를 걷는다·
어차피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기에 아고라 보드쪽으로 향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법은 나의 숨쉬는 구멍이 되어주었으니·
걸으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아카데미의 정경은 언뜻 보기에 그가 알던 아카데미 같지만 또 다르다·
디자인은 묘하게 세련되어져있고 가끔 학생들 몇을 지나치다보면 그가 으레 보던 스타일들과는 거리가 좀 있다·
유행이 아예 뒤바뀐 느낌·
“흐음·”
여튼 아고라 보드앞에 도달했다·
건물 밖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은 언뜻 보면 작은 정문처럼 보인다· 그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크기 때문에 건물 안에는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튼 이 칠판에는 흰색으로 특정 마법의 술식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판서에 낭만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지·
등에 메고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둔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려는 찰나·
“포기하는게 좋을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초면부터 포기를 권한 여학생은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이쪽보다 작은 키지만 그 기백은 결코 작지 못하다·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그 윤기에 감탄할때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술식 학생이 아니라 교수가 적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넌 하루종일 붙잡아도 어차피 못 풀어·”
“너는 뭐지·”
“나? 베키·”
고작 이름을 묻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알 텐데·
소년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기자 베키가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오늘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여기 하루종일 있었어· 그런데 결국 못풀었어· 처음에 아주 살짝 접근했는데 그 뒤로는 못하겠더라·”
“그래보이는군·”
“···왜· 뭐· 그건 무슨 뜻인데· 나도 나름 대단하거든?”
어쨌든 본인은 포기했다는 소리 아닌가· 왜 이쪽도 포기하라고 이야기를 하는지·
다시 시선을 아고라 보드로 향했다·
굉장히 많은 술식의 선이 점이 원이· 다시는 풀지 못할 정도로 엉켜버린 매듭처럼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표정이 자연스레 구겨진다·
대단한 마법들은 오히려 이렇게 복잡하지 않다· 직관적이며 단순하다· 다만 요구하는 대가가 클 뿐이지·
그렇기에 아고라 보드에 적혀있는 이것의 의도는 명백하다·
최대한 어려워보이게하고 최대한 자신을 잘나보이게하고···
그러나 이는 그가 추구하는 ‘어려움’과는 다른 방향이다·
조금은 괘씸하다·
“거봐· 어렵지? 내가 어렵다고 했잖아·”
‘어렵다기보다는 귀찮군·’
생각 그대로다·
무식할 정도로 많은 술식을 때려박은 이것은 난이도가 어렵다기보다는 그저 악의적일 정도로 반복적인 계산을 요한다·
‘마력이 크게 소모되겠는데·’
사고를 가속하여 계산을 신속하게 해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원래 신체였다면 코웃음을 치면서 사용했을 양이라도 지금 깃든 소년의 신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화장실에서 조화 술식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위태로울 용량이니 말 다했다·
물론 앞으로는 이 또한 뜯어고칠 생각이다만·
어쨌든 마력의 보조 없이 이런 문제에 달려들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하다·
며칠이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답이 없네? 저기요· 충격받은거 그렇게 안 숨겨도 되거든?”
베키가 눈 앞에서 손을 몇 번 흔들어본다· 그제서야 시선과 생각이 그녀를 향했다·
생각해보니 굳이 본인의 마나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옆에 다른 마법사가 있지 않은가·
“베키·”
“응?”
“넌 어디까지 접근했지·”
“이게 그림이라는 것 정도? 술식 하나하나가 특정 위치를 가리키는 좌표이자 점이야· 전부 이으면 분명 그림이 되겠지·”
베키는 아무런 스스럼없이 자신이 눈치챈 것을 알려준다·
어차피 들려줘도 상대방이 못해낼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전부 잇지 않은 이유는·”
“이걸 언제 다 계산해? 그건 불가능에 가깝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느낀 감상과 일치한다· 일단 이 정도 기량이면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그녀가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근데··· 너 말투가 원래 그래?”
“꼭짓점·”
“응?”
“단 세 개의 점을 가지고 삼각형을 연상할 수 있듯· 각 꼭짓점에 해당하는 술식만 풀면 된다·”
베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야· 말이 쉽지· 그걸 어떻게 찾아?”
“이렇게하지·”
그는 여유로움이 가득찬 얼굴로 제안한다·
“내가 정확히 꼭짓점만을 찾아내면 계산은 네가 하는걸로·”
“꼭짓점만 찾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베키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무엇이 꼭짓점인지 알아내려면 결국 모든 점을 하나하나 살펴봐야하는거 아닌가?
척 보고 꼭짓점만을 짚어내는 것이 쉽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애초에 보드에 적힌 이 술식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지도 않았을 터·
“할지말지만 대답하면 된다·”
돌아오는 짧은 대답· 베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소년은 척 보기에 병약하다· 허나 베키는 그런 그가 약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과 억양 태도 곳곳에 담겨있는 확신을 온 몸으로 느낀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뭐· 네가 제대로 짚어낸다면 말이야·”
그러나 소년은 마음에 들었다는 듯 피식 웃는다·
“마음에 드는군·”
그가 마나를 분필의 형태로 엮어냈다·
그것이 칠판에 닿더니 이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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