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요정들은 대체로 잠이 없다· 따라서 늦은 밤에도 마법학부의 상점은 이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점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물품들을 취급하고 향수는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항목이다·
베키가 시향지 하나를 조심스레 내쪽으로 내밀었다·
“야 플란· 이거 어때?”
맡아보니 적당히 과하지 않은 향이다· 무난한 샌들우드 향· 대충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향수를 고르는 베키는 그 어느때보다도 신중해보였다· 이번에는 다른 시향지를 제 코 앞에 가져다댄다·
“이건···· 로즈향인가? 나이 들어보일까봐 좀 그러네· 제외·”
베키는 그렇게 한참을 시향하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플란· 뭐라고 말 좀 해봐· 어느쪽이 나아?”
“로즈·”
신체가 바뀌어도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는건가· 굳이 비교하자면 나는 로즈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어···· 그래?”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은 베키가 시향지들을 내려놓았다·
“음 로즈···· 이게 제일 싸긴 하네· 내가 가격을 안 보고 시향하고 있었네· 싼거 사지 뭐· 가격 고려 해야지····”
그리더니 대뜸 로즈 향수 세 개를 계산했다·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구매가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져서 다행이었다·
기숙사를 향해 걷는 길· 베키가 내게 자신의 트리비아를 내밀었다·
“코드· 교환하기로 했잖아·”
“그러지·”
우선 품 속으로 받아넣었다· 트리비아에 눈을 처박고 걷는 행위는 내가 용납을 못해서·
기숙사에 다 도착했을 때 즈음· 베키가 내게 물었다·
“맞다· 야 플란· 동아리는 생각해봤어?”
그러고보니 그랬지· ‘동아리’역시 현재 내가 신경써야 할 문제중 하나다·
일주일이나 되는 자유시간을 바이올렛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내준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 교수는 동아리 활동은 특권이나 다름없다며 일주일내로 동아리 가입을 의무적으로 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1학년의 경우 A등급 학생 한정으로 동아리 활동이 가능하니 특권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또한 법칙에도 옳다·
“아직 안 했다만·”
“동아리 출석이랑 활동 보고서 전부 성적에 반영한다고 하셨잖아· 슬슬 결정해야하지 않아?”
그랬었지· 성적과 직결되는 문제기에 적당히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직접 창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찾아보니 동아리 창설은 3학년은 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니···· 뭐 권유하는 건 아닌데· 내가 가입하려는 동아리 평판 꽤 좋아· 얼음도 생각보다 이쁘고····”
베키가 발끝으로 지면을 툭툭 찼다·
나는 바이올렛이 왜 굳이 동아리 활동을 시키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어차피 어느 동아리든 내겐 흥미가 없다· 직접 창설하여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더더욱·
······차라리 부리기 좋은 인물과 같은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수겠지·
“베키·”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베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네가 가입한다던 동아리· 명단에 내 이름도 올려놓도록·”
“헛 정말?! 플란 너도 가입하는거야?”
베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그녀를 뒤로했다·
그녀에게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던 30분이 전부 지났기 때문이다·
“야 플란! 당장 내일이야! 꼭 동아리 출석해야돼! 알았지!”
뒤에서 베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다음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아카데미 마탑 1층에 위치해있는 카페를 방문했다·
커피에 흥미가 있지는 않다· 다만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트리비아에 볼 일이 있었다·
처음 구상했던 것은 ‘위치추적’관련 개조였지만 당장 내 상황에 어울리는 개조를 하는 편이 옳겠지·
이 세계는 많은 변수를 가지고있다· 일례로 이번에 있었던 탐험 평가가 그러하다·
변수를 배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두는 것이 옳다· 내일을 기약할 수 있어야 증명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다면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변수들에게 내가 무엇을 활용하여 맞설 수 있는가· 답은 뻔했다·
‘아티팩트·’
아티팩트· 대륙 내의 마나가 뒤엉키며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신비한 물질·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 내부에서는 새로운 아티팩트가 끊임없이 재생성되고있다·
또한 그것이 지닌 성능에 따라 아티팩트의 가치는 쓰레기부터 성물(聖物)까지 다양한 등급으로 매겨진다·
아티팩트는 나를 온갖 변수로부터 훌륭하게 보호할 것이다·
경매에 나서서 아티팩트를 구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겠으나···· 현재로서는 금전이 모자라다·
언젠가 구경해보는 정도는 괜찮겠지·
나중에 한 번 쯤은 경매장에 방문할 것이다만 이번은 아니다· 트리비아를 개조해서 직접 찾으면 될 터·
우우웅ㅡ
자신만만하게 트리비아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곧바로 마나가 감응한다·
마탑과 트리비아 사이를 잇는 마나선이 내게는 느껴진다· 마력의 가지를 엮은 다음 그것을 정확히 역순으로 타고 올랐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마나가 역방향으로 솟구쳤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머릿속에 간섭의 술식을 그려낸다음 ‘활자’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트리비아에서 특정 활자만을 추려낼 수 있도록 개조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트리비아가 마나를 이용해서 활자를 입히는 방식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일정한 회로를 가진 마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마법사의 역할이자 본분이겠지·
정신을 집중 척수를 타고 올라오는 마나와 머리 속의 의식을 결합하여 융합한다· 요동치는 마나가 정수리부터 손끝까지 빠른 속도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트리비아의 마나 파장을 내 마나 파장과 동조시킨다· 동시에 시야가 점멸하며 온통 새하얀 세계로 들어섰다·
쏴아아ㅡ
활자들이 새까맣게 뭉쳐있는 해일이 몰려온다·
저 중에서 내가 원하는 단어만을 추려낼 것이다·
트리비아 시스템의 근원에 언령을 새긴다· 해일을 분쇄하며 ‘숨기다’ ‘감추다’ ‘은닉’···· 무언가를 감추는 것과 관련된 활자들만 추렸다·
이유는 단순하다·
수준 높은 아티팩트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결코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평범하게 보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숨기고 숨기고 또 숨기려하겠지· 어느 세계든 마찬가지이다·
트리비아의 개조에 오차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아닌 내가 계산한 것이니 스스로가 보증한다·
고민은 없다· 마나 전량을 단 번에 밀어넣는다·
ㅡㅡㅡ!
잠깐이지만 카페 내부의 무게가 일변했다·
나도 모르게 트리비아의 표지를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아귀에 핏기가 가실 정도였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 눈을 떴다·
다시 펼쳐본 트리비아에는 이미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나 성적표 숨겼어· 부모님이 알면 죽어·]
[*술식을 무작정 외우기만 하면 어떡해? 숨어있는 의미를 파악해야지·]
[*숨기지 말고 말해봐· 너 걔랑 잤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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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족스러운 마음에 미소지었다·
실패따위 염두하지 않았고 당연하다는 듯 성공했다·
트리비아 내부에서 무언가를 감추는 것과 관련된 대화가 오간다면 지금부터는 전부 확인이 가능하다·
남은 것은 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뿐이다· 나는 빠르게 눈을 움직였다·
[*오빠 나한테 숨기는거 없어?]
나름 머리를 굴렸는데도 불구하고 온통 시덥잖은 이야기들만 보인다·
그 뒤로도 목록들을 열심히 살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이렇게 하니까 무더기로 나왔었는데 여긴 또 다른가·
그렇게 트리비아를 덮으려던 찰나였다·
[*훔친 물건 어떻게 했어· 똑바로 숨겼어?]
시선을 확 잡아끄는 대화가 하나 있었다· 훔친 물건이라 곧바로 상세하게 살폈다·
[*티르 호수 밑바닥에 숨겨놨어· 이건 찾아내도 못꺼내는 수준이야·]
‘숨다’라는 단어가 활용되어야만 하기에 모든 대화를 엿볼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제대로 숨겼는지 한 번 더 확인해· 그거 애들 장난감 아니야· 까딱하면 다 죽어·]
그러나 조금 엿본것 만으로도 내 흥미를 발동시키기에는 이미 충분했다·
까딱하면 다 죽을 만한 물건이라· 재미있겠는데·
이미 주인이 정해진 아티팩트라면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대화 내용을 보아하니 본인들도 훔친 물건인 것이 분명했다·
어떤 물건인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우선 다음 목적지를 티르 호수로 정했다·
목적지도 정해졌으니 슬슬 트리비아를 덮으려는데 잔뜩 쌓여있는 연락이 눈에 띄었다·
[ ▶ 죄송해용 ]
[ ▶ 화나셨어용···? ]
[ ▶ 잘못했어용 ㅠㅅㅠ ]
[ ▶ 답장해주세용···· ]
[ ▶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용···· ]
[ ▶ 답장 한 번에 금화 10개씩 드릴게용 ! ]
[ ▶ 20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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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혀를 차고서 트리비아를 덮었다·
창부도 아니고 시덥잖은 대화에 어울려주는 것으로 금화를 받아낼 생각은 없다·
한 시간 뒤에는 얼음 원소 연구 동아리인 ‘프로즌’에 출석해야한다· 붕 떠버린 시간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좀 읽을 생각이다·
미리 눈도장을 찍어둔 책도 있다· 『연성 조화 폭발』·
계획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아~ 여기서 다 만나네! 플란 학생 맞으시죠!”
웬 모르는 여인이 내 건너편에 앉았다·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주황색의 머리카락과 주근깨· 묘하게 바이올렛을 닮은 말괄량이였다·
확실한 것은 그녀와 나는 초면이라는 것이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테이블 위로 명함 하나를 올렸다·
[ 세피아 위스퍼· 메르헨일보 마법부 부장· ]
명함과 세피아를 번갈아가면서 살폈다·
기자라는 사실이 신기한 것은 아니고 부장이라는게 신기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막내 기자인데 말이다·
“이번에 있었던 탐험 평가 말이에요· 마법 미궁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죠?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요~”
굳이 내게 물을 필요는 없는 사항이었다·
“다른 학생에게 가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부 거치고 오는 길이에요! 헤일리 학생은 기억이 없다고했고 베키 학생은 플란 학생에게 가보라고 이야기하던걸요?”
“저도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손을 붙잡으려 하길래 우선 피했다·
“오···· 반응이 엄청 빠르시네? 아니아니 이게 아니라! 저랑 이야기하는게 학생한테도 엄청 이득이에요!”
그녀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내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게다가 저 그쪽이 유디트 사람인 것도 안다구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가 유디트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있단 말이지·
나는 세피아를 향해 태연하게 되물었다·
“어쩌라는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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