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프로즌’
얼음 원소를 탐구하는 이 동아리는 메르헨 아카데미의 창립과 역사를 같이 할 정도로 유서가 깊다·
200개가 넘는 동아리들 사이에서 성과 보고서로 늘 10위권 내를 지킨다고 하니 베키가 큰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아카데미 뒤편에 있는 산에 모였다·
아카데미 내부에 여러 첨단시설이 있기는 해도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물을 얼려보는 것부터가 기초라나·
‘틀린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왕도적인 방식에 가깝다·
존재하지 않는 얼음 원소를 연성해내는 것은 매우 고차원적인 영역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물과 얼음을 다듬는 것부터 시작해나가는 편이 옳다·
“마지막으로···· 베키?”
동아리장의 호명에 저 멀리 있는 베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결원은 없네요· 다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동아리장인 케네스가 씩씩하게 말하자 박수가 쏟아진다· 3학년이자 프로즌의 동아리장인 남학생의 외모는 꽤 수려 했다·
마틴이 주둥아리를 열심히 놀려서 여자를 데리고 다닐 것 같은 얼굴이라면 이쪽은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일만한 얼굴이다·
“와···· 동아리장 오빠 너무 잘생겼다·”
“그러게 여자 친구 있을까? 아 당연히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다른 여학생들은 이미 케네스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로 타오르는 중이다·
그 정도로 잘생겼나?
잘생겼다·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러나 나는 케네스로부터 무엇인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기나 질투따위 하찮은 것이 아닌 미묘한 무언가를·
그때 아주 진한 장미향이 코끝을 찔렀다·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도대체 어떤 멍청이가 향수를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뿌렸단 말인가····
“야 플란· 진짜로 왔네···?”
그 원인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진한 향의 주인은 베키였다·
동아리 활동은 사복을 입는 것이 가능해서인지 베키는 사복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 모습이 다소 기이했다·
머리핀같은 치장이 과하고 화장이 진하고 향수 향도 진하고 치마 길이는 또 짧다·
굳이 따지자면 살면서 처음으로 꾸며본 여자애같았다·
“그 옷차림은 뭐지·”
“왜· 이 이상해? 우리 사복입고 처음 만나는 거잖아· 신경 썼어·”
뭐라고 대답해 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소란 피우지 마라·”
“아니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수준은 이미 아니었으니까·
“프로즌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원소 동아리입니다······ 얼음 원소 탐구도 하고 인기가 좋으면 아주 비싼값에 팔리기도 하니 여러면으로 이득이 되는······”
케네스는 친절한 사내였다· 프로즌을 향해 큰 애정이 담긴 그의 연설이 한동안 이어졌다·
별안간 베키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야 플란·”
“뭐지·”
“나한테···· 줄 거 있지 않아?”
내가 베키한테 줄 것이 있던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에게 줄 것은 딱히 없었다·
“없다만·”
“없기는 뭐가 없어! 잘 생각해 봐!”
“흠·”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게 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굳이 무언가를 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었다·
“베키·”
“응!”
베키가 나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기대해도 좋을 만한 내용이기는 했다·
“도서관 C 구역에 있는『파괴와 편견 』· 대여권을 양도할 테니 읽고 핵심만 추려라·”
“내가 미안· 잘못했어· 진짜 미안·”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서 추가로 물었다·
“베키·”
“응?”
“2주일 뒤에 있을 체전(體典)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체전? 나 자세히는 몰라· 전투 종목에서 1학년 대표는 루이스라는 거· 그거 하나만 알아·”
“루이스···· 헤일리가 졸졸 쫓아다니는 녀석 아닌가·”
“응응· 맞아· 안 그래도 헤일리가 동네방네 자랑하고다녀· 누가 보면 무슨 여자 친구인 줄 알겠다니까?”
잠시 턱을 문지르면서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체전 대표로는 내가 나가야겠는데·
“대표는 어떤 방식으로 선정했나·”
“역시 교수들 추천이지? 아마 만장일치로 루이스가 됐을 텐데·”
“대표가 교체되는 경우가 있는지 궁금하군·”
“음···· 출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쳤다든가 교수들을 설득했다든가· 뭐 그런 상황이 있다면 교체하겠지?”
“그럼 설득하는 걸로 하지·”
루이스를 출전 불가능한 상태로 패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베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뭘 설득해? 아 그런데 플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베키가 까치발을 들더니 신나서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늘 동아리 활동 2인 1조로 진행한대· 진짜 잘됐지? 너랑 나랑 같은 조해서 붙어다니면 딱 맞잖아·”
나중에는 아예 몸을 배배 꼬기까지했다·
“이러다 금방 소문나는 거 아닌가 몰라· 선배들도 다 있는 자리인데······ 헤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하루를 가장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계획은 이미 세워두었다·
“베키·”
“응!”
“이 동아리 안 내키는군· 가입은 취소다·”
“어···?”
“너도 저 동아리장은 가까이하지 마라·”
“아니 아니 아니 플란· 그게 무슨 소리야? 가입 취소라니···?”
말 그대로다·
동아리장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아서 꺼려진다·
단순히 취향만으로 좋다 싫다 할 수 있는 기호의 영역이 아니다· 불쾌한 골짜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느낌·
그게 이 동아리 가입을 취소하는 이유다·
‘차라리····’
내가 지금 서 있는 장소는 마침 티르 호수 근처다·
2주일 뒤에 있을 체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아티팩트를 좀 더 빠르게 손에 넣는 것이 훨씬 큰 이득일 터·
가입을 취소한 이상 동아리 활동에 더 얽매여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야···· 너무하잖아아····”
베키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는 꼴이 기이한 사복차림과 합쳐져 영 마음에 안 든다· 조수의 얼굴이 곧 나의 얼굴인 법인데····
안 되겠다· 이 옷차림은 직접 어떻게 좀 해야겠다·
“다음에 같이 옷이라도 사러 가지· 물론 네게 선택권은 없다·”
“헉 정말?!”
“네 하찮은 취향 역시 고려하지 않고 배제한다· 그리 알도록·”
“으 응·”
왜인지 기뻐보이는 그녀를 뒤로 했다·
뒤로 했다가 다시 한번 뒤돌아 한 마디만 더 덧붙였다·
“그리고 파괴와 편견· 요약하는 거 잊지 마라·”
◈
메르헨 아카데미는 학생들의 던전 출입을 막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다만 사건 발생 시 본인 책임이라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규정 중 하나다· 선택도 결과도 오롯이 본인의 몫이니·
[*호수 밑바닥에 처박아만 둘거야? 언제 찾을래?]
[*최대한 시간을 끌다 챙겨야지· 꼬리 안 밟히게·]
이름 모를 녀석들 사이에서 그러한 대화가 오갈 때쯤 나는 산기슭에 위치한 동굴 형식의 던전에 도착했다·
티르 호수는 이 던전의 끄트머리에 있다·
“······불쾌하군·”
그게 나의 첫 감상이다·
습도가 심각하게 높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왜 선정했는지 곧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결국 마나로 옷 겉면에 얇은 막을 둘렀다·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심각하게 거슬려서 어쩔 수 없었다·
문제가 또 하나 있었는데 던전 규모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크다·
‘우선은 위치만 기억해둘까·’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하여 최선의 수를 계산해내는 와중· 별안간 재킷 안주머니쪽에서 푸른빛이 발생했다·
트리비아의 알림은 분명 꺼두었을 텐데···· 그것을 안주머니로부터 꺼내 펼쳤다·
[ ▶ 동아리장 케네스야 ]
[ ▶ 코드 교환한 이후로 처음 연락하네 ]
[ ▶ 오늘 동아리 활동 세 시간 정도면 끝나거든 ]
[ ▶ 끝나고 잠깐 둘이서 대화할 수 있을까? ]
[ ▶ 엄청 중요한 이야기야· ]
“이건····”
내 트리비아가 아니다· 베키의 트리비아다·
그러고 보니 베키가 코드를 교환하자며 건네준 트리비아를 아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ㅡ나한테···· 줄 거 있지 않아?
베키의 말은 이런 의미였나· 그녀가 말했던 것이 트리비아라는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우선 트리비아를 덮었다· 남의 트리비아를 엿보는 것은 그다지 건전한 행위가 아니다· 던전을 나가는 즉시 돌려주어야지·
그래도 본의 아니게 좋은 정보를 손에 넣었다· 깊은 던전이라도 주어진 시간이 세 시간이라면 충분히 주파해볼 만하다·
몸 위로 떨어지려는 물방울들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나는 보다 깊숙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엑ㅡ!
그러다 코도모 마수 몇 마리가 나를 확인하고는 달려들었다· 머리는 도마뱀이지만 인간의 몸을 지닌 몰골이 꽤 징그럽다·
높은 습도를 굉장히 좋아하는 이 녀석들은 당연하게도 화염 내성이 거의 전무하다·
나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녀석들의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지만 그보다는 내 마법 사용이 더 빠르다·
화아악ㅡ!
손가락을 튕기자 녀석들은 별다른 비명도 없이 연소했다· 약한 강도의 화염으로도 죽어 버리기에 마나 소모가 크지도 않다·
애초에 물건을 숨긴 녀석들이 이 던전의 길을 한 번은 뚫어놓았다· 덕분에 나는 강한 적수를 마주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더 걷자 드디어 호수가 보였다·
아름다운 호수였다· 농밀한 마나를 머금은 호수가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빛나며 푸른색의 램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호수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장난하나·”
얕다· 호수가 굉장히 얕았다·
밑면이 훤히 보이는 깊이에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벌써 맨눈으로 붉은색의 상자 하나가 보인다·
이런 걸 숨겼다고 할 수 있을까·
질 낮은 물건이기에 이따위로 보관한 것은 아닐까· 녀석들은 일개 좀도둑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고서 손을 뻗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확인이라도 해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염동을 활용해서 상자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이 붉은 상자에는 간섭 마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간단한결계조차 쳐져 있지 않았다·
중요한 물건이면 이따위로 취급할 수가 없는데·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나는 상자를 콱 소리가 나게 지면에 꽂아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야·”
웬 어린 소녀의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서 붉은 상자를 살폈다· 틈이 벌어진 내부에는 흰 면장갑 하나가 들어 있었다·
“흐아암···· 뭐야 누구야· 어떤 놈이야···· 왜 가만히 자는 데 건드려····”
그리고 면장갑이 분명히 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영령(英靈) 아티팩트인가·”
왜 녀석들이 얕은 호수에 물건을 보관했는가 왜 어떠한결계 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는가 그러한 와중에도 왜 애지중지했는가····
그 모든 의문이 단번에 풀렸다· 영령 아티팩트라면 그럴 수 있다·
영령은 본인이 간택한 주인과 함께할 때 오로지 성능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아티팩트에 깃든 영령은 그 자체가 훌륭한결계의 역할을 해낸다· 이는 영령이 제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성질 탓이다·
이 면장갑을 평범한 장갑으로 사용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만지고 착용하고···· 그 모든 것이 쉽다·
그러나 이것을 ‘아티팩트’로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영령’이라는 결계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영령이느냐에 따라 보유한 능력 역시 천차만별· 어찌 되었건 간에 가치가 높은 물건임은 틀림없다·
“으응···? 뭐야 너도 나를 원하는 거야? 하아암····”
나는 면장갑을 집어 들어 살폈다· 아주 얇은 흰색의 면 내부에 무수히 많은 회로들이 엮어져 있었다·
장갑···· 아니 그녀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손 떼···· 나 불감증이야· 날 만족하게 해줄 주인을 찾는 건 진작에 포기했어· 그냥 평생 잠이나 잘래····”
그녀의 권태로움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이리저리 뒤엉킨 마나 회로의 난도가 상당하다· 아주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간택받기는 힘들 것이다·
이걸 훔친 녀석들도 겨우 운반책에 불과했을 것이 뻔하다· 본인들이 직접 다룰 수 없다 보니 우선 숨겨두고 처리를 고민했을 터·
나지막이 입술을 떼었다·
“이름 보유 능력 거쳐 간 주인 등을 내게 빠짐없이 고해라·”
“이제까지 날 만족시키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너도 그냥 포기해···· 아으으 졸려·”
“명령은 딱 두 번까지만이다·”
그러나 이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귀에 면장갑을 대어보니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잠든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군·”
영령 아티팩트의 효과가 아주 대단하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실제로 훌륭한 영령들은 평범한 마법사의 등위를 몇 단계씩이나 올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아티팩트에 깃든 영령일 뿐이다· 감히 도구 따위가 마법사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말인가·
“명령은 딱 두 번뿐이라고 했을 텐데·”
이 녀석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마법사를 절망시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를 마주쳤다는 점이다·
남은 마나의 전량을 쏟아부을 것이다·
나는 장갑을 손바닥위에 올렸다· 날카롭게 벼려진 마나가 기세 좋게 솟구치는 그 순간·
“······건방진 것·”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더없이 날카로운 마나를 검처럼 찔러넣었다·
“으 으에엑?”
곧바로 녀석이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만해! 거기 되게 미 미 민 민감한 부분이거든?”
계산은 완벽했고 오차는 없다·
이 녀석이 그토록 오만하게 이야기한 ‘불감증’을 분쇄할 심산이다·
“질문에나 대답해라·”
회로를 다정하게 읽어내는 ‘이해’따위가 아니다· 나는 날카로운 마나를 녀석의 회로에 마구잡이로 박아 넣었다·
“처 처음 만져지는 거란 말이야! 그 그만해! 뭐하는 거야!”
깊게 박아넣어진 마나 가닥을 하나하나 녀석의 회로에 휘감았다· 언제든 꽉 조일 수 있도록 호흡을 조절했다·
애달픈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마 말로해 우리· 느낌이 너무 이상해···· 이런 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단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도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대답·”
숨을 들이키고서 휘감긴 녀석의 회로를 있는 힘껏 조였다· 마나도 안 통할 정도로 꽉·
“햐 햐아아아앗?!”
날카로운 비명이 터지고 이 초 정도 지나서였을까·
“헤 헤라! 헤라예요! 제 이름입니다아아앗!”
이제야 좀 대화가 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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