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드디어 쪽지 시험의 결과가 나왔다·
무려 일주일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늦은 발표고 채점이 늦어진 것은 순전히 한 장의 대자보때문이었다·
[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교수 일동에 고함 ]
이 대자보가 바로 그것이다·
덕분에 강의가 일주일간 중단되었다· 마법 학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하아·”
베키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트리비아를 펼쳤다· 소녀에게는 다른 것이 걱정이었다·
[ ▷ 야 플란· ]
[ ▷ 대자보 네가 쓴 거지? ]
[ ▷ 답장 좀 해 줘· ]
[ ▷ 마법 학부가 일주일째 온통 난리야· ]
[ ▷ 네가 썼다는 거 들키면 어떻게 해? ]
[ ▷ 감당 돼? 나 걱정된단 말이야· ]
플란으로부터는 여전히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하다· 이 대자보는 플란이 작성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호외의 술식에는 최근 베키가 플란에게 요약해서 건네주었던 것들이 응용되어 있었다·
다른 요소들 역시 퍼즐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특유의 오만한 말투 자신감 넘치는 태도 유려한 술식 대자보를 아고라 보드에 붙일 생각하는 그 대담한 용기까지····
그래 어떻게 생각해도 플란이다·
그의 목표와 계획이 더없이 아득하다는 것 정도야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으로 알음알음 알았던 것일 뿐 결코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좋다· 싫다· 그따위 감정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저 플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키는 대자보의 술식을 통해 살폈던 풍경을 되짚었다·
눈앞에 펼쳐졌던 것은 겪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
소설보다도 소설같고 그 어떤 환상보다도 달콤했다· 마법사라면 으레 한 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세계가 눈앞에 어느 순간 펼쳐져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베키는 플란을 응원한다· 다만 너무 걱정이 될 뿐이다·
이것저것 되짚다 보니 어느덧 강의실 앞이었다·
A등급 학생들이 일주일 만에 모인 강의실 내부· 이곳은 아니나 다를까 혼돈의 도가니였다·
“어떻게 해? 괜히 너한테 피해 가는거 아니니?”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헤일리의 걱정 어린 음색이 귀에 꽂혔다·
헤일리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행들은 전부 루이스를 향해서 염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니야· 어떻게 되든 간에 최선 다해야지· 내가 대표라는 사실에는 변함없는 거잖아·”
루이스가 어깨를 으쓱이자 헤일리가 입술을 벙긋거린다·
“그 그래도 걱정되니까 그렇지···· 짜증 나 죽겠어· 카플란이 도대체 누구야?”
“카플란이라 이름이 플란이랑 비슷하네·”
“루이스· 그 애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 줄래? 걔 혼자 롤링페이퍼에 아무것도 안 적었어·”
헤일리가 진심으로 화난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루이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플란도 실력은 대단한 것 같은데· 쪽지 시험도 1등했잖아·”
“그건 교수님이 편애하는 게 분명해! 이번 쪽지 시험 점수만 봐도 그래 혼자만 다른 등급을 받은 게 말이 되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베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보면 루이스의 여자 친구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모든 이들이 베키처럼 플란의 술식에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상상이라는 말이 왜 있겠냐?”
저기 구석에서 일행들과 신나게 떠드는 마틴이 그 증거였다· 그는 불만이 굉장히 많은 듯했다·
“그렇잖냐·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상상으로 하는 거지· 이렇게 일 키우는 게 도대체 마법사한테 무슨 이득이 돼? 왜 굳이 기사 학부랑 갈등을 만드냐고·”
마틴의 이야기를 듣던 여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대표 선정 기준이 좀 이상했던 것도 사실이지 않아···? 순전히 교수님들 마음대로 뽑았던 거라며·”
“야· 그건 교수님 탓을 할 게 아니지· 애초에 마법 학부가 기사 학부를 상대로 이긴 게 몇 번이나 된다고 그러냐· 애초에 제대로 뽑아서 준비시켜도 못 이겨·”
“그런가? 그런 말은 최선을 다해 보고 나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마틴이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가 최선 다하면 뭘 할 수 있는데· 고유능력을 갖춘 기사 상대로 지는 게 태도의 문제냐?”
“일단 마틴 목소리 좀 낮춰· 루이스 듣겠어····”
그런데 그때였다· 뜬금없이 강의실 앞 문이 열렸다·
자연스레 모든 학생의 시선이 앞 문을 열고 나타난 사내를 향했다· 베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그리고 실제로도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신·
주름과 먼지 따위 하나도 없는 각 잡힌 아카데미 제복과 옆모습을 볼 때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콧대와 턱선·
플란·
베키가 목이 빠져라 찾았던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플란은 묵묵히 칠판으로 향한다· 쪽지 시험 결과를 확인하는 그의 행동에는 어떠한 빈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품’이라는 것을 인간으로 형상화 하면 그가 될 것이다· 표정 기백 걸음걸이 시선···· 그 모든 요소가 그러하다·
[ 플란 – A+ ]
[ 루이스 – A ]
[ 트릭시 – A ]
·
·
·
학생들 입에서 수없이 오르내리는 수재들이 A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의 성적 등급만 다른 채다·
대자보 이야기에 다들 정신이 팔려서 그렇지 원래라면 이것도 굉장히 화제가 되어야만 하는 주제임에 틀림없었다·
“···쯧·”
그러나 플란은 시시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제 성적을 확인했다는 의미로 옆에 서명했다·
염동을 활용해 서명하는 동작은 유려하고 서명의 필체 역시 유려하다· 베키는 잠시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이 씨 교수님인 줄 알았네·”
“쟤는 왜 강의실을 앞문으로 들어와?”
다른 학생들이 한 다섯 박자 늦게 불만을 표하고 베키도 그제야 정신을 차려서 플란에게 다가 갔다·
“야 플란!”
플란은 눈동자만 굴려서 베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걱정도 없다· 온 마법사들이 혼란스러워하는지금조차도 혼자만 다른 세계의 인물인 듯 태연자약했다·
“뭐지·”
“뭐지가 아니라···! 왜 내 연락 안 봐!”
“내가 그걸 의무적으로 봐야 하나·”
“아 아니····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
이쪽에서는 걱정되는 마음에 다급하게 물었을 뿐인데 대답이 퉁명스레 돌아오니 괜히 섭섭하다·
플란은 안주머니로부터 트리비아를 꺼내 펼쳤다·
그가 다시 트리비아를 덮는 순간 베키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역시 플란 네가 쓴 거지?”
“나 말고는 못하지·”
“걱정된다든가 불안하다든가· 그런 거 없어? 오늘 교수님들은 총장님까지 참여해서 회의한다잖아·”
“회의라·”
플란은 잠시 생각하더니·
“참 빨리도 하는군·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 말을 끝으로 플란은 뒤돌아섰다·
“어 야· 플란! 잠깐만!”
병아리라도 된 듯 베키가 그 뒤를 졸졸졸 쫓았다·
그러다 갑자기 플란이 멈춰 서는 바람에 베키는 플란의 등에 보기 좋게 코를 부딪쳤다·
“아얏!”
플란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감당 되냐는 질문에 대해서 말이다·”
돌아선 플란의 시선이 베키를 향했다·
“베키· 나는 아카데미에서 너와 가장 오래 있었다·”
“어 어? 갑자기?”
베키의 얼굴이 슬그머니 붉어졌다·
서로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일렁인다·
작열(灼熱)·
새빨갛게 타오르는 시선으로 베키를 내려다보며 플란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헌데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나·”
◈
마법 학부 회의실·
상석 하나를 중심으로 교수들이 빙 둘러앉은 이 공간에서는 현재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소환’ 계열 특화 교수· 브로디였다·
“나 진짜로 돌아버리겠네· 카플란이 뭐 하는 놈이야?”
브로디가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체전이 고작 일주일 남았는데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이 짧은 기간 동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브로디 교수·”
바이올렛이 담담한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간이 길었을 땐 뭐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요· 솔직히 마법 학부 교수들 아무것도 안 했잖아·”
“바이올렛 교수 다 모인 자리에서 지금 무슨 말을···!”
“제 말이 틀렸어요? 손 놓고 있었으면서·”
“아니 그게 손을 댈 수는 있는 일이야? 나도 교수이기 이전에 한 명의 마법사지만 깔끔하게 인정할 건 그냥 하자 좀!”
“뭘 인정해야 하는데요·”
“생각해봐· 뭐겠어? 고유 능력은 그냥 태생적으로 마법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어·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다르다고!”
브로디 교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보다 못했는지 다른 교수 몇 명이 브로디의 의견을 거들기 시작했다·
“바이올렛 교수· 그 열심히 하려는 마음은 우리도 이해해· 그런데 일주일 한다고 뭐 달라지겠어?”
“그래 우리는 그렇게 열정 넘치던 시절 없었겠냐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쓸데없는데에 힘 빼면 사람이 지쳐·”
입을 다물고 있는 다른 교수들도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바이올렛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그나마 오드리 교수 정도가 예외일까· 그녀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주변 눈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바이올렛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를 찌푸리면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전부 포기하고 체념한 상태로 있는 시간들이 낭비였던 거겠죠· 이번엔 뭐라도 해야 해·”
“바이올렛 교수!”
결국 브로디가 고함을 쳤다·
그때였다·
“다들 그만·”
총장 코네트의 목소리다· 교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겉면은 하얗지만 속면은 검다·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투톤 헤어를 흩날리며 코네트는 등장했다·
코네트는 한가운데에 위치한 상석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없는 동안 말씀 좀 나누셨는지요·”
브로디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총장님· 소환 계열의 브로디입니다·”
“브로디 교수· 말씀하시지요·”
“체전까지 고작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입니다· 이제 와서 무언가를 시도해 본다니요?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저희 입장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총장님의 생각도 저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브로디가 초조하게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코네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글쎄요···· 다른 의견을 가진 분은 없는지요·”
그러자 몇몇 교수들이 바이올렛에게 눈치를 주었다·
최대한눈을 날카롭게 뜨고서 절대로 입을 열지 말라는 듯한 경고를 시선에 담았다·
바이올렛은 그 경고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1학년 A등급 담당 바이올렛입니다·”
“예· 말씀하시지요·”
“철저하게 마련된 기준으로 지금이라도 대표를 선발해 보아야 한다· 그게 제 생각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교수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바이올렛의 몸을 궤뚫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지요·”
코네트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헌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바이올렛 교수·”
“아·”
“제가 궁금한 건 이겁니다· 체전이 일주일도 안 남은 이 시점에서 마법 학부가 무언가 해낼 수 있을는지요·”
바이올렛을 향해 회의장 안의 모든 시선이 꽂혀 있는 채였다· 그녀는 침을 한 번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기사 학부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체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법은 결코 하등한 것이 아닙니다· 이쪽에서도 체계를 확립해서 나선다면····”
“아뇨· 바이올렛 교수· 그게 아닙니다·”
코네트가 바이올렛의 말을 툭 잘라 냈다· 지켜보던 다른 교수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코네트가 내뱉은 다음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그대의 주관을 묻는 겁니다·”
“예···?”
“바이올렛 교수· 그대의 솔직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법사에게 일주일은 충분한 기간인지요?”
“그건····”
바이올렛은 주먹을 꾹 쥐었다·
아프다· 일 전에 손톱이 파고들었던 손바닥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또한 두렵다·
사실 다른 교수들의 생각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바이올렛이 별종에 가깝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실패하게 된다면 기사 학부는 더더욱 마법 학부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같은 마법사들의 멸시마저도 담담히 받아야 할 터·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총장님· 대자보는 읽어보셨습니까·”
자신도 놀랄 만큼 당당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바이올렛은 코네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물론 읽어보았지요·”
“저는 대자보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의견에 걸맞은 원석이 마법 학부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그러니 대표를 제대로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석을 발굴해낸다면 마법 학부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바이올렛은 떨지 않고 말을 매듭지었다·
회의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어느새 모든 교수들이 바이올렛을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이런·”
침묵을 깬 것은 코네트였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다른 교수님들에게는 유감이지만···· 저는 바이올렛 교수와 생각이 같습니다·”
교수들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코네트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회의장 안으로 흰 종이 뭉치가 비둘기떼처럼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일사불란하게 교수들의 눈앞으로 착지한다·
마법 학부 총장 코네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준은 제가 마련해온 참입니다· 마법 학부 대표 똑바로 선발해 오십시오·”
회의장이 충격에 휩싸였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코네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판을 더 키울지 말지는···· 직접 대표 학생을 보고 결정하지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