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
체전까지 앞으로 6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갑작스레 바이올렛의 호출을 받았다· 나만 받은 것은 아니고 A등급 학생 전부·
[ * A등급 학생들은 마탑 광장에 모일 것 ]
트리비아를 통해 전달된 공지는 다음과 같았다·
평소처럼 강의실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마법 학부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마탑의 1층에 우리는 집결했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돌연히 모습을 드러낸 바이올렛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모였겠죠· 하나 둘 셋···· 네· 결원은 없네·”
바이올렛이 학생들의 수를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변의 녀석들은 하나같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당연한 수순이다· 모이라는 말만 있었을 뿐 무엇을 위해 모이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마침내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마탑의 설비를 활용해 신체검사를 할 거예요·”
“와 드디어 해보네·”
“나 진짜로 해보고 싶었는데!”
바이올렛의 말에 여기저기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 세계에서는 신체검사가 진귀한 행위인가·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문득 코튼 향이 느껴졌다·
“플란 경! 플란 경!”
유시아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당연히 피했다·
“어라?”
허공을 끌어안은 채로 잠시 멍하니 있던 유시아는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며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플란 경!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유시아로부터는 이번에도 역시 모종의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만 유독 이상하리만치 너그럽다·
···이유를 빨리 찾아야 할 텐데·
“마탑에서 신체검사라니!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플란 경!”
“도대체 어떤 점이·”
이 점 역시 경이롭다· 원래라면 ‘두근거리지 않으니 그 시끄러운 입 좀 다물어라’따위의 말을 했을 텐데·
유시아는 두 주먹을 꼭 쥐고서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마탑의 설비는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마법사로서 자질 계열 적성 마나 흐름도 속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검지 끝으로 마탑의 저 위편을 가리켰다·
“마탑에서 신체검사를 한다는 건 마탑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가·”
나는 유시아의 호기심이 그저 신기하다· 또한 3 황녀인 유시아가 하는 말이라서 말이 이중적으로 들린다·
마탑의 호텔의 설비가 황실의 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인지 서민적인 체험이 신기하다는 것인지····
나는 솔직히 검사도 호텔도 일말의 기대조차 안 생긴다· 애초에 이 세계의 마탑은 이전 세계의 것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다·
유시아는 여전히 방방 뛰었다·
“물론입니다! 플란 경이랑 같은 방을 쓸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저 기대되어서 이런 것도 챙겨왔습니다!”
유시아가 배낭으로부터 무언가를 꺼낸다·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였다·
[ 야광 퍼즐 ]
겉면에는 고작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플란 경! 이거 불 끄고 하면 정말 재밌습니다! 딱 들어맞게 끼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나와 유시아 사이의 틈을 거칠게 비집고서 섰다·
“부 불 끄고 뭘 끼운다는 거야? 그리고 미안한데 여자랑 남자랑 방 구분해서 배정받거든?”
베키였다· 그녀는 나와 유시아 사이에 샌드위치의 속 재료처럼 꽉 끼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버텼다·
“아 베키 양! 반갑습니다!”
유시아가 손을 내밀었지만 베키가 모른체했다·
“난 별로·”
“예? 저희 친구 아닙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네가 방금 우정을 파괴했어·”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웬 참새 두 마리가 떠드는 것 같다· 막 미간을 좁히려고 했을 때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따라서 오늘은 마탑 내부의 호텔에서 취침할 거고 내일 오전에는 평가가 있을 예정이에요·”
근처의 밝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암울해진다· 고작 ‘평가’라는 두 글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평가를 본다고? 나 쪽지 시험 망해서 무조건 평가는 잘해야 하는데····”
베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비단 그녀만이 절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전체적으로 표정이 비슷했다·
바이올렛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참고로 절대평가에요· 어때 갑자기 한숨 안 나오지·”
바이올렛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발언 직후 학생들의 한숨 소리가 귀신같이 사라졌으니까·
“다음 주에 있을 체전· 1학년 전투 종목 대표를 다시 선발합니다·”
바이올렛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베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표로 선정되는 학생에게는 따로 특혜도 있고요·”
“특혜?”
유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중얼거림이 바이올렛에게도 들렸나보다·
“네· 특혜요· 여러 가지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마법 발표회 추천서에···· 뭐 이건 대표 학생에게 차차 알려주는 것으로 하고· 또 질문 있는 사람·”
“바이올렛 교수님·”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헤일리였다·
“전투 종목 1학년 대표는 루이스로 이미 정해진 거 아니었나요? 왜 다시 선발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가서요·”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교수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참 부끄럽지만····”
바이올렛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법 학부가 그동안 체전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죠·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을 거예요· 앞으로는 안 부끄럽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의 입으로부터 내가 기다렸던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조금의 흡족함을 느꼈다·
‘그래도 정신은 깨어있는가·’
회의 결과 마법 학부는 체전에서 손 뗀다· 이따위 결과를 입으로 내뱉었더라면 진지하게 아카데미를 떠났을 것이다·
헤일리는 여전히 어딘가 모르게 다급해 보였다·
“그럼 어떤 기준으로 다시 선발····”
“설명하려던 참이었어요· 다들 집중·”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넓은 마나 막이 펼쳐지며 칠판의 역할을 대신했다·
“무려 24가지의 종목이 존재하는 체전은 경기 당일에 각 진영의 대표가 공개되는 게 기본이죠· 그런데·”
교수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그러자 칠판 위로 여기사의 얼굴이 하나 떠오른다·
“기사 학부에서 1학년 전투 종목 대표를 미리 공개했어요· 우리한테는 도무지 질 자신이 없다는 거지·”
검은 단발머리와 검은 눈동자·
나는 당연히 그녀를 모른다· 그런데 나 빼고는 다들 아는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크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반 로즈···?”
“안 믿었었는데 진짜로 아이반이잖아 미친·”
의외로 유시아도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유시아 너는 저 여기사를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유시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황실 기사단 사이에서도 몇 번 고유 능력이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불세출 초신성···· 뭐 그런 수식어가 붙은 채로 말입니다·”
“고유 능력을 설명해라· 듣도록 하지·”
“섬광(閃光)입니다! 민첩함이 그 이름값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교수 말대로 도무지 질 자신이 없다 이거로군·”
황실 기사단에서도 언급이 될 정도라면 저게 결코 허세만은 아닐 것이다· 뒷받침할만한 능력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쪽도 질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섬광의 고유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로 빠르려나· 인간을 향해서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바이올렛은 설명을 이어간다·
“대표가 공개됐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교수의 질문과 함께 칠판에는 팔각형이 그려졌다·
“어떻게 하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 방법을 찾아야죠· 여러분이 기사 학부 대표를 상대로 어떤 상성을 지녔는지를 총 8가지 기준으로 정밀 측정할 거예요·”
바이올렛의 말대로였다· 팔각형의 각 끝 모서리에는 시야 저항 명중 집중···· 총 8가지의 기준이 적혀있었다·
···노력한 점이 돋보이지만 양에 차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합격을 줄 수 있는 정도·
“당연히 아이반 학생과 크게 역상성을 지녔을수록 받는 점수도 높다는 거· 최대한 상성을 이용할 거예요·”
그래 이런 점 때문에 양에 차지를 않는다·
이따위 방식으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 내게는 상당히 치졸하게 느껴진다· 바꾸어 말해 마법사답지 못하다·
“다들 명심하세요 지금의 우리는 이기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는 거·”
“저기 교수님·”
헤일리가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헤일리 학생· 이야기하세요·”
“경기 당일까지 이제 6일도 남지 않았고 무엇보다 대표도 이미 루이스로 정해져 있었는데····”
“네·”
“그냥 루이스로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괜히 더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살짝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헤일리 학생·”
“네· 교수님·”
“루이스가 자격이 있으면 어련히 선발되지 않을까?”
“····”
헤일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바이올렛의 시선이 이번에는 루이스를 향했다·
“루이스 학생은 어때요· 불만이야? 새로 만들어진 기준으로 대표를 다시 선발하는 거·”
“불만 없습니다· 저도 이편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루이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네요· 헤일리 학생·”
“···죄송합니다·”
헤일리는 어딘가 불만이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바이올렛 역시 헤일리의 질문을 받은 이후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내가 혹시나 해서 지금 물어보는데·”
교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다른 학생들도 헤일리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괜히 혼란만 커질 것 같다거나 대표를 왜 다시 뽑는지 모르겠다거나·”
주변 학생들이 숨소리조차 줄이기 시작했다·
느껴진다·
지금의 바이올렛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나 있다· 적어도 우리 앞에서 보여주었던 모습 중에서는 제일·
“아니면 뭐 이런 생각인가? 어차피 검사해도 루이스가 또 뽑힐 게 뻔해? 그래서 별로 의욕이 안 생겨? 그런 학생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가는 거 안 말리니까·”
학생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헤일리는 완전히 난처해져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한 번 더 강조했다·
“모든 변화가 귀찮고 그냥 순응하고만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근데 나는 그런 학생 안 가르쳐· 겁먹지 말고 손 들어봐요· 그냥 B등급 주고 돌려보내게·”
그녀의 분노가 나는 조금 기특하다·
바이올렛은 뼛속까지 마법사다· 현실에 저항하며 정상에 마법사의 긍지를 올려놓으려는 필사의 노력· 필사의 의지·
그러한 것들이 옳다고 그녀는 흔들림 없이 믿고 있다·
그러나 아직 방법이 미숙하다·
제자 중에서도 저런 부류의 녀석이 있었다· 능력은 다소 미흡하지만 불타오르는 의지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바이올렛같은 그런 녀석이·
그 녀석도 결국에는 한 자리 하는 마법사가 되었다·
내 조언 덕분에·
내가 결국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바이올렛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맞부딪친다·
교수가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떼었다·
“플란 학생뿐이야? 또 손 들어봐요 눈치 보지 말고· 그리고 플란 학생은 기숙사로 돌아가·”
“···이렇기에·”
기특한 마법사에게는 조언을 해주어야겠지·
말문을 연 나는 다음 말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마법사는 늘 패배하고 다니는 겁니다·”
주변이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바이올렛의 표정 역시 일순간 멍청해졌다·
“진흙탕 싸움 끝에 겨우 승리하는 정도로 도대체 무엇이 바뀝니까·”
모두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바이올렛을 향해 말을 잇는다·
“치사한 마법사· 옹졸한 마법사· 실력으로는 도무지 승리할 자신이 없고 결국 편법으로 승리했다· 이따위 말이 쏟아질 겁니다· 심지어 틀린 말도 아닙니다·”
“플란 학생· 기사 학부를 이길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나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예· 이럴 바에는 모색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바이올렛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마디 덧붙였다·
“압승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바뀝니다·”
압도(壓倒)·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승리는 절대 평범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한 힘과 재주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눌러야만 비로소 변화는 찾아온다·
“압승···?”
바이올렛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이반의 고유 능력이 섬광이라 들었습니다·”
여러 합을 겨루는 것은 서로의 실력이 비슷함을 뜻한다· 한 합을 추가로 겨룰 때마다 압도와는 멀어지는 것이다·
“섬광보다 빠른 속도로 마법을 발현하고 그 일격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해낼 것· 제가 생각하는 대표의 조건입니다·”
바이올렛은 뒤늦게 내 뜻을 깨닫고 되물었다·
“···더없이 이상적인 이야기네요· 하지만 말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다는 걸 알아야죠·”
“교수님·”
그녀를 불렀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서서히 끓어오른다· 내가 평생토록 좇는 삶의 동기·
“평가하시면 됩니다·”
혁신성 성취욕 그리고····
증명·
“저는 대표가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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