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노란색으로 단 한 개의 밑줄을 그은 뒤 소년은 이렇다 할 행동이 없었다·
‘잘난 척하더니 결국 허세였나?’
그렇게 생각한순간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가소로운 것을 향한 비웃음에 가깝다· 아고라 보드에 적혀 있는 술식을 향해서 ‘감히 네따위가’라고 소리 없이 말하는 듯하다·
‘응?’
베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칠판 위로 탁 탁 탁 두드리는 분필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에 불쾌함 따위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오히려 눈앞의 상대를 상대하는 일에 더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내 그의 손목이 크게 움직이며 또 하나의 밑줄을 긋는다· 도구의 보조를 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어내는 궤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직선이었다·
이제 밑 줄은 두 개· 플란이 중얼거렸다·
“첫 번째 술식의 값은 아직인가·”
소녀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오로지 꼭짓점만을 찾아주겠다는 소년의 말을 광경에 홀려 벌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의문이 든다· 아무리 꼭짓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하더라도 각기 하나를 계산하는 데에는 큰 집중력과 마나를 요한다·
이게 만약 헛다리라면 어떡할 건데·
그러나 술식에 슬그머니 손을 대자마자 베키는 의심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거··· 꼭짓점이 맞겠는데·’
마법사란 무릇 진리를 추구하는 길 속에서 직관을 더하는 존재·
계산을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도 그녀는 자기 직관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찾던 수맥을 찾아낸 것처럼 악의적이고 기분 더러운 술식들 속에서 이것만은 친절하다·
온 부분 부분이 자신이 핵심 구성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베키는 곧바로 종이를 허공에 펼쳐두고 적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꼭짓점이다· 어쩌면 정말 정답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심장이 뛴다·
“무수히 많아 보이는 이 술식은 막상 추려보면 64가지밖에 되지 않는다·”
“64가지···”
64가지면 말도 안 되게 많은 거 아닌가· 베키는 그 말을 조용히 삼켰다·
아무튼· 첫 번째 술식의 도출값은 A1였다·
빠르게 다음 술식을 풀어나간다·
그러나 역시 쉽지만은 않다· 워낙 긴 계산을 요하다 보니 중간에 하나만 틀려도 처음부터 해야 하고 집중력은 금세 바닥났다·
그래도 어찌저찌 그 뒤로 무려 세 개를 더 계산해낸다 A8 H1 H8·
“아!”
베키가 탄성을 내질렀다· A1 A8 H1 H8이라면 너무나도 익숙하다·
“이거 사각형이네! 가로로 여덟칸 세로로 여덟칸! 체스판처럼!”
그래서 총 64가지의 술식이 존재한다고 했었구나· 가로로 여덟 세로로 여덟이면 64가지의 좌표가 존재할 테니까·
베키는 마냥 뿌듯해하는데 플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거기까지 이해한 건 잘했다만 당연히 거기서 끝이 아니다·”
“뭐? 그럼?”
“이제야 캔버스 크기를 가늠했을 뿐이지· 그림을 알아내는 건 지금부터야·”
“아··· 그런 거야···”
자신만만하게 제안을 받아들인 베키였으나 사실 4개를 계산해낸 지금 그녀는 벌써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쟤는 힘들지도 않나?’
베키는 어느샌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쳐내는 데 플란은 태연하게 턱을 붙잡고 있었다·
이 과정이 힘들다거나 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또 한 번 그가 밑줄을 긋는다·
어쩌겠어 해야지· 베키가 속으로 비명을 삼키면서 다음 계산에 나섰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정도로 둘은 각자 맡은 일에 열중한다·
D4 D6 C3 E3 B4 F4···
이이번에야말로 베키가 분필을 내려놓는다·
“정답!”
플란이 슬그머니 소녀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녀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이거 스페이드 모양이야· 확실히 꼭짓점만 쏙 쏙 골라서 계산하니까 편하네·”
승리의 기지개를 쭈욱 펴는데 뜻밖에 돌아오는 반응이 냉담하다·
소년은 분필로 칠판을 툭 툭 쳤다·
“그걸 이제야 알았나· 마저 계산하도록·”
“스페이드가 정답이라는걸 알았는데 더 계산한다고?”
“일단 해라·”
베키가 불만을 웅얼거리면서 마지못해 새로운 술식을 계산하려 했다·
그러고는 보기 좋게 턱 막힌다·
“저기· 야·”
“뭐지·”
하도 당당하게 대답이 돌아오니까 하려던 말이 끊긴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허나 베키는 위화감을 크게 느꼈다·
지금까지 받아왔던 좌표들은 온 직관이 반응하며 주요 핵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받은 좌표에는 전혀 그러한 것이 없었다·
누가 봐도 함정처럼 느껴지는 술식· 아주 엉뚱한 장소· 손대보니까 그렇게만 느껴지는데·
계속해서 풀까말까 하다가 결국 소신을 내어 물었다·
“이번 것도 제대로 짚은 거 맞아?”
“정답은 아니지만 내 의도대로 훌륭하게 짚었다·”
잘못 짚었다는 소리잖아 그거·
그런데도 불구하고 플란은 자신만만하게 밑줄을 하나 더 그었다·
시선으로 쫓아보니 이번 것도 함정처럼 느껴지는 술식이다·
“네 의도대로?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데···?”
문제는 출제자의 의도대로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소년으로부터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는 을의 느낌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인 스페이드 그림만 고작 돌려주는 건 성에 안 차지· 우리가 하수인도 아니고·”
“뭐··· 그럼 정답 말고 또 뭘 주려는 건데?”
그러자 플란이 피식 웃는다·
“우리 쪽에서 역으로 문제를 돌려 줘야지· 출제자가 풀도록·”
“돌려 준걸 풀면 뭐가 나오는데?”
“정확하게 상하반전 시켜둔 그림· 하트·”
“상하반전··· 아니 그림을 뒤집어놓겠다고?”
“그렇지·”
남들이 정답을 고민할 때 소년은 그다음 차원을 고민하고 있었다· ‘정답’따위는 애초에 이미 너무나도 당연한 전제였다·
“왜 그렇게 하는데? 그건 어쨌든 오답이야· 남들은 우리가 문제를 풀었다는 것도 모르는 거잖아·”
“그게 재밌는 거지·”
돌아오는 짧은 대답· 소년이 말을 잇는다·
“남들은 다 모르고 이 출제자만이 아는 거다· 다른 누군가한테 자기 문제가 완벽히 간파당했다는 사실을·”
베키는 확신했다· 이 녀석 보통은 아니구나·
동시에 제정신도 아니구나·
‘하지만··· 재밌을 것 같은데?’
하지만 속에서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마음은 다소 반항적이고 발칙했다·
살아오면서 플란처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문제가 주어지면 끙끙대면서 풀어내고 칭찬받을 생각만 했지 역으로 돌려 준다는 발상을 해 본 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같은 신입생이 맞나· 병약한 후배처럼 보였던 첫인상이 머릿속에서 온데간데없이 지워진다·
탁탁 그가 분필로 새로 그은 밑줄을 가리킨다·
“도출된 값은·”
“기 기다려· 하고 있으니까·”
베키를 향해서 술식이 연달아 쏟아진다·
새로 풀게 되는 술식들은 훨씬 어려운 난이도였다·
당연하다· 그림을 뒤집기 위해서 원래라면 함정인 좌표들의 술식들만을 풀어내고 있으니·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베키는 계산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나이는 동갑· 그렇다면 그의 재능이 천부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누가 베키를 이토록 숨 막히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 삶을 살아오며 마법사의 길을 부던히 쫓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베키였다·
그래서 메르헨 아카데미에 원서를 넣었을 때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합격했다·
그뿐인가 심지어 신입생 환영회때는 그녀를 알아보는 학생도 몇몇 있었다·
‘얘는··· 신입생 환영회때 봤던 기억도 없는데?’
베키가 얼떨떨한 눈동자로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년이 이번만큼은 칠판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조금은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 이렇게 느리지·”
◈
“흐아아아아아···”
하늘에 달이 걸릴 때쯤이 되어서야 계산을 마친 베키가 바닥에 대자로 눕는다·
문제의 정답은 예상대로 스페이드 모양이었고 플란은 그것을 교묘하게 뒤집은 다음 자루를 분리해 하트 모양으로 바꿔 버렸다·
그 답안은 문제 형식의 메모로 작성해서 한구석에 붙여두었다· 출제자는 살펴보겠지 뭐·
만약 계획대로라면 거의 농락하는 수준· 솔직히 조금 즐거웠다고 하면 인성이 나쁜 걸까?
“후하하···”
그런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재밌었다·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마음에 드는가·”
소년이 묻는다·
그런 것도 질문이라고· 베키는 드러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히 자력으로 문제에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성취감이 어마어마했다·
“야· 너· 그···”
베키는 그제야 소년의 상의를 살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명함에는 ‘플란’이라고 적혀 있었다·
“플란· 이름으로 그냥 편하게 불러도 돼?”
“알아서 해라· 어차피 이제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
“마주칠 일이 왜 없어? 아카데미 계속 다닐 거 아니야?”
“글쎄· 이제 흥미가 사라져서·”
소녀는 드러누워 있던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깐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벌써 어디 스카우트 된 건가?’
하긴 방금 본 것만 하더라도 그가 스카웃 제안을 받고다니는 것이 딱히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뭐·
앞으로 아카데미를 계속 같이 다닌다면 친구로 해 두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다·
바닥에 놓여 있는 가방을 집어 들어서 소년에게 내밀었다·
“그럼 뭐 이제집에 가는 거야?”
“집···”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설령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지낼 곳은 있어야지· 시각은 어느덧 밤이었다·
이 육체는 피로 회복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다· 잘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가서 좀 자야겠는데·
그러다 문득·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집에 안 가는 거지·”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 나잇대의 여자애들은 통금 시간을 기본으로 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나? 나··· 나는 괜찮아· 아직 안 들어가도 돼·”
대답을 얼버무리는 베키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좀 데려다주도록·”
◈
베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생증에 주소가 떡하니 나와 있는데 왜 못 가겠다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모르니까·”
“아니 그러니까· 복잡한 술식도 다 아는 애가 왜 집은 모르는 건데·”
투덜거리면서도 요구에 응해준 베키였다·
집을 데려다달라는 그 말에서 사심이나 흑심이 느껴졌더라면 칼 같이 거절했을 텐데 얘는 진짜로 집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집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이쪽 일대를 아예 모르는 것 같다· 여기저기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왔으니까 좀만··· 아니 근데 내가 이런 말을 집주인한테 듣는 게 맞나? 네가 더 잘 알아야지·”
“모른다·”
“진짜 어이가 없··· 헐·”
주소와 주변을 번갈아 쳐다 보면서 걷던 베키는 저도 모르게 팔을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조그만 입을 뻐끔거린다·
“플란 너··· 여기 살아?”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주 거대한 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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