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의문 어린 시선들이 나를 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안겨 있었으니·
이 세계에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코튼 향을 풍기는 유시아였고 두 번째가 바로 지금· 취기에 몸조차 못 가누는 트릭시였다·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그럴 수 있어? 관심은 이쪽이 훨씬 더 많은 데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또 귀찮았다·
나는 새삼 트릭시의 모습을 살폈다·
딱 달라붙는 제복의 윤곽은 그녀의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고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는 초점이 풀린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여인이 꼬이면 반드시 귀찮다· 매력적인 여인 자체도 귀찮지만 못난 추종자들은 더하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서 좋을 게 없다는 말이다·
“야 플란· 너 트릭시랑 뭐 있어···?”
“그러게· 트릭시도 우선은 진정해·”
베키와 루이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시아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
“트릭시 양~ 야광 퍼즐 안 끼워줘서 삐진겁니까?”
루이스가 조용히 유시아의 입을 가렸다·
나는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되짚기 시작했다·
[ ▶ 그럼 플란부터 이기고 와라· ]
·
[ ▶ 내 제자일 뿐이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트릭시에게 답장으로 보냈던 연락 몇 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스스로 제자를 자청한 이유는 단순했다·
온종일 연락해 오는 트릭시가 귀찮았고 동시에 스카우터라는 오해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트릭시의 학구열만큼은 인정한다·
따라서 그녀를 실제로 만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방식을 골몰했고 그게 이 방식이었을 뿐인데·
“내가 더 잘할 수 있어어! 내가 더 잘할 거야!”
···내가 생각했던 것 훨씬 이상으로 트릭시는 가르침 경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당장 만취한 채로 달려올 줄이야· 어쩌면 내가 그녀의 학구열을 낮잡아 봤는지도 모르겠다·
인간· 그중에서도 여자는 역시 알 수 없는 생물임을 새삼 느낀다·
주변을 살폈다·
루이스 베키 유시아···· 셋 모두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물음표를 다섯 개씩은 띄우고 있었다
“루이스· 조언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응? 아 그래· 이쪽은 신경 쓰지마·”
루이스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마탑 내부로 들어가고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트릭시의 재능은 결코 나쁘지 않다· 자질 역시 충분하다·
다만 그녀의 재능이 개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날씨가 필요할 것이다·
꽃도 피어나는 계절을 가리니 말이다·
“트릭시·”
고민을 마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는 행동이 고작 이따위인가·”
◈
트릭시는 애꿎은 발 끝만 쳐다보았다·
취기로 인해서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 충동성을 이겨 내지 못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인정할 수가 없어· 없다고·”
다만 인정할 수가 없었다·
프리티아의 취기가 트릭시의 감정을 북받쳐 오르게 만들었다·
가문의 이름만으로도 다른 마법사들을 전율하게 만드는 ‘프리츠’· 그리고 그 가문의 장녀인 자기 자신·
대마법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머니가 돌연히 죽어 버린 그날·
트릭시는 가벼운 바람에도 무릎을 꿇었고 몸을 짓누르는 빗발이 유난히 무거웠던 그 식장에서 트릭시는 천재가 되리라 다짐했다·
실제로도 그리 살아왔다 나름 자부한다·
천재· 천재· 천재···· 그녀의 귓가에서는 그러한 소리가 떠나질 않았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인정하기가 싫었다·
트릭시보다도 더 천재의 길을 걷는 듯한 플란의 행보가 이런 트릭시를 방관하는가르침 씨가····
그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질 않고 이해하기도 싫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사실 트릭시는 천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동안 트릭시는 어떤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도록 인정하기 싫지만 천재는 따로 있고· 그 천재가 현재 트릭시를 외면하는 상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무엇을 인정하기 어렵나·”
더없이 서늘한 음색· 술기운이 조금 달아날 정도다·
트릭시는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인정하기 어려운 것· 그건 단 하나다·
“나는····”
“너는?”
주먹을 꽉 쥐고서 폐부를 쥐어짜내듯 말을 뱉는다·
“천재야· 그래야만 해· 그런데 왜 가르침씨는 네 연락만 받아주는 건데· 왜 너만 가르쳐 주는 건데·”
“천재라·”
플란이 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찼다·
“너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
그 말에 트릭시는 고개를 짓쳐 들었다·
플란이 더없이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가르침씨 덕분에 저렇게 되었으면서 트릭시보다 위에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네가···· 그런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말을 잇는다·
“가르침 씨만 아니었으면····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그분이 나를 바라봐줬다면 대표도 내가 될 수 있었어·”
“트릭시·”
플란의 목소리는 더없이 서늘하다·
“애초에 마법사는 맞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
천둥 같은 대답이 트릭시의 귓전을 때렸다·
허공에서 둘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트릭시의 것과 정반대의 색을 가진 그 붉은 눈동자에는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홀로 걷는 것이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다·”
그 말이 날 끝처럼 따가웠다·
“또한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도 안 되지·”
한 글자 한 글자가 아렸다·
“천재가 아니라 마법사를 목표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듣는 것은 처음이다·
“너는 천재를 연기하는 바보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트릭시와 같은 학생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가 내뱉는 말 중 무엇 하나 틀리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행동들에 뭐가 남지· 네 생각에는 고작 그게 천재인가·”
어지럽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그는 네게 제법 흥미를 보였어·”
“···!”
가르침씨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 한마디에 트릭시의 눈이 부릅떠졌다·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멍한 눈으로 플란을 마주 본다·
플란은 여전히 트릭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데 너의 술주정을 보면 무엇이라 생각하겠나·”
그러나 문득 그의 붉은 눈동자에 경멸만 들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릭시는 느꼈다·
플란은 트릭시가 가르침씨를 만날 수 있기 역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정점이 하나일 뿐 천재는 많다· 그리고 모든 천재가 패배 없이 성장하지는 않는다·”
트릭시는 호흡을 들이마쉬고 내쉬었다·
갑갑했던 숨·
그것이 이제야 다시 쉬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그리 한심한 태도로 그를 마주할 건가·”
트릭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둔했고 어리석었다· 본인의 행동은 취기의 힘을 빌려 떼를 썼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일류 마법사라면 천재라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겠지·
“···화염·”
마침내 트릭시가 입술을 떼었다·
한 번 내뱉고 나니 다음 말을 이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랑 화염 원소로 대결해·”
“화염이라 기준은 위력이면 되겠나·”
트릭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를 이기고 그분의 제자가 될 거야·”
“좋은 생각이다· 트릭시· 체전이 끝나면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
플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트릭시를 지나치며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일은 그에게 전하지 않겠다·”
트릭시는 홀로 남겨진 채 가만히 서서 방금의 대화를 되짚었다·
아프고 두렵던 감정 조급함 질투 분함 따위는 이미 없다·
“···천재를 연기하는바보·”
트릭시는 그저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더 이상 바보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람이 찬 새벽· 술기운 따위는 이미 없었다·
◈
체전까지 앞으로 이틀 메르헨일보 편집부·
체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 시점의 편집부에 쉴 틈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사무실 세피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거예요·”
세피아의 지적을 받은 취재 기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는 그냥 일 좀 편하게 하자는 차원에서····”
“본인 한 명 편해질 수 있으면 일 처리는 이따위로해도 괜찮아요?”
세피아가 테이블 위로 올려져 있는 기사들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 아이반 어디까지 완벽해지려고 그러나··· ]
[ 아이반 완벽한 압승· ‘기사도’의 위대함 ]
“체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지금 뭐 하세요? 검증된 사실만 기사로 내보낸다· 메르헨일보 철칙이잖아요·”
“부장님·”
취재 기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렇게 될 거 부장님도 아시잖아요· 저희가 다루는 게 워낙 많은데 이런 거라도 미리 써둬야죠·”
“저기요· 이따위면 당신이랑은 일 못해!”
그런데 그때였다·
세피아의 트리비아에 푸른빛이 번쩍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펼쳤다·
미간을 좁힌 채로 살피기를 일 초 이 초 삼 초····
이내 그녀의 표정이 풀어진다·
[ * 바이올렛 ]
[ ▶ 1학년 전투 종목 대표 결정 됐어· ]
[ ▶ 플란이 나가게 될 거야· ]
[ ▶ 지금 막 대표 등록 마쳤어· ]
트리비아를 덮고서 세피아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중얼거렸다·
“아니 일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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