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
달빛만이 드리운 밤 검이 허공을 가른다·
후우우웅!
그 속도는 소리조차 쫓아갈 수 없어 오히려 파공음이 한 박자 늦다·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검이 허공을 가른다·
후우우웅!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의 경로에는 조금 오차도 없다·
또한 과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어느 순간 검이 내리쳐져 있다는 결과만이 남아있다·
정석·
정석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움직이었다·
“후우우····”
여기사는 숨을 골랐다·
검은 불변(不變)한 것이지만 인간의 육체는 그렇지 못하다·
그녀의 온몸이 땀으로 뒤덮인 채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땀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구백구십팔·’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른다·
후우우웅!
‘구백구십구·’
한 번 또 한 번 망설임 없이 한 번····
조금의 오차도 없는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이 여기사는 고문에 가까운 수련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번·
‘마무리!’
콰직!
그녀가 지면을 있는 힘껏 딛자 지면의 암석들이 허공으로 튀어오른다· 그 수는 척 보기에도 열 개 이상·
위로 솟아오르던 암석들이 더이상 상승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녀는 고유능력을 개방했다·
섬광(閃光)
···일순간에 전부를 베어낼 것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아이반!”
갑작스레 불려진 자신의 이름에 소녀는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
후우 호흡을 내뱉으면서· 소녀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실패···· 로 쳐야겠지·”
구백구십구번을 훌륭하게 성공해냈다만 한 번 실패했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아이반 로즈· 그녀의 진중한 모습에 이름을 부른 당사자가 빠르게 사과했다·
“중요한 순간에 방해해버렸네· 미안하다 아이반·”
아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장갑을 벗고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닦아낸다·
“루드빌· 사과할 필요 없소·”
“나 때문에 검 못휘두른 거 아니야?”
“결코 아니오· 고작 이름을 불린 정도로 검을 멈춘 것은 나요· 내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고 해야 옳소·”
“····”
루드빌을 따라서 함께 아이반을 보러온 기사 생도들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아이반은 역시 아이반이구나·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요?”
“아 그래· 얘들아·”
루드빌이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다른 생도들이 양 손에 든 바구니를 자랑스레 들어올려보였다· 음식들이 잔뜩 들어있는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솔솔 풍겼다·
“아이반 내일이 체전 경기잖냐· 미리미리 축하해야지·”
“미리미리?”
“그래 임마· 어차피 이길게 뻔하잖아·”
실제로 전투 종목에 있어 기사 학부의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았기에 이들에게 있어 긴장은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에 속했다·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경기가 끝나면 먹겠소·”
그러자 와하하- 하고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이반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진다·
“···다들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는거요? 항상·”
“네 말투 때문이지 임마·”
“그렇게 재미있소? 내 말투가·”
“어· 그것도 엄청·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그러니까 하루종일 검만 휘두르지 말고 좀 놀기도 하라고요· 우리 아이반씨·”
아이반은 조금 쑥스러운 기색으로 볼을 긁었다·
“이상하네 고향에서는 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러니까 웃기지! 너 라펠 출신이잖아!”
와하하- 하고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아이반의 출신지인 라펠은 시골 중의 시골이라고 정평이 난 곳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투를 몇 번정도 되뇌면서 점검하는 사이 다시 다른 기사 생도들이 그녀에게 음식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한 입 해· 어차피 눈 감고도 이기는게 마법사잖냐?”
“루드빌· 그런 말은 아니되오·”
아이반이 루드빌의 말을 딱 잘라냈다· 여기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상대가 누구든간에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하지 않겠소· 그게 나를 향한 예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향한 예의요·”
“아이고~ 애들아! 아이반님 또 잔소리 시작이다!”
루드빌이 소리치면서 죽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옆의 생도들이 그를 부축하는 척하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이반 혼자서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 본인 실력을 생각해야지· 너 별명이 기사 학부의 초신성이야·”
“그래· 1학년 중에서 널 이길 수 있는 기사가 있냐? 없어· 같은 기사들도 못 이기는 판국에 마법사가 너를 어떻게 이기냐? 눈 감고도 이긴다는 루드빌 말이 무조건 맞아·”
그러자 아이반은 양 손을 들어올렸다·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 그런 말좀 하지 마시라니까· 나는 아직 부족한 게 많소· 훌륭한 기사분들께 실례요·”
“아이반 너 그렇게 고지식해서 시집은 어떻게 갈래?”
웃음을 터뜨리면서 루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반은 펄쩍 뛰었다·
“시 시 시집이라니! 나는 검성이 목표요!”
“혹시 모르지? 검성이 아내인 남자가 생길지·”
“어허!”
아이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졌다·
그 표정은 기사 학부 1학년들 사이에서 명물로 통하는 것이라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루드빌이 바구니 중 하나에서 엄청난 양의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전부 메르헨 일보의 신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찾았다는 듯 다른 학생들도 하나씩 받아들고 루드빌이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뭐 본인이 대단한 걸 인정을 못하니까· 지금부터는 우리 위대하신 아이반님을 칭송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아이고···· 그런 것좀 하지 마시라니깐····”
“어떻게 안 해? 불만이면 적당히 잘났어야지· 기사 학부의 불세출 기사 학부의 초신성 제 2의 스칼렛 유디트 무패 기사····”
“루드빌! 그만좀 하시오! 그만!”
아이반이 질겁하며 만류했지만 들떠있는 그들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내 누군가가 목청껏 소리내어 신문 기사 제목을 읽기 시작했다·
“기사 학부의 초신성 아이반 로즈· 승리 지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 운영!”
“아이반의 검에 아카데미 전체가 들썩인다· 푸하하···· 이거 누가 쓴 거야?”
한 명이 기사 제목 하나를 다 읽으면 다음 순간 옆에서 이어받는다· 아이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짚었다·
아이반을 향한 ‘칭송’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술잔이 바쁘게 오간다·
그녀는 그 낯간지러운 칭송에 일일이 화답하는 대신 품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쥐었다·
‘아버지·’
목걸이를 쥐고 있으면 돌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이반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 울면 배로 혼나고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되어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칭송은 전부 그를 향한 것이었을 터·
따라서 아이반은 아버지를 데려간 악인(惡人)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또한 절대로 패배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응? 이게 뭐야···?”
옆에 있던 기사 생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별안간 신문에 고개를 처박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놈 이거 갑자기 왜 이래· 글자 못 읽냐···· 엥?”
그 옆에 다가선 루드빌의 눈도 똑같이 휘둥그레졌다· 마침내 그들의 입이 벌어졌다·
“마법 학부 체계적인 기준으로 대표 선정해 주목····”
마법 학부라는 언급 한 마디에 왁자지껄하던 훈련장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는다·
“···전투 종목에서 승리하리라 확신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지금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지금 보니까 마법 학부 관련 기사가 많네· 뭐지?”
잔 부딪히는 소리 웃음 소리가 일시에 사라진다· 이내 종이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훈련장 안을 가득 메웠다·
“···이런 씨발· 이 새끼들 뭐냐?”
루드빌이 신문을 구깃구깃 구겨버리면서 침묵을 깼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모두들 각자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존나 건방지네· 처맞으려고 작정을 했나·”
“대표가 누구길래 이렇게 까부는 거냐? 한 번 봐봐·”
이내 모두의 관심사가 마법 학부의 ‘대표’로 쏠렸다·
“플란···· 야 그냥 평민인 것 같은데?”
“평민이라고? 걔네 단체로 그거라도 걸린거 아니냐· 걔네가 좋아하는 거 있잖아· 환혹인가? 그거·”
마법 학부를 향한 비난이 빗발치는 와중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얘 이력이 조금 특이하긴 하네· F등급으로 입학했는데 이번에 대표까지 뽑힌 거래·”
“그건 특이한 게 아니라···· 야 설마· 그거 아니야?”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기사 생도 하나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악인이랑 계약이라도 한 거 아니야? 영혼 계약은 마법사들이 많이 하잖아· 이렇게 생각해보면 모든게 다 들어맞지 않냐? 왜 자신감을 가지는지도 설명이 되고·”
영혼 계약·
그 발언에 잠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가 별안간 루드빌이 생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게 미쳤나?”
“악!”
“양측 학부에서 주관하고 교수들이 심사하고 총장까지 체크하고 내보내는 대표가 계약자겠냐고·”
그 다음 루드빌이 입모양으로 조용히 덧붙였다·
‘아이반 앞에서 악인 이야기 하지마!’
그때였다·
“먼저 가보겠소·”
아이반이 겉옷을 챙겼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했다·
그게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을 듯한 표정·
루드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이반 괜찮아?”
아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챙겨들었다· 당장 다른 훈련장에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게 된다면 또한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수천 수백을 넘는 패배와 승리를 짓밟고 일어서서 기어코 기사도의 총체를 바라보고····
결국 온 악인을 쳐부술 수 있는 검성(劍聖)이 되리라·
그러니 만약·
만에하나·
대결 상대가 악인이라면····
그를 용서하는 일 역시 절대로 없을 것이다·
◈
ㅡ 카플란·
거짓 따위는 조금도 없이 맑고 투명한 목소리·
그 가느다란 음색은 나의 이성을 괴롭힌다· 다소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ㅡ 이번에도··· 나한테 말해줄 수는 없는 거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 상황을 알고 있다·
ㅡ 괜찮아· 나는 당신을 믿어·
언젠가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진 나에게 그녀가 해 주었던 한마디·
― 결국 증명해 낼 거잖아 언제나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용기를 쥐어 짜 내뱉었던 충고였다·
― 넌 카플란이잖아· 메르헨 등위의 대마법사 카플란·
혹은 매달림·
희(喜)와 비(悲)를 가리지 않고 함께 나누려 했던 숫제 어색한 감각·
애정(愛情)·
창가를 짚고 선 그녀의 백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반짝이는 비단결이 얼굴을 휘감아 앞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돌아선다면 빗발처럼 쏟아지는 별과 같은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하게 될 거란 사실을 나는 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한 발 두 발·
그렇게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던 여인의 형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그 여인은 당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커튼 사이로 드리운 자줏빛 햇살이 새로운 날이 밝았음을 내게 알리고 있었다·
말인즉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이라·
“아무래도 수련이 부족한 듯하군·”
꿈이란 현실의 경험을 입맛대로 편집하여 그럴듯한 망상을 재생하는 정신의 어리광이나 다를 바 없다·
신체가 충분히 피로하지 않은 탓에 꿈을 기억할 정도로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체전의 날이 밝았다·
바깥은 마냥 조용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깨어 버린 탓이었다·
다시 잠들거나 멍하니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서둘러 청결하게 몸을 씻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이제 막 해가 고개를 내밀어 희끄무레한 기운이 교정을 감쌌다· 아카데미는 태풍 직전의 고요에 뒤덮여 있었다·
‘······꿈이라·’
더없이 맑아야 할 정신과 시야에 직전의 기억이 들이닥쳐 방해꾼 노릇을 한다·
엉망진창이 되려 하는 머릿속을 강제로 청소한다· 마법사는 무릇 내외부의 자극에 무뎌야 할 필요가 있다·
잠시 착각을 한 것일 뿐이리라·
쏟아지는 수마(睡魔)에 패배한 비일상적인 일일 뿐이이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을 기점으로 두꺼운 혈관부터 손끝과 발끝의 미세한 혈관까지 온몸에 마나를 흘려보내 날선 감각을 일깨웠다·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완벽하다· 더는 외부의 자극에 동요하지 않으리라·
“몸을 따라 정신머리도 풋내기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어색한 감정을 느꼈던 찝찝함을 답지 않게 어색한 혼잣말로 털어 냈다·
온전한 마법사의 정신과 신체를 가다듬고 마저 교정을 걸었다· 체전이 열리기 전 수련장에서 명상을 하며 마나를 점검할 생각이었다·
“아 플란 경!”
새하얀 구름과도 같은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은 건 그때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다다 달려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플란 경!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고개를 돌린 나는 볼 수 있었다·
빛과 같이 새하얗고··· 비단처럼 반지레한 백발· 계속 시선을 두다 보면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체전이 열리는 날을 맞아 제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뿌듯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로 제 가슴께를 팡 두드리며 내 앞에 선 유시아였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다·”
“이런 아침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유시아에게서 눈을 치우고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명상을 할 것이다·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아 어디로 가십니까?”
내게 졸졸 따라붙은 그녀가 방긋 웃었다·
“수련장으로 간다·”
“그렇군요 함께하겠습니다! 간밤에 불편하신 점은 없었습니까?”
불편이라·
유시아는 기필코 대답을 원하는 눈치로 꼭 쥔 주먹을 모으고 있었다· 나는 반짝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치웠다·
“불편했다·”
평소였다면 혀를 차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을 테다·
한데 왜인지·
“어···· 정말입니까? 어떤 점이! 감히 플란 경을!”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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