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별거 없잖냐·”
경기 직전·
아이반이 무려 십 분을 서서 기다리기만 한끝에 스칼렛의 입으로부터 나온 고작 한 마디·
예의 바르게 뒷짐을 진 채로 아이반은 스칼렛을 바라보고있다·
오늘 메르헨 아카데미의 기사 학부에는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몸소 행차한 잔불의 기사 때문이다·
아이반과 스칼렛의 만남이란 1학년 기사 생도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경기에 나가서 상대방을 짓밟아놓으면 끝·”
“명심하겠습니다!”
“평소처럼 하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씩씩한 아이반을 앞에 두고서 스칼렛은 손에 쥐고 있는 신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 플란 총장 의견과 연계해 체전 경기 추진 ]
···네까짓 게 대표란 말이냐·
그녀는 그게 의문이다·
고작 1학년 대표라고는 하나 다른 동기들을 전부 마법으로 제쳤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사실 오늘 아카데미를 방문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스칼렛이 아이반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했다’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실상은 플란을 향한 의문 때문이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아이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잔불처럼 타오르는 스칼렛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아이반을 향해서 굴러갔다·
“동기들에게 들었습니다· 마법 학부에서 신문 기사까지 내보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신경이라·”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심란한데 무엇 때문에 심란한지도 알 수 없어서· 스칼렛은 잠시 생각을 되짚었다·
무턱대고 악인과 계약했다고 의심할 수는 없다· 마법 학부가 마냥 멍청이는 아니니까· 싫은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다만 계약이 아니라면 플란의 성장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노력·’
영혼을 갈아 넣는 수준의 노력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기사의 핏줄을 타고난 그에게 마법적인 재능은 당연히 전무할 터이니·
ㅡ기한은 중간 평가까지·
스칼렛은 플란과 약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약속하던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자신감 결의 그리고 확신····
“아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칼렛은 본인의 눈이 더없이 정확하다고 자부한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사의 눈은 그녀에게 진실만을 보여줄 것이다·
탁 아이반의 발치에 신문이 던져졌다·
“너는 최선이나 다해라· 내가 지켜볼 테니·”
그게 과연 아이반을 지켜보겠다는 뜻인지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다·
◈
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체전의 정식 명칭은 ‘메르헨 검마태제(劍魔太祭)’로 이름뿐만 아니라 방식 역시 특이하다·
정해둔 기간 내에 모든 종목의 경기를 전부 치르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며 메르헨 아카데미는 모든 순간이 태제 기간이다·
한 달에 한 종목의 경기만 치르도록 하는 ‘일월일경기제’가 바로 원인이다·
그러나 오늘 종목인 ‘전투’는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한 해에 처음으로 치르는 경기 바꾸어 말해 검마태제의 개막전이기에 그렇다·
“···다들 운이 좋군·”
오늘 경기는 각종 스카우터를 비롯해서 황실 관계자도 지켜본다는 모양인데 다들 운이 좋다·
[ 아이반의 완벽한 서사···· ‘무패’ ]
상대방에 관한 기사도 조금 살폈다· 무패라 어떤 녀석일지 조금은 기대된다·
훈련을 마치고 유시아와 헤어진 후 나는 출전자 대기실로 향했다·
경기 당일이라 그런지 평소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사람이 훨씬 많다·
기사 생도와 마법사 생도가 어지러이 얽혀있는 풍경은 경기 당일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일 터·
“어 저거 아이반 아냐? 나 나! 아이반한테 가서 인사할래!”
“아니잖아· 얘는 아까부터 왜 노란 머리카락만 보면 아이반이래?”
기사 생도들의 분위기는 훈훈하고 따스하다· 꽃놀이라도 나온 것처럼·
“음료수···· 사갈까말까?”
“사지마· 입 대기도 전에 경기 끝나면 존나 억울해·”
한편 마법사 생도들에게는 우려가 크다· 응원하든 응원하지 않든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오만감이 교차하는 그들의 사이를 나는 무심하게 지나쳤다·
“플란 학생~”
대기실 통로에 들어선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옆에 달라붙었다· 세피아였다·
“취재는 경기 후에 하는 거 아닙니까·”
“취재라면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예 사적인 이유로 방문했는걸요?”
“용건이 뭡니까·”
세피아가 내게 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응원한다구요· 플란 학생· 그리고···· 또 뭐라고 썼더라? 메르헨 등위 카플란씨?”
“응원 없어도 잘합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세피아는 앗 소리를 냈다가· 금세 내 옆으로 다시 달라붙었다·
“꼭 그렇게 해줘요· 이건 대외비인데·”
세피아가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서 팔랑팔랑 흔든다·
“당신의 승리에 사직서를 건 교수도 있거든요· 저한테 되게 소중한 사람이라 꼭 이겨주셔야겠어요· 아 그리고····”
세피아가 슬그머니 물러난다·
“저는 이쯤에서 가봐야겠네요? 나보다 더 다급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그게 누구인지 관심도 없는데 누군가가 내 앞을 휙 가로막았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장미 향· 베키였다·
평소 말하는 빠르기의 두 배가 넘는 속도로 그녀가 우다다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안녕· 긴장했을 때는 초콜릿이 좋대· 내가 직접 만든 건데····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일단 이거 받아주라·”
“그러지·”
받았다·
여자가 주는 이러한 물품들은 높은 확률로 거절했을 때 일이 더 귀찮아진다·
“플란· 이거는 순전히 응원차로 주는 거다? 응?”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아 정말! 네가 그때 마법 미궁에서 나 구해줬었잖아· 그거 안 잊었다구·”
베키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러니까···· 그 답례는 나중에 또 따로 할거고 이건 그냥 응원차라는 뜻이잖아· 나 그렇게 배은망덕한 애는 아니야·”
나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초콜릿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키·”
“응?”
“···초콜릿을 만들 시간이 있었나·”
“아 아? 시간~?”
베키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다·
“뭐 그냥· 평범하게? 온종일? 아니 더 짧았나? 아무튼· 이 정도는 기본이지!”
“종일이라···· 알았다·”
베키를 뒤로했다·
어떻게 온종일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것을 잠시 골몰했다·
‘앞으로 과제 양을 늘려야겠군·’
◈
[ 마법 학부 대기실 ]
염동으로 문을 열었다·
여학생들의 수다가 일시에 잦아들며 공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정확히 여섯 명의 눈이 나를 향해 꽂혔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검마태제 일일 직원’
그녀들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 형식의 명찰에는 그리 적혀있다·
원래라면 그녀들이 경기 직전의 내 상태를 케어해야 하지만···· 나에겐 그런 도움이 필요 없고 그녀들 역시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서 머릿속을 비우기 시작했다·
“결국 대표까지 됐네? 원하던 대로·”
별안간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얼굴이 익숙하다 싶더니 헤일리였다·
나는 치미는 귀찮음 억누르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 이길 수 있겠어? 감당 안 되면 그냥 가만히 있지· 왜 굳이 대표 자리를 뺏어서·”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트릭시랑은 무슨 사이야? 프리츠 가문에 뭐라도 먹여줬니?”
그러나 대꾸하지 않자니 말이 끝도 없이 늘어져서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헤일리·”
동시에 이 몸에 처음 깃들었을 때· 헤일리가 내게 중얼거렸던 말들이 떠올랐다·
“마법적으로 존경하는 남자와 연애하고 싶다···· 분명 그리 말했었지·”
헤일리가 코웃음을 쳤다·
“잘 기억하네· 왜? 그 말이 유독 상처였어?”
“너의 그 신념을 고칠 생각은 없는가·”
“···?”
헤일리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더니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생각을 고치고 네 쪽을 한 번이라도 더 바라봐달라···· 뭐 그런 구질구질한 고백이야?”
“너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고 나는 그저 조언하려 한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다·
“나는 네게 관심이 없다· 아주 조금도·”
“····”
헤일리가 표정을 구겼다· 그 표정을 피하지 않은 채 그저 내려다보았다·
“너 역시 계속 그래야 할 것이다·”
“야· 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도통 모르겠고·”
내 말을 토막 낸 그녀의 목소리에 독기가 서렸다·
“난 루이스 계속 좋아할 거거든? 걔가 너처럼 찌질한 남자인 줄 알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
마침내 흥미로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레 그것을 살피고 이내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찬연히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내는 거대 경기장 그것을 가득 메운 관중·
의심 가득한 시선 혹은 그것을 넘어서서 적대하는 시선·
복잡하게 뒤섞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수군거림 처음 보는 누군가의 호들갑·
그 전체가 한데 모인 검마태제의 1종목· 전투·
나 카플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선율일 뿐이다·
그 선율의 한 가운데에 나는 섰다·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소·”
씩씩한 음색·
믿음을 가진 눈빛· 악의가 없는 열의를 가득 담은 태도의 여기사·
“많은 생도들이 기대하는 중이외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오·”
그녀는 지면에 검을 수직으로 꽂더니 나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잘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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