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와· 이렇게 좋은 곳 살아? 돈도 많은 것 같은데 기숙사는 왜 안 들어갔대·”
척 보기에도 호화스러운 저택은 소녀로 하여금 부의 크기를 짐작케했다·
또한 불타오르는 검의 문양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것이 퍽 고급스럽다·
소년이 되묻는다·
“기숙사?”
“응· 메르헨 아카데미 기숙사 시설 말도 안 되게 좋잖아· 혜택도 많은데 왜 안들어갔어?”
“너는 왜 안 들어갔지·”
치사하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온다· 소녀는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뭐야· 그렇게 됐어·”
“나도 그렇게 됐다·”
“치사하네·”
그녀는 괜히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살핀다· 지금 보니 플란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꾀죄죄했다·
정문으로 다가가면서도 베키는 감탄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런 곳에 살고싶다·
“와··· 메르헨 아카데미 다니는 녀석들은 다 이런가· 이렇게나 잘사는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베키는 플란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껏 집에 데려다줬더니 그 눈빛에 안도감보다는 생경함이 넘친달까· 남의 집을 바라보는듯한 시선이다·
설마·
“플란· 여기 너희 집 아니야?”
대답을 위해 그가 막 입술을 떼었을떄쯤·
“누구십니까·”
투명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하녀가 있었다·
칼같이 잘려있는 그 단발은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 했다·
이토록 당당한것을 보아하니 아마 하녀장같은데· 외모는 너무나도 어려보인다·
···베키와 또래는 아닐까 싶을 정도·
아무튼 하녀장이 맞는 듯 했다· 가슴부근에 구분을 위한 황금색 핀이 하나 꽂혀있으니·
“···누구십니까·”
그녀가 한 번 더 물었다·
처음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질문이었다면 이번에는 오로지 베키를 향한 질문이었다·
소녀는 공손히 배꼽인사를 하고나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플란 얘가 집을 못찾길래 여기까지 데려다줬어요·”
“플란 도련님이 집을 못찾았다?”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의심이 섞여있었다·
“들어가세요· 도련님·”
하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하녀가 달라붙어 그를 저택 안으로 데려갔다·
소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했다·
남은 것은 베키와 하녀장 단 둘·
차가운 분위기에 베키는 얼어붙어있다가 이내 자신이 무엇을 의심당하는지 알 것 같아서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호화와 고귀 그리고 격식이 공존하는 이들에 비해서 평민인 베키는 다소 꼬질꼬질한 편이다·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고깝겠지·
“저랑 얘랑 오늘 처음 봤어요·”
“오늘 처음 봤다·”
아 이건 더 오해의 소지가 큰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진짜로·”
하녀장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목을 살짝 숙여서 하녀로서의 예를 취한다·
슬며시 미소를 머금는 그 표정이 예술품처럼 아름다웠으나 결코 온화하지는 않다·
사실상 축객령으로 느껴져서 베키도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안녕히계세요!”
불편한 자리는 사절이다·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향해서 걷고·
또 걷다가·
문득·
“······!”
놀라서 멈춰섰다·
홀린 듯이 저택에서 보았던 문양을 되짚었다·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불타오르는 검의 문양· 도저히 마법 가문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 어떻게 생각해도 기사가문이잖아·
기사와 마법사는 서로를 물어뜯는존재·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마법사를 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않는다· 하물며 뛰어난 마법 실력은 더더욱 이해하기가 힘들다·
소녀는 저도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
하녀장 카타리나는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플란에게 그의 누나인 스칼렛 유디트의 호출에 어째서 응답하지 않았는지부터 물어야했다·
“내 방은 어디지·”
그런데 웬일로 플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도 기상천외한 발언으로·
저택의 심각한 분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태연한 모습·
“···도련님· 혹시 음주하셨습니까·”
“안 마셨다만·”
“만난지 하루도 안 된 여자를 저택으로 데려오시고·”
“안내를 시켰을 뿐이다·”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바뀐 말투와 태도가 거슬리지만 음주 정도로 나올 수 있는 변화가 아니긴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궁금해졌지만 플란과의 눈싸움에서 졌다·
그건 정말로 ‘아랫 것’을 대하는 눈빛이었기에 그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카타리나는 조용히 플란의 방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하녀 몇 명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믿을 구석이라도 생기셨나?”
이 심상치 않은 저택의 분위기를 반전시킬만한 결과를 과연 도련님은 가져오셨는가·
다른 하녀들을 통해서 전달받은 자료들을 살피며 수를 센다·
메르헨 아카데미의 인장이 찍혀있는 그 자료는 원소 소환 파괴 보조 조작 연성 등 과목과 등수를 빼곡하게 담는다·
[ F ]
그게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플란에게 내린 등급이었다·
F면 최하위권 학생들이 받는 등급· 사실상 겨우겨우 턱걸이하며 아카데미에 합격했다는 셈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내 구깃구깃 구겨서 허겁지겁 쓰레기통에 넣는다· 혹시 윗분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길길이 날뛸게 뻔하니·
“···이제부터는 아주 힘들겠어·”
유디트 가문은 폭풍 전의 고요였다·
◈
“그럭저럭이군·”
일단 지친 몸을 침대 위에 뉘였다· 푹신함에 감싸지며 몸은 가벼워진다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것 정도·
지금 겪는 것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 몸으로 살아가야만한다·
이해할 수 없다만 이제는 받아들였다·
그럼 지금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싶은걸 해야지·”
어느날 갑자기 또 기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건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두려워한다고 하더라도 맞설 수 없으니·
그래 그러니까 하고싶은걸 해야하는데· 문득 일어나서 거울 앞에 섰다·
그저 다시 태어났을 뿐이라면 순수하게 그가 하고싶은 것을 좇았을 것이나 다른 이의 몸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호기심이 피어오른다·
이 녀석은 무엇을 하고싶었을까·
진로 고민이라는 것 자체를 굉장히 오랜만에 해본다·
카플란은 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관찰과 분석은 자신있는 분야 중 하나· 결국 방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꽤나 넓은 방 여기저기에는 방어구 검 등등이 먼지 쌓인 채로 걸려있다·
‘가문 문양도 타오르는 검이었지·’
아무래도 이 소년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기사의 숙명을 짊어진 것 같다·
“가엾군·”
그런데 또 서재에는 마법과 관련된 책들만 가득하단 말이지· 이것들에는 먼지가 쌓여있지 않다·
그때쯤 입꼬리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강요받는 기사의 삶과 걷고싶은 마법사의 길· 숙명과 하고싶은 것 사이에서의 충돌과 반항·
다른건 몰라도 이런 반항만큼은 환영이다·
좀 더 호기심이 생겼다·
소년이 읽었던 마법서적들을 하나 둘씩 꺼내서 바닥에 내려두다보니 이상하리 만치 얇은 노트 하나가 손에 닿았다·
얇은 다이어리· 누가 봐도 일기장·
남의 기억을 훔쳐보는 악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만 너덜너덜한 책들 사이에서 이것만 뻣뻣하니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소년은 첫 장을 넘겼다·
적혀있는 것은 고작 한 줄·
—대마법사가 되고싶다· 꼭·
그 글귀가 망막에 맺히자마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마법사라·”
사실 소년이 검사를 꿈꿨다고 한다면 그 바람을 이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검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건 무슨 우연일까·
소년은 카플란과 꽤나 일치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몸으로 또 한 번 대마법사···”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증명할 것이 많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당긴다·
언젠가 마탑에서 정체불명의 상대를 향해 또다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시기가 온다면 재밌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지·
그래 재밌을 것 같다·
“반항은 얼마나 열심히 했으려나·”
플란은 소년이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 마법 서적들에 손을 댔다·
아는 거라면 익숙한 내용이라서 재밌고 혹시 이 세계에서 또 다른 내용이 있으면 새로운걸 배우니까 재밌지·
그는 늘 그런식으로 살아왔다· 나이가 굉장히 어려졌으니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탁·
손가락을 튕겨서 책 다섯 권을 허공에 띄웠다·
깍지를 껴서 베개를 만들고편안한 자세로 그것들을 동시에 살핀다·
소년이 군데군데 별표를 쳐둔 공간에는 제멋대로 주석을 붙여가면서 읽는다·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마법 지식은 파도처럼 플란의 사고를 덮친다·
“이거지·”
이런게 그의 유희다·
◈
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때 쯤일까·
플란은 여전히 서적들을 살피고 있었다·
본래 피로하여 찾게된 집이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는 기초서적들은 상당히 재미가 있었다·
아 정확히는 기초 서적들을 버거워한 소년의 흔적들을 살피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목욕을 하며 욕조 안에서도 살필만큼 말이다·
또한 세상에 관련된 책 역시 굉장히 흥미로웠다·
역시 이 세계는 마법에 있어서는 골자가 거의 일치하나 문화나 유행 등등은 그의 원래 세계와 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가장 흥미로웠던건·
‘이 세계에서도 마법사와 기사의 관계는 엉망이군·’
세계가 달라져도 기사와 마법사는 여전히 사이가 나빴다· 걷는 길부터가 너무 다르긴하지·
그렇게 정신없이 읽다보니 어느덧 아침·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도련님·”
플란은 아직도 욕조 안이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서 방 문까지 열어주기에는 너무나도 번거롭다·
“도련님?”
잠시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멋대로 연 모양이다·
“아침 식사 시간인데 어디를 가셨지? 도련님· 도련님!”
시끄러운 소리가 꽤나 거슬린다· 플란은 염동으로 욕실 문을 확 열어버렸다·
“도련님 아침 식사는 어떻···”
평범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카타리나가 얼어붙는다·
그녀는 재빠르게 고개를 모로 돌렸다·
“여기있다만·”
“아 예· 아아··· 욕실에· 아 그· 전달할 것이 있어서· 예· 아침식사 때문에· 네·”
카타리나의 얼굴이 아주 살짝이지만 붉어진다· 평생을 일만 했으니 아직 사내의 몸에는 면역이 없었다·
“너무 신경쓰지마라·”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욕조 안에 담겨있는 플란의 몸은 하녀장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린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스칼렛 아가씨가 어젯밤에 복귀하셨거든요· 같이 드시게 될거에요·”
“흐음·”
플란이 잠시 턱을 괴고서 고민했다·
기사들 사이에서 식사하는건 꽤나 숨막히는 일이다· 그냥 방으로 가져달라고할까 따위의 고민을 했다·
카타라나는 흘끗 눈동자를 굴려 고뇌하는 도련님의 모습을 살폈다·
그 분위기가 평소와는 굉장히 다르다·
흘러넘치는 기품과 격조· 단순히 나이나 철이 들어 어른스러워졌다 정도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차이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아무튼 그녀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이번에는 방 내부를 살핀다·
그 움직임이 가히 날카롭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택의 ‘윗사람’들이 문제삼을만한 것이 있다면 미리 짚어내는 것이 카타리나의 역할이었으므로·
이내 하녀장의 시선이 바닥에 가득 놓인 마법서적들에 꽂힌다·
“도련님 밤새 마법 서적을 읽으셨습니까·”
“그랬지·”
“마법 서적···”
그녀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녀장인 제가 감히 주제넘게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해보지그래·”
“아카데미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학생으로 분류되셨더군요·”
“그런가·”
“예· 지금이라도 다시 검을 쥐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가씨께서 이제와서 조력해주지는 않더라도 동생 취급은 아니·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해주실지도 모릅니다·”
플란은 코웃음을 치며 욕조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욕실 밖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필요없다·”
무시 멸시 혐오 등등은 이미 한 번 겪었던 것들이라 익숙하다·
겪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건 굳이 쩔쩔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에 에고· 도련님·”
한편 카타리나는 급하게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이내 눈을 슬쩍 뜨고서 손 틈새를 통해 물기를 닦고 옷을 입는 플란의 모습을 살핀다·
그를 좋아한다거나 사심을 채우겠다는 이유는 절대 아니었다· 그저 신기해서였다·
‘뭐가 달라진거지?’
그가 아는 플란의 몸 그대로였다· 키 크고 마른 신체는 옆으로 조금도 두꺼워지지 않은채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타고난 골격 자체가 넓다고는 하지만 중요한건 딱히 더 성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분명 다르다·
그 몸이 오늘따라 유독 커보였다· 평소의 병약하고 겁많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이만 나가보지그래·”
낮게 깔린 명령에 홀린듯이 방을 빠져나가려던 카타리나는 문득 자신이 하려던 말을 떠올렸다· 하마터면 그걸 잊고 저도 모르게 나갈 뻔 했다·
“안 나가면 내가 내보내지·”
플란은 하의는 전부 입고 상체는 아직 벗은 상태였다·
플란이 카타리나를 슬며시 손으로 밀어내려했지만 그 손을 카타리나가 붙잡는다· 여전히 고개는 저 멀리 돌린 채였다·
“···도련님! 세간에서는 도련님을 유디트 가문의 수치라고 부릅니다·”
눈을 질끈 감은채로 말을 잇는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어도 맡은 바 임무는 다해야했다·
“이대로 계속 마법을 하신다면 가문에서도 가만있지 않을겁니다· 더이상 도련님이 유디트의 사내가 아니게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야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저야 뭐 어릴때부터 도련님 곁에 붙어있었으니·”
“그런가·”
플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이번에도 수긍의 끄덕임은 아니다·
오히려 턱을 치켜들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플란의 것이 아닌 카플란 본인의 반항심이 불타오른다·
“이봐· 이 가문은 검으로 떨친 위명이 어느정도지·”
“······예?”
카타리나의 얼굴에 당황감이 번진다·
“검으로 가치를 증명하는 가문이라면 앞으로 더더욱 노력하는게 좋을거다· 모두한테 그렇게 전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혹시 다른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하녀장·
그러나 플란은 여느때처럼 피식 웃어줄 뿐이었다·
“어느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마법 가문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니까·”
플란은 그녀를 비웃어준 후 아침 식사를 하러 향했다·
“도··· 도련님! 이번 아침 식사는 스칼렛 아가씨도 함께합니다! 식사 도중 그런 말씀은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뒤에서는 당황한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는다·
“가볼까·”
증명할게 산더미다·
바꿔말하자면 그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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