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0
“이제 마법이라 불러라·”
플란의 말을 들은 직후 아이반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마법이라 부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다· 이해도 용납도 되지 않는다·
기사의 태생을 지녀 기사의 의무를 받아 무언가를 쥘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줄곧 검만을 단련해 왔다·
검술(劍術)
이것은 검술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며 이 진리에 가까운 사실을 의심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쐐애액ㅡ!
아이반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고유능력의 보조를 받은 검이 빛살처럼 플란의 머리를 향해 쇄도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인형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히며 거대한 폭음이 발생했다·
“····”
아이반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견고한 방어를 이뤄내는 인형이 당황스럽다·
아니 단순히 견고한 것 이상이다·
인형은 아이반의 검술을 똑같이 따라 하여 제 주인을 지키는 중이었다· 표현 그대로 똑같이·
“···막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대상은 인형이니까·
아이반이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내 태연하게 서 있는 플란에게 닿는다·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기사를 상대로 이따위 장난질을···· 그대는 내 검이 두렵지도 않은가!”
“두렵겠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더없이 서늘한 음색으로·
“내가 묻지 아이반 너라면 이따위 상대에게 두려울 수 있겠나·”
“이따위····”
뚜둑─·
머리 어딘가에서 신경다발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이따위라고····”
플란의 말을 되뇌었다· 끓어오르던 머리가 일순간에 차게 식는다·
아니 이미 완전히 타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플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이따위’ 상대에 불과하고 이대로 치욕적인 패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사가 훈련으로만 강해지는 것은 아니지·’
아이반은 알고 있다·
실전에서 기량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면 삼류·
실전에서 기량을 전부 발휘한다면 이류·
그리고···· 실전에서 한계를 극복하는 자 진정한 일류 기사라고 불릴 수 있음을·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호흡을 고르며 관중석에 앉아있는 수많은 생도를 빙 둘러보았다·
많은 수의 기사 생도들이 오로지 한 명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한 명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아이반이 검을 고쳐 쥐었다·
‘모두 똑똑히 봐주시오·’
나를 대표로 믿어준 그대들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아이반에게 있어 이 승부는 더 이상 단순한 승패 놀이가 아니다·
마법 따위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기사들만의 고유한 검술과 혼이 있음을 증명해내는 자리였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비단 검만은 아니었다· 기사들의 자존심 역시 쥐어져 있으리라·
“후우우····”
아이반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상단세·
방어를 동시에 겸비했던 중단세를 버린다· 그녀는 오늘 기어코 무언가를 뚫어낼 것이다·
고른 호흡을 반복했다· 호흡은 갈수록 낮아지고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더없이 날카롭게·’
인형이 자기 자신을 본떴다면 자기 자신을 짓밟아 넘어서면 될 뿐이다·
날아가는 새처럼 뒤 따위 돌아보지 않으리라·
카앙!
인형이 또 한 번 아이반의 검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다·
아이반은 문득 시야가 넓어졌음을 느낀다·
인형의 비틀거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 빈틈이 보인다·
“···뭘까요·”
신비의 협곡 스카우터 에릭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플란·
콜린을 통해서 처음으로 들은 이름이다· 외양을 살폈을 때도 특출난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느꼈다·
자기 확신을 가진 인물· 그냥 딱 그정도였는데·
“아이반을 똑같이 소환해내서 전투를 하다니 어떻게 저런 생각을···· 아니 생각하더라도· 고작 몇 분 관찰한 걸로 저런게 가능한 겁니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 같은데·”
콜린이 에릭을 일축했다·
“어떤 점이요?”
“고유 능력 쪽은 잘 모르겠지만···· 검술은 누가 봐도 아이반 것 같거든·”
“근데 반만 맞아도···· 이미 말이 안 되는 일이네요·”
에릭이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결국 플란은 아이반을 고작 몇 번의 관찰 그녀의 검술을 완벽히 복제해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선배 기사 학부 분위기좀 보세요·”
두 스카우터는 기사 학부의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열렬한 응원을 보냈을 학생들은 멍하니 앉아있었고 그 적막은 공허를 연상케했다·
“당연히 저런 분위기지· 시간과 공을 들인 검술이 한 순간에 복제됐어· 기사 학부 입장에서는 근간이 뒤흔들릴 만한 일이라고·”
소름이 돋았다는 듯 에릭이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플란한테 눈빛 쏘는 것좀 봐· 어휴 무섭네···”
대표인 아이반을 원망하거나 탓하는 시선은 없다· 다만 플란을 향한 시선이 곱지 못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눈빛이 고울 리가 있나· 쟤네 입장에서 플란은 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도둑···· 이라고 할 수 있나요? 마법인데·”
“그래서 마법사들은 인정해주잖아· 원래 기사와 마법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어쨌든 이대로면 마법 학부가 이기겠어요· 눈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요·”
“의문을 갖지마·”
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에릭을 일축했다·
“의문을 갖지 말고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게 스카우터가 할 일이야·”
그러나 정작 콜린의 이마에서도 땀이 흐르고 있었다·
“···설령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말이지·”
“아이반이 역전할 가능성은 아예 없을까요?”
“글쎄·”
에릭의 고개가 콜린을 향해 휙 돌아갔다· 콜린이 플란과 아이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각성을 하면···· 또 모르겠지· 누군가가 각성하는 순간 본 적 있어?”
콜린의 말에 에릭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스카우터 일을 시작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각성이 뭔지는 알아?”
“선배 저도 그 정도는 알죠· 마법사든 기사든 각성하면 경지가 확 오르잖아요·”
“하아···· 너무 얕게 알잖아·”
콜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혈이 뚫리듯 경지가 확 오르는 건 맞는데 마법사 쪽이야· 기사의 각성 방식은 좀 다르지·”
“그런가요?”
“그래 기사는 보유한 능력이 한 층 더 고유해져· 위력이 얼마나 상승할 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지·”
“아···· 그걸 또 넘어서서 초월의 경지까지 가는거구나·”
에릭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우선 한 가지만 알아둬· 각성에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거·”
“계기라···· 하긴 그렇네요· 아무런 계기도 없이 각성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봐·”
콜린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판도를 뒤집으려는 것도 판도를 유지하려는 것도· 각성의 계기가 되기엔 아주 충분하거든·”
◈
아이반은 문득 몸이 타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검은 이미 몸의 일부가 되었다· 검을 휘감은 기운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집중해본 순간이 있었던가·
이토록 간절했던 순간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토록 분노했던 순간이 있었던가·
이러한 순간에 말은 필요하지 않다· 더없이 날카로운 상단세를 유지하며 상대방을 응시할 뿐이다·
그 팽팽한 긴장감에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흣!”
호흡을 삼키며 아이반이 인형을 향해 달려든다·
그녀의 검이 몇 번이고 허공을 갈랐다· 파공음은 한 박자 뒤늦게 쏟아진다·
파아아앙!
‘빠르게·’
아이반의 속도는 다른 기사들의 속도와 결을 달리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지닌 고유 능력은 의미를 가지지 못할 테니까·
‘더 빠르게!’
추구하는 것은 속도의 극의·
한 번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검 끝의 감각 선명해진다·
‘더 더 빠르게!’
극한까지 몰아붙인 신체는 더없이 빠르다· 이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경지에 다다른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수많은 궤적이 인형 위로 쏟아지며 참격을 내리꽂는다·
촤아악!
인형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자신을 뛰어넘는다·
한계를 깨부순다·
그 간절한 마음이 기사를 ‘각성’시킨다·
촤악! 촤악! 촤아악!
인형의 손 팔 어깨가 순서대로 베어져 나간다·
하체는 튼실하게 몸을 지탱하고 몸은 부드럽게 움직여 검을 춤추게 만든다·
방금까지의 아이반따위···· 현재의 아이반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토막 난 인형이 푸른 기운이 되어 흩어진다·
비로소 홀로 남은 플란을 바라보는 아이반의 눈이 한없이 낮게 가라앉는다·
“나는 기사요·”
그녀가 낮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반기며 그리 살아왔소·”
아이반이 검날의 몸통에 손바닥을 얹는다· 이내 손을 움직여 검 끝까지 주욱 훑었다·
“그러나 불가능을 이루었을 때· 이길 수 없는 적을 이겨냈을 때·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냈을 때·”
그러자 검날 전체가 찬연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새하얀 기운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황금빛의 강렬한 기운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고유(固有)를 얻소· 남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유일함을·”
아이반이 천천히 자세를 잡는다·
복잡할 것은 없다· 그저 빠른 것 하나로 충분할 테니·
또한 이것은 모방이나 복제가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플란·”
각성한 기사는 나지막이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기사는 일평생을 패배 앞에서도 꺾이지 않도록 배운다오· 그게 뼛속까지 새겨진 불요불굴(不撓不屈)이요·”
아이반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고양감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군다·
끊임없이 휘두르고 찌르고 나아가리라·
기사만의 고유한 영역이 있음을 증명하리라·
그것이 아이반이 생각하는 기사도(騎士道)니까·
“···이건 결코 따라 할 수 없을 거요·”
휘몰아치기 시작한 황금빛 기운·
이 발현에 거창한 이름이 붙을 필요는 없다·
일섬(一閃)·
단 한 번의 찬연한 반짝임· 그저 그것이면 족하다·
아이반은 검을 제 몸에 가까이 붙였다· 플란을 향한 경로가 선명하게 보인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다·
반드시 승리한다·
아니 패배할 수가 없다·
“패배 앞에서 꺾이지 않는다라···· 기사도 참 배우는 게 많군· 의외야·”
그때 플란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배우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는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말을 잇는다·
“나는 지는 법을 배우지 않았고 모르지·”
마법사의 붉은 눈동자가 기사를 향한다·
“와라·”
동시에 황금빛 직선이 길게 뻗었다·
◈
“하아 하아····”
아이반이 검 끝을 살폈다·
시퍼런 날 위에는 선혈이 맺혀있다·
일격이 적중했다는 뜻이지· 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들을 털어내며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했다·”
플란은 깔끔하게 양단되었으리라· 지금쯤 치료소로 송환되었을 터·
몸에 잔뜩 들어가 있었던 긴장이 이제서야 풀린다·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성취감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때였다·
“쓸만하군·”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반이 급하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나름대로 고유한 점이 있어· 또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점 역시 칭찬할 만하다·”
태연자약하게 서 있는 플란을 바라보며 아이반은 어깨를 떨었다·
플란의 어깨 자락의 제복이 뜯겨나간 채였다· 그 부분이 아주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이반의 일격은 섬광의 속도를 구현했고 궤적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빗나갈 수가 없었는데·
···플란은 그것을 기어코 피했단 말인가·
“그런데 아이반 방금 그 능력은 흥미가 생겨서 말이다·”
플란이 턱을 문지르면서 말을 이어간다·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없는 호기심만이 가득 찬 붉은 눈동자의 시선이 아이반에게 닿는다·
“몇 번 더 보여주면 하는데· 어떤가·”
플란의 몸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들이 공간을 잠식한다·
몽환적인 마나의 물결들은 이윽고 세 개의 상을 맺기 시작했다·
“무 무슨····”
아이반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예기를 뿜어내는 검신 세 자루가 그의 앞에 드리워졌다·
플란이 조용히 양 손바닥을 맞댄다·
톱니바퀴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듯 손바닥을 서서히 맞물리며 움직였다·
그러자 각각의 검이 아이반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번에는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
“세 번 정도만 더 보여주면 좋겠군·”
“····”
황당함에 아이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한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이반의 손을 검이 떠난다·
태앵─!
마침내 그 검이 지면과 부딪히는 순간·
마법 학부 측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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