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무슨····”
훈련장에 들른 후 밤이 되어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표정을 구겼다·
간식 편지···· 대충 그러한 것들이 문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문조차 열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잡다한 것들이 염동에 휩쓸려 한순간에 치워진다· 일단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모아서 나중에 한 번에 버릴 생각이다·
그러나 치워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건방지게·”
허공에 보란 듯이 떠 있는 그것은 붉은색의 편지였다·
조금 더 강한 염동을 발휘하자 그제야 편지가 반응한다· 나는 그것을 허공에 펼쳤다·
[ 지금· ]
적혀있는 문구는 그게 끝이다· 다만 밑에는 마법 학부 총장의 직인과 코네트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또 총장실의 위치까지도·
“총장이라·”
총장 정도 되는 인물이 호출하니 나름대로 호기심이 동한다·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달빛을 받은 아카데미 건물들이 하얗게 빛났다·
편지에 적혀있는 곳에 도착하니 거대한 성처럼 생긴 건물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건물 전체가 오로지 총장만을 위한 공간이다·
“학생 무슨 일이에요?”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말을 붙여왔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깔끔한 정장 차림 이제는 나도 이 여자의 이름을 안다· 오드리 교수였다·
가까이서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오드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란 플란 학생이네요? 맞죠?”
“맞습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이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오드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뭐야 플란 학생이네요·”
바이올렛이었다· 고깔모자 밑으로 보이는 다크서클이 조금은 옅어진 모습으로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다·
오드리 교수가 내게 묻는다·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총장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오드리가 아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총장님이 호출하셨구나···· 그럴 만도 하지· 아 그런데 플란 학생·”
오드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혹시 나중에 제 연구실 방문해볼 생각 없어요? 차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진로 상담도 하고···· 응?!”
그때 오드리 교수의 머리 위로 고깔모자가 푸욱 씌워졌다·
바이올렛이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
“뭐하시는 거에요· 남의 학생한테·”
“지금은 남의 학생이지만 나중에는 또 모르잖아요?”
“아직 중간 평가도 안 끝났다고요·”
나는 대화를 나누는 둘을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일축했다·
“생각 없습니다·”
누군가의 조수가 되어본 적이 내게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드리가 다급하게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그래도 꼭 고민해보세요· 알았죠? 총장실까지는 제가 안내해줄게요·”
덕분에 총장실까지는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붉은 융단이 깔린 긴 복도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끝에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있었다·
문을 노크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들어오시지요·”
나른하면서도 고혹적인 목소리·
나는 염동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가까이서 보니 더욱 반갑습니다·”
유리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여인이 인사를 건넨다·
저 여인이 바로 이 메르헨 아카데미의 총장· 코네트·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졌으나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마법적인 기운은 더없이 훌륭했다·
머리의 겉면은 하얗지만 안쪽은 검다·
눈동자는 오히려 바깥이 검고 안이 희다·
그 특이한 역안을 마주 보는 순간·
내 눈앞에서 목재들이 달라붙으며 의자가 만들어졌다·
“우선 앉아보시겠습니까·”
◈
때때로 마법사 간의 회합은 그 흐름에서 묘한 방향성과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당연한 수순이다· 이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형태는 일반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니·
그래서 코네트 역시 총장실을 찾은 소년의 모습을 물끄러미 살피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 그녀에게는 어쩐지 이 조합이 익숙하다·
그러나
지금 그것 따위가 문제 되지는 않았다·
그의 걸음걸음에 깃든 작은 태도들이 표정에 차올라있는 자신감이· 이미 학생의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의 감정이 쉽사리 읽히지도 않는다·
나름대로 남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에 있어서 노련하다고 자부하거늘 플란은 조금 달랐다·
그의 감정은 투명한 듯 탁했고 힘주어서 관찰하려는 순간 부옇게 안개처럼 흩어지고야 만다·
감정의 편린조차 없는 인간인 듯했다·
플란을 향한 흥미가 한 층 더 깊어져 버렸다·
조금 기특한 학생을 대할 생각으로 불러낸 것 뿐이었으나 코네트는 저도 모르는 사이 노련한 마법사를 대하듯 첫인사를 뱉어버리고야 말았다·
“반가워요 오늘 밤은 플란 학생과 간단한 이야기만 좀 나눠보자는 생각이에요·”
코네트가 말을 총 일곱 번 분할했다·
그리고 동시에 플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한 개의 인간 언어 다섯 개의 엘프어 한 개의 룬어· 이 일곱의 마디마디가 각기 다른 언어로 구성되어있음을 말이다·
‘날 떠보겠다는 건가·’
엘프들이 마법을 깊게 탐구한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고 룬어 역시 심화 과정을 익히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그녀가 이 한 번의 대화로 플란의 기량을 파악하려하다는 것을 그는 이해했다·
이렇게 높은 수준으로 떠보겠다면 또 기분이 나쁘지만도 않다·
굳이 따지자면 반가운 축에 속한다· 이 세계에서는 이런 것이 처음이고 또 이전 세계와 엘프어가 다르지도 않아서·
“복잡한 이야기라도 괜찮습니다·”
“이런····”
코네트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엘프어는 정확히 여덟 개가 존재하는데 방금 플란은 코네트가 입에 담지 않은 세 가지 언어로만 정확히 대답해냈다·
이번에는 플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다만 의도가 뭡니까·”
“의도라···· 별 거 없습니다·”
코네트가 생긋 웃어 보였다·
“총장이라는 게 워낙 외로운 직책이라서 말이지요· 좀 어울려 주었으면 합니다·”
물론 이는 코네트의 본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플란의 기량에 대한 호기심 또 플란의 목적 방향성을 확인할 셈이다·
그는 과연 천재(天才)일지·
그가 혹은 천재(天災)일지·
“아이반의 검술을 마법으로 표현한 것 잘 봤습니다·”
코네트와 플란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조용히 마주친다·
검은자와 흰자가 뒤집어진 기묘한 역안이 플란을 궤뚫어버릴 듯 응시한다·
“파장에 일곱 그리고 형상에 세 번의 변화를 준 후 소환 계열로 갈무리· 맞습니까?”
총장이 이번에는 오로지 ‘룬어’만 사용해서 질문했음을 플란은 역시 이해했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론이군요·”
“···!”
코네트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괜찮은 방법론이라 제 관찰이 어긋났는지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유일하게 느껴졌던 관찰이 플란에게 있어서는 수많은 선택지로 존재했다는 것일까·
코네트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공간 전체가 일시에 암흑으로 물든다·
‘관측 공간인가·’
높은 수준의 격을 갖춘 마법사들만이 구현할 수 있는 영역·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는 마법에 관한 모든 것이 형광으로 빛난다· 술식도 마법진도 회로도···· 표현 그대로 마법적인 관측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다·
‘깔끔하군·’
플란이 보기에도 군더더기 없는 발현이다·
“흥미가 생기는군요·”
코네트가 허공을 응시하자 그곳에 저절로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내 견고한 틀을 가진 15획의 소환 술식이 완성되었다·
“플란 학생은 어느 부분을 다르게 했지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만·”
플란은 그 15획의 술식을 고치기 시작했다·
“우선 과감하게 쳐내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과감하게 쳐내는데 그 정도가 코네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과감했다·
전부 다 쳐내고 나니 고작 7획밖에 남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수준이다·
“····”
코네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술식을 살폈다·
정확히는 ‘정순함’을 관찰했다·
한낱 뼈대 따위가 아니다· 마나가 굉장히 촘촘했고 회로는 한 치의 꼬임도 없이 정리되어있었다·
앙상해 보이지만 그 근간은 무엇보다도 튼튼하다·
“눈속임인 듯 아닌 듯····”
고작 7획의 술식일 뿐이지만 정순함 덕분에 겉보기로는 15획의 술식과 별다른 바 없어 보인다·
그럼 만약 이 학생의 마나 총량이 더더욱 증대되어 15획을 온전히 그릴 수 있게 된다면····
총장이 떨어져 나간 획 중 하나를 띄워 올렸다·
‘살상’에 관한 회로였다·
“학생은 이것도 제외하셨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상대방을 살상하는 것이 제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친김에 한 가지만 더 묻지요·”
코네트의 얼굴이 더없이 진중해진다·
“···상대가 만약 악인이나 혈귀였다면?”
그러자 ‘살상’과 관련된 획이 플란의 손으로 끌려들어 온다·
동시에 다른 획들이 전부 지워져 자취를 감추었다·
“이 한 획만 남았을 겁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코네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중했던 표정이 서서히 원래의 온화함을 되찾는다·
관측 공간 역시 사라진다· 두 명 앞에서 다시 평범한 집무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럼···· 플란 학생이 추구하는 것은 뭘까요?”
“마법의 극의 그리고 증명·”
코네트는 플란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편린들이 여전히 전부 읽히지는 않는다만 방금 그 대답만큼은 진심이 느껴졌다·
“차를 내어드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한잔하시지요·”
“감사합니다·”
평범한 홍차가 건네진 다음 어느 순간·
“헌데 차만 마시기도 심심하지요· 체스는 좀 둘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체스의 존재는 알지만 직접 해 본 적은 없었다· 마법만이 그의 일이자 취미이자 휴식이었으니·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군요·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코네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튀어 오른 목재들이 깎이고 마모되어 커다란 체스판과 기물로 변모했다·
“요점만 설명하겠습니다· 맨 앞에 있는 기물이 폰으로····”
총장은 일목요연하게 체스 규칙을 설명했다· 플란 역시 한 번 듣고 모조리 이해했다·
설명을 마친 후 코네트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설명한 건 평범한 체스의 규칙입니다· 이건 ‘아고라 체스’라서 조금 다르지요·”
“···”
플란은 조용히 그것을 살폈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에 옅은 흥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아고라 체스· 이름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예· 플란 학생이라면 흥미를 보일 것 같았습니다·”
체스는 단순히 흑과 백의 기물을 움직여 승부를 볼 뿐이지만 아고라 체스는 그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
퀸은 조화 나이트는 파괴 비숍은 소환····
기물을 한 번 옮길 때마다 아고라 보드에 출제되었던 관련 계열의 문제가 눈앞에 떠오른다·
그것을 옳게 풀어낼 때 비로소 기물을 옮기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삼 분·”
코네트가 즉석에서 허공에 모래시계를 만들어낸다·
“삼 분만 하지요· 늦은 시간이니까·”
삼 분이면 상대방의 기량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다섯 문제· 아니 세 문제만 풀어내도 기대 이상이다·
“알겠습니다·”
플란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코네트는 플란에게 선공을 양보했다· 따라서 플란이 백 코네트가 흑이다·
탁─
“···?”
시작부터 예상외였다· 플란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폰을 움직인 것이다·
폰이라면 ‘연성’ 계열의 아고라 보드 문제가 담겨있다·
아니 계열의 문제는 제외한다 치더라도· 아고라 보드의 문제는 애당초 접근하기 쉽지 않을 텐데·
우선 코네트도 기물을 움직였다·
탁─
탁─
“····”
또 한 번 예상외였다·
코네트의 기물이 체스판에 안착하자마자 플란이 기물을 움직였다·
‘벌써 기대 이상이지만····’
풀 수 있는 문제만 건드렸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코네트가 기물을 몇 번 더 움직였다·
탁─
탁─
탁─
탁─
“아하····”
기물을 정확히 두 번 더 움직인 후 코네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풀 수 있는 문제만 골라내지 않는다· 그저 아고라 체스를 그냥 평범한 체스처럼 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기물을 움직이는 중이다·
다시 코네트의 차례가 왔다·
코네트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플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플란 태연자약한 그 학생은 마법 학부에게 승리를 안겨다 준 그 대표는 석상처럼 체스판과 기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규칙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체스 전략은 명확했다·
상대방을 길들인다·
조련사를 보는 듯 하다· 상대방의 수를 모조리 읽어내고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점점 좁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게 그의 싸움 방식·’
마법사간의 승부도 체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상대방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파악하고 수싸움을 벌여간다·
탁─
탁─
그가 검마태제에서 보여주었던 양상은 체스판 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플란에게 읽힌 수는 정확히 따라잡혀 막힌다· 코네트는 다른 수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 그는 모든 수를 이미 읽어냈다·
코네트가 특정한 수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며 패배를 서서히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체스라지만···· 이 나를 길들이시겠다?’
즐겁다·
코네트는 이 오랜만의 대국이 즐거웠다·
결국 그녀조차 모르는 사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둘은 미친 듯이 기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쉬어가는 시간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체크·”
판도가 플란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코네트가 곧바로 회피해낸다·
“체크·”
그러나 플란이 또 한 번 낮게 읊조렸다·
“체크·”
피해내면 곧바로 뒤쫓아온다·
기물을 한 번 한 번 옮길 때마다 코네트는 불리해졌고 플란은 유리해졌다·
코네트의 머릿속에 플란이 어떻게 아고라 보드의 문제들을 풀어내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체크·”
그저 체크메이트를 피하기 위해 기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크메이트·”
결국 피해내지 못했다·
펑!
동시에 허공에 떠올라 있었던 모래시계가 삼 분의 경과를 알리며 폭발했다·
희고 고운 모래가 체스판 위로 눈처럼 내려앉는다·
“····”
후우·
한 번 호흡을 내뱉더니 코네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이겼다고 감쪽같이 믿고 있었는데 말이죠·”
아쉬운 말투로 입을 열었으나 코네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동시에 무언가가 표창처럼 위협적인 속도로 플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플란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체스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드릴 생각이었고···· 또 한 가지·”
코네트의 미소가 아주 살짝 더 선명해진다·
그녀가 옆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한 마디 덧붙였다·
“고맙습니다· 오늘 어울려주어서·”
플란을 바라보는 총장의 눈빛이 더없이 묘하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손에 잡힌 것을 살폈다·
그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순백색의 종이였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