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4
검마태제의 1종목 전투에서 승리한 후 마법 학부 학생들은 처음으로 주말을 맞이했다·
하늘은 색칠한 듯 푸르고 날씨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모두가 나들이의 충동을 느끼는 그런 날에 여전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소녀가 있었다·
트릭시 폰 프리츠·
그녀는 훈련장 의자에 앉은 채로 트리비아를 살피는 데에 여념이 없다·
탈의한 재킷과 딱 달라붙는 아카데미 제복 바지 그리고 땀에 젖어있는 푸른 머리칼은 그 모습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 ▷ 좋은 주말 보내고 계세용? ]
[ ▷ 제자가 아주 대단하게 활약했어용 ]
[ ▷ 저도 나중에 그렇게 되고싶어용 ]
학습 훈련 발레 식사···· 이것들을 규칙적으로 하는 만큼이나 그녀는 요새 트리비아에 열중이었다·
가르침 씨의 답장을 기다리며 트릭시는 플란이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흐음·”
그 날카로운 외모로부터 풍겨 나왔던 ‘예리함’은 단지 외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기사 학부 1학년의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아이반을 상대로 태도만이 예리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뱉었고 결국 증명했다·
‘조만간이네·’
ㅡ화염으로 승부해·
마탑에서 신체검사를 하던 날 그녀는 플란과 나누었던 대화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검마태제가 끝난 뒤 승부를 보기로 했었지· 슬슬 그 시기가 되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플란이 경기에서 보여준 모습이 워낙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요란을 떨 생각은 없다· 안절부절못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일 생각도 없었다·
승부의 종목은 ‘화염’· 그렇기에 트릭시는 불안해하지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프리츠는 푸른 화염 푸른 화염은 프리츠·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반드시 승리하여 가르침씨의 수제자가 되리라·
“앙·”
그때 트리비아에 답장이 와서 트릭시가 저도 모르게 묘한 소리를 냈다·
[ ▶ 안 될 것 없지· ]
오늘따라 말이 친절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상상은 자유니까· 트릭시는 편할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트릭시의 머릿속에 유난히 뚜렷하게 남아있는 전투 장면이 있었다·
그건 바로 플란이 아이반과 매우 근접한 상태에서 검술을 흘려내는 장면이었다·
‘마법사가 근접전을 하다니·’
종이 한 장의 두께·
종이 한 장의 두께 정도만 어긋났어도 몸 어딘가가 베어졌을 테지· 그 묘한 풍경이 유독 선명하다·
어색하게 흘려내는 듯한 움직임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또 자연스럽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읽고 오히려 그 검술이 어떤 경로로 틀어지게끔 유도하는 듯한 행위에 가까웠다·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 ▷ 혹시 동작 같은 것도 알려주셨나용? ]
[ ▶ 마음에 들었나· ]
“···!”
트릭시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 ▷ 그럴 리가 있나용· ]
[ ▷ 재수 없어용· ㅡㅅㅡ ]
[ ▷ 소감도 그렇고 잘난 척이 심해용! ]
그러나 잠시 후 다소 충격적인 답장이 도착했다·
[ ▶ 동작도 소감도 내가 지시했는데· ]
“엥·”
트리비아를 쥔 트릭시의 손이 흠칫 떨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사실 트릭시는 모든 상황을 모른다· 누군가와 연락을 해보는 것은 가르침 씨가 처음이기 때문에·
[ ▷ 잠시만용· ]
답장을 안 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만 답장하고 우선 빠르게 트리비아를 덮었다·
하녀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좋은 의견이 나오면 그대로 답장을 보낼 것이다·
‘그나저나·’
그 우아한 동작을 그 멋진 소감을 가르침 씨가 직접 하면 무슨 느낌일까···· 트릭시의 생각은 그쪽으로 뻗어나간다·
···아마 이상향에 가까울 것 같은데·
발레 동작으로 치면 아라베스크나 팡셰에 가까울 듯하다· 트릭시는 그 동작을 얼추 따라 해보았다·
그리고 자세를 취한 채로·
“마법사가 기사를 이기는 건 딱 그 정도 일이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훈련장 문이 벌컥 열리더니 베키가 몸을 들이밀었다·
“아으으 졸려 죽겠네···· 어?”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
“···!”
누구랄 것 없이 양쪽 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굳이 따지자면 베키쪽이 조금 더 놀란 듯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한동안 둘 다 그렇게 얼어붙어 있는데 베키쪽에서 먼저 침묵을 깼다·
“어···· 트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가·”
“응·”
◈
“별난 여자로군·”
기상한 직후 총장 코네트로부터 받은 백지를 살피면서 내뱉은 감상이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정해진 기간이 되면 백지 위로 잉크가 저절로 떠오르는 형식이다·
딱히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이라서 오히려 내게는 곤란하다·
이 장치는 마법적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서 미리 간섭하여 기간을 앞당기는 것이 불가하다·
“상관없나· 지장도 없고·”
당장으로서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주인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그리고 나는 드디어 헤라와 계약을 했다·
왼손에만 끼워진 검은 면장갑이 조금은 어색하다만·
처음 헤라를 본 순간 느꼈던 대로 또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대로 제법 만족할 만한 성능이었다·
“영령은 영령이라는 건지·”
마법 연산을 보조해주는 능력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만····
어두운 공간에서는 마나를 활용하는 온갖 행위가 강화된다는 점 헤라의 마나 총량을 공유하게 된다는 점·
이러한 점들은 두말할 것 없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저희가 이렇게 붙어있을수록 또 궁합이 맞아가니까요? 될 수 있으면 온종일 함께해주세요! ]
“헤라·”
[ 네 주인님! ]
“그러고 보니 입을 열라고 한 기억이 없다·”
나는 헤라의 회로들을 꽈악 쥐어준 후 기숙사를 나섰다· 물론 그 과정에서 헤라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주말인데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아카데미 교정에는 이미 수많은 학생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귀찮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파가 많은 것쯤이야 익숙했다· 최고의 교육기관에는 학생과 교직원을 비롯해 다양한 상주 인원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관심의 정도가 문제였다·
“저거 걔 아니야? 쟤 봐봐·”
“플란 맞는 것 같은데? 전투 종목에서 이긴 건 1학년이 유일하다던데····”
물론 그 많은 관심 앞에서도 주눅 들거나 휘말리는 일은 없다· 귀찮음이라는 건 익숙해지지 않고 계속 귀찮은 것이라 문제일 뿐·
[ 주인님 인기 많으시네요? 아 맞다· 입 열면 안 되지· ]
헤라가 대뜸 떠들다가 입을 꾹 닫았다·
쯧 혀를 한 번 차고서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도착한 뒤에는 일부러 가장 인기가 없는 구역을 찾았다·
많은 마법사가 지루해하는 ‘조화’계열 도서들이 집약된 곳· H-42· 그곳에서 중간 평가의 공지를 살폈다·
[ 중간 평가 공지 일람 ]
▶ 내일부터 중간 평가를 진행함·
▶ 장소 : 마법 박람 기관 ‘사포어’
▶ 담당 교수 : 브로디
▶ 박람을 마친 뒤 상세한 평가 방식을 공개할 예정·
“마법 박람 기관이라·”
평가에 대해 압박감 따위는 당연히 느끼지 않는다만 마법 박람 기관이라는 말에 흥미가 동한다·
박람회는 이전 세계에서도 내가 흥미를 가졌던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마법의 개량ㆍ발전 및 진흥을 꾀하기 위한 온갖 마법들이 모이는 전람회이니 흥미를 가지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성 한 명이 내 옆에 서서 자연스레 책 하나를 집었다·
『 엘프들은 조화 마법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가 』
그건 번역자 수준이 영 엉망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북부의 루멘에서 돌연히 나타난 용병 한 명이 전황을 뒤집는 일이 있었습니다·”
워낙 맥락이 없는 말이라서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H-42 구역에 있는 것은 나와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녀는 말을 잇는다· 그녀는 지금 내게 말을 거는 것이 확실하다·
“중심부의 대수림에서는 갑작스레 등장한 상인 한 명이 상권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난리가 났죠·”
탁 소리가 나게 그녀가 책을 덮는다·
“그리고 현재 동부의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F등급 학생이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들어내는 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그녀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위장(僞裝)의 귀재· 일족의 자랑· 마이에브님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또 한 번 경이로운 여흥을 즐시는군요·”
“····”
내 이름은 마이에브가 아니다· 그런 별칭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살핀 직후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탁─·
책을 덮었다·
마나의 기운이 정순하나 푸른색이 아니라 붉게 정순하다· 쉽게 말해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다·
내가 그녀를 물끄러미 관찰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느껴지는 기감이 여전히 훌륭하십니다· 또한 위장술은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정말로 인간 마법사 같습니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고 또 다행입니다· 마이에브님을 찾는 것은 저희조차 쉽지 않아서···· 일족들의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위장 일족 우려·
그 세 가지 단어만으로도 내가 모종의 일에 휘말렸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내게 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결코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도 않다·
‘마이에브라고 했나·’
동부와 중심부에서 위장 능력을 이용해 대사건을 일으킨 마이에브라는 인물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나와 마이에브를 혼동하고 있다·
정보가 더 필요하다·
잠시 장단을 맞춰주어서 나쁠 것은 없을 터·
나는 슬슬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우선 물건은 언제쯤 운반하실 계획이십니까? 공주님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왼손을 향했다· ‘물건’이라는 게 헤라를 말하는 모양인데·
그러고 보니 이것은 애당초 장물이었다· 누군가가 꼬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은 않다·
다만 인간이 아닌 이들의 물건이었다는 것이 조금은 예상외다·
다행인 점이라면 그녀가 나를 훔친 쪽이 아니라 운반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나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그래도 된다· 이쪽을 갑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보고는 내가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죄송합니다·”
여성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점조직이다 보니 쥐덫을 치우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꼴에 아카데미라고 쥐새끼가 왜 이렇게 많은지····”
쥐새끼라·
아마 유시아가 언급했었던 최근 악인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와 관련된 것일까 싶다·
나는 넌지시 그녀를 떠보았다·
“참 요란하게도 했더군·”
그녀가 더더욱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이번 쥐새끼들은 덩치가 상당히 커서 사지를 잘라내고 눈알을 뽑은 후···· 몸통을 서서히 태워 죽였습니다·”
생각만큼 나쁜 녀석들은 아닌가·
확인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녀는 운반을 언급하기 전에 ‘우선’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본론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운반이야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그렇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그 건방짐에 대한 처벌은 나중으로 미루겠다· 우선 본론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하도록·”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박람 기관 사포어에 일족 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요인 암살 물건 탈취· 양쪽 모두 순조로울 듯합니다·”
물건 탈취·
내 관심사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마법 박람 기관에서 탈취할만한 물건이라는 건···· 아무래도 마법 도구밖에 없을 테니까·
조금 돌려서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떻지·”
“예?”
“그 물건 말이다· 값어치가 있나·”
내 시선을 마주하자 여자가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쁘게 입을 움직였다·
“저따위가 어찌 감히···· 마이에브님께서 그토록 염원해왔던 물건이니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할 겁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도 모르는 사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걱정이나 염려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다만 그 물건이 무엇일지 흥미가 먼저 솟아올랐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