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이상·”
마침내 설명이 끝났다·
슬슬 박람회에 갈 시간이 되었으므로 플란은 미련 없이 강의실을 떠났다·
그러나 남겨진 쪽은 미동조차 없다· 그들에게는 플란을 붙잡을만한 겨를이 없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강의실·
마침내 정적을 깬 것은 사람의 말소리가 아니다·
사각사각─
한 명이 필기를 홀린 듯이 시작하자 나머지도 곧바로 그것을 뒤따라 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플란의 설명을 이해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경이로운 것에는 누구나 감탄할 수 있는 법이기에·
그들은 그저 이 ‘경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
헤일리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 역시 일단은 한 명의 마법사였다·
이런저런 것들을 질문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대상이 플란이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방금까지의 설명을 눈감고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중이 쉽지 않다· 플란에 관한 생각이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바람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집중하자· 집중·”
그렇게 중얼거려 보지만 집중될 턱이 없다·
수 없이 존재하는 마나 회로중 핵심만 관찰하는 안목 그리고 그곳에 들어갈 정량을 오차 없이 계산해내는 방식·
온전히 집중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난이도인데···· 현재 그녀의 머릿속에는 잡생각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단은 필기만 해두고 나중에 다시 살피자· 헤일리는 그리 마음먹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노트와 필기구를 지참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각사각─·
세상이 헤일리만 남겨두고 흘러가는 느낌이다· 모두가 필기에 열을 올리는 와중 본인만 행동이 없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
조심스레 옆 여학생의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렸다·
그러나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완전한 무아지경에 빠진 그녀는 아예 헤일리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했다·
헤일리에게도 남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릴만한 용기는 없었다·
‘혼자서 하지 뭐·’
이론은 그냥 기초적인 토대일 뿐이다· 그걸 체화하고 응용하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혼자서 노력한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하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당연히 무리다·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필기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뒤늦게라도 하려 하니 할 방법이 없다· 헤일리가 답답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혼자만 동떨어지는 것이 뒤처지는 것이 두렵다·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역시 하나 뿐이었다·
◈
‘사포어’는 메르헨 아카데미의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부지 밖에 따로 존재한다·
애초에 특정 공간이나 건물을 가리킨다기보단 지역을 지칭하는 의미에 가깝다·
그 박람회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여 웬만한 단어로는 함축할 수가 없는 탓이다·
이제 교수의 인솔하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되는데···· 학생들이 마차에 오르는 속도가 좀처럼 나질 않았다·
“교수님·”
인솔에 나서야 할 브로디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교수님?”
“응?”
교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비로소 생각났다·
베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희 마차는 어떻게 타요?”
“···그냥 타라· 네 명씩 원하는 대로 짝지어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만이 브로디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질 않고 머리가 멍했다· 어디라도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플란· 이유는 당연히 그 소년이었다·
교수인 자신조차 학습하게 만드는 그에 대해 마법 학부를 뒤집어놓은 그에 대해···· 여전히 많은 고민이 서로 꼬리를 문다·
그러나 이해되지는 않더라도 인정은 할 수밖에 없었다·
─제 교직을 걸겠어요·
문득 바이올렛의 그 한마디가 떠오른다·
확신에 넘친 눈빛과 울분으로 토해내던 그 용기· 브로디는 그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하· 알겠습니다~”
베키는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뒤돌아섰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플란과 같은 마차에 올라타기로 미리 선약을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야 플란! 너 왜 하필 나를 소환했어!
─내 소유니까·
─뭐 뭐 뭐 뭐 뭐 뭐?
···내 소유라니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무슨 뜻이 있기는 그냥 말한 그대로겠지 근데 말한 그대로면 더 엄청난 거 아닌가····
어느덧 얼굴이 새빨개진 베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일단은 마차에 같이 타자는 약속을 잡은 게 중요한거다·
“누구랑 타지···?”
“어색하게 가는 건 싫은데·”
학생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누구와 함께 갈지도 꽤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마차가 문제가 아니잖아 너희들 필기는 했어?”
“못했어· 애초에 판서 된 게 없었잖아·”
“망했네····”
좌석에 관한 문제가 우스워 보일 정도로 학생들은 플란에 관한 이야기에 열중이었다·
“신기하네·”
베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보통 망했다는 말은 ‘시험 과목’을 향해서 나오는 말이다· 당연한 거다· 성적은 결과로 보란 듯이 남으니까·
한데 오늘 플란의 강의는 그렇지 않았다·
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당장 응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전혀 아니다·
다만 질적인 차원이 달랐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열망을 플란이 톡톡히 건드려준 것이다·
“어떡하지? 본인한테 물어볼까?”
“···미쳤냐? 그럴 거면 네가 가·”
“미안· 없던 이야기로 하자·”
더 신기한 것은 누구 하나 플란에게 직접 가서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 말이 틀렸다·
생각은 하는데 엄두를 내지 못하는 중이다· 날이면 날마다 그의 위상은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 뿐인가?’
베키는 그리 생각하며 제 노트를 보았다· 플란이 45분간 설명한 것을 최대한 담아본 노트였다·
『조화와 보조 계열의 충돌 현상에 관하여』
『엘프 지역 방언 화자에 따른 발음 연구』
·
·
·
플란의 요구대로 요약한 논문이 벌써 몇 개나 된다· 그 덕택일까 베키는 오늘 강의도 그럭저럭 필기할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한 필기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그렇지 않겠다만·
그래도 뿌듯하고 또 도움이 된다·
평민인 베키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접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숨을 쉬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에 돈이 드는 게 마법사다·
그러나 플란 덕에 수없이 많은 자료를 무료로 접하게 되었다· 그는 상점에서 구매해야만 하는 논문들도 베키에게 맡기곤 했으니···· 힘듦은 잠시고 성취는 컸다·
다만·
“좀만 더 다정하면 좋을 텐데····”
아니지 근데 또 다정하면 플란이 아니야·
지금 모습이 멋진 거라고·
“그래· 그런 거지 뭐····”
제멋대로 생각을 정리한 베키는 마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베키· 베키!”
반갑지 않은 목소리다· 베키는 어색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니였다·
“방금 플란이 설명한 거 혹시 필기했어?”
“엥?”
저도 모르는 사이 베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말이 걸려 오면 한 번도 빠짐 없이 시비였는데 오늘은 조금 이유가 달랐으니까·
“필기한 사람 찾고 있는데~ 다들 제대로 하진 못했더라고·”
“아아 응·”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았으니까·
“근데 너 플란이랑 엄청 친하잖아! 필기도 했지? 부지런히 적는 거 다 봤어·”
너 플란이랑 엄청 친하잖아·
그 한마디가 뭐라고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그러나 기분이 좋아져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플란을 향해 쏟아온 자신의 노력을 그다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음···· 내 성적 알잖아· 그냥 낙서만 한 수준이야·”
공유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니는 좀 싫다· 그녀는 헤일리나 아리아와 어울리는 인물이니까·
“그래? 아···· 그래 뭐·”
“응·”
“그래그래· 뭐 그럴 것 같았어~”
제니가 휙 뒤돌았다· 멀어지면서 중얼거리는 험담들이 조금 소름이었다·
베키는 이번에야말로 다시 마차를 향해 걸었다·
“베키·”
그런데 또 베키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후 소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
관리를 잘 받은 것이 티나는 윤기 있는 금발 베키와는 가장 거리가 먼 귀족 여식·
헤일리였다·
◈
“····”
헤일리는 말없이 베키를 바라보았다·
필기를 구하려니 선택지가 없었다·
플란에 관해 묻는 것을 루이스에게 하긴 싫었고 당사자에게 묻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제니를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았지만···· 당연히 그녀들도 필기에 성공했을 턱이 없었다·
“···왜? 무슨 일인데?”
베키가 조심스레 물었다·
“····”
그러나 헤일리는 여전히 베키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나마 쉽고 쉬운 방법을 찾아서 베키에게 온 건데 막상 입을 여려니까 쉽지 않다·
···고작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베키와는 말을 섞을 이유조차 없었는데·
“저기 볼 일 없으면 나 마차로 가봐도 될까?”
“아 다른 건 아니고·”
결국 헤일리는 말을 돌렸다· 베키에게 노트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혹시 루이스 봤나 해서· 같이 마차 타야 하는 데 안 보이네·”
“루이스?”
베키가 검지 끝으로 마차 하나를 가리킨다· 그곳에는 루이스가 혼자 앉아있었다·
그냥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헤일리는 곧바로 루이스를 향해 움직였다·
“루이스!”
헤일리가 루이스를 향해 소리쳤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아 헤일리·”
“여기 있었구나? 내가 다른 마차를 잡아둘까 했는데·”
그런데 마차에 헤일리가 발을 올린 그 순간·
“미안· 여기 자리가 다 차 있어서·”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헤일리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플란한테 물어볼 게 많아서 내가 마차에 같이 타자고 부탁했었거든·”
“그럼 두자리나 남잖아· 내가 타도 괜찮은 거 아니야?”
루이스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아 저기 온다·”
루이스의 시선을 헤일리의 시선이 뒤쫓는다·
플란 뒤로 베키와 유시아가 졸졸 뒤따르고 있었다· 루이스가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저렇게 두 명이 또 플란한테 부탁해서 우리끼리 이렇게 네 명이서 타기로 이야기가 됐거든·”
“그럼 나는····”
“미안 근데 이런 기회는 또 있을 거잖아· 다음에 같이 앉자·”
“····”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굳어버린 헤일리를 지나쳐 다른 세 명이 마차에 올라탔다·
“플란 나 옆에 앉아도 되지? 아까 말했던 대로·”
“짐칸에 탈 순 없나·”
“박람회~ 박람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닫힌다·
“아 플란 경! 논문들 추려왔습니다!”
“베키는·”
“으아아악! 유시아! 왜 하필 그 이야기를 꺼내서!”
천장이 뚫려있는 마차로부터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네 명이면 야광 퍼즐 하기 좋습니다!”
“그래· 다 같이 한 번 해볼까 그럼?”
“와···· 루이스 너 대박이다· 이걸 해줘?”
“치워라·”
계속 새어 나온다·
그중에서 헤일리의 말소리는 하나도 없다·
“뭐야· 야! 맞는 부분이 없는데?”
“베키 양···· 거꾸로 들고 있습니다····”
“어? 그러네?”
“아하하···· 애들아 천천히 해·”
“좀 치워라·”
끝도 없이 새어 나온다·
헤일리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남의 ‘일상’을 바라보며 이토록 부럽고 조급했던 적이 있었던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저 끝의 지평선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지금의 헤일리는 절대로 끼어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근데 이거 진짜로 야광이야? 정말?”
“그렇습니다! 다들 가까이 모여보십시오!”
“이렇게···· 가리면 되려나?”
“치우라고 세 번째 말한다·”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다·
“와! 이거 뭐야! 형광으로 빛나는 거 이쁘네?”
“그렇습니다! 이게 야광 퍼즐입니다!”
“오···· 플란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파앙─!
“아아앗! 내 야광 퍼즐이!”
“야 플란! 뭐해!”
“하하하하···· 되게 웃긴다·”
“나가·”
그 모든 순간·
헤일리는 그저 발끝만 바라보았다·
◈
“···우와 당신 뭐에요?”
사포어에 도착한 후 내가 학회장에게 들은 첫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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