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호화로운 저택에서 맞이하는 아침 식사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입맛을 돋우는 향 부드러운 식감 적절한 조화 집고 사용하는 맛이 있는 커틀러리·
이쪽 세계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카플란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다만 소년의 누나가 뚫어져라 노려보지만 않았다면 조금 더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었을 텐데·
‘기사의 표본같은 여자로군·’
스칼렛 유디트· 플란이 그녀를 마주치고서 내린 짤막한 감상이다·
칠흑같은 어둠을 취한 검은 머리카락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말꼬리처럼 묶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길이· 검사로서는 꽤 거슬릴텐데·
하지만 여인으로서는 훌륭하다· 외모의 매력을 배로 키워주고 있다는 점만큼은 자명했다·
그녀는 이 가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눈동자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의 차이는 존재한다·
거울로 본 소년의 눈동자는 투명한 보석같았지만 여기사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에 가깝다·
“식기 사용이 제법 능숙해졌구나·”
날카로운 눈빛과 말투· 그 자체가 하나의 검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꽤나 이름 높은 기사일 것이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비루한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많은 것들을 증명한 뒤로는 귀족처럼 살았다·
따라서 이런 사소한 것들은 그의 몸에 습관처럼 배어있는 것이다·
또한 밤새도록 이 세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이전 세계와 이 세계의 식기 예절이 똑같다는 점을 인지했다·
“따로 연습한건가·”
“딱히·”
그러자 스칼렛이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매로 소년을 쭈욱 훑는다·
그도 그럴 것이 플란은 평소 스칼렛과 마주 앉아있으면 손을 벌벌 떨기 바빴다·
그런데 오늘은 식기 사용이 퍽 능숙하고 또 태연하지 않은가·
“쓰레기·”
쓰레기· 식사중인데 스칼렛이 난데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버릴게 있으니 하녀더러 가까이 오라는 뜻인가? 플란은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어이 쓰레기·”
그녀가 재차 중얼거렸고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는다· 그녀는 물끄러미 플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쓰레기··· 지금 설마 나를 부른건가?”
“너 아니면 누구겠냐· 화염 기사 가문에서 불쏘시개도 안 되는 것들은 쓰레기라고 부르는 법이지·”
그래도 그렇지 동생을 쓰레기라고 부르나·
이 집안도 알법하군· 플란은 무시하고 조용히 식기를 움직인다·
그는 스칼렛의 발언을 굳이 기분나빠해가며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남이니까·
“아카데미 마법학부에 지원해서 합격했다고 들었는데·”
플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모양이니까·
“계속 다닐 생각이냐·”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과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순수히 식사를 즐기고 싶을 뿐인데 자꾸만 끼어드는 소음이 슬슬 귀찮다·
만약 제자가 식사 도중 이러한 짓을 했더라면 염동력으로 그 귀를 잡아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소년의 저택이고 눈 앞에 있는건 소년의 누나라고하니까·
그러한 사실이 카플란의 인내심을 조금은 늘려주었다·
한편 스칼렛이 재촉해온다·
“쓰레기· 계속 다닐거냐고 묻잖냐·”
“다녀야지·”
진리와 지혜를 추구한다는 아카데미쪽에 흥미가 조금 더 생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부드럽게 움직인다·
적절히 조리된 스테이크를 포크로 찔러 양념이 입에 묻지 않을 크기로 작게 썰고는 입에 넣는다·
향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칼렛의 미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왜 자꾸 쳐다보는거지·”
“······”
스칼렛은 조용히 아랫 입술을 핥으며 남동생의 모습을 살폈다·
조금 달라졌다·
아니· 조금 달라진 수준이 아니다·
기품과 격조가 가득한 태도· 자기 확신을 넘어서서 오만함의 경계에 걸쳐진 자신감·
도대체 뭐지· 심지어 말투도 아예 달라졌다·
잠시 턱을 괴고서 골몰한다· 도대체 무슨 계기가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 변화했는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엉망이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플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허공에서 마주친 둘의 눈동자·
“식사 도중 턱을 괴는게 이 가문의 예절인가? 아닐 것 같은데·”
“······하·”
스칼렛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감히 스칼렛을 지적한건가? 틀린 지적은 아니다만 소년은 지금 본인의 주제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쓰레기· 그렇게 당당하면 안 될 텐데·”
스칼렛이 신경질적으로 종이 한 장을 탁 소리가 나게 올렸다·
“북부는 굉장히 추웠다·”
표정에 진지함을 한 층 더하고서 말을 이어나간다·
“적을 베고 졸음을 베고 추위를 베고 무엇이든지 베어가며 버텼지· 왜였을까·”
플란은 솔직히 그 이유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진지한 이야기 앞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예의가 없지는 못했기에 조용히 포크와 나이프를 멈추었다·
“유디트·”
스칼렛이 제복 가슴팍에 있는 문양을 가리킨다· 활활 타오르는 한 자루의 검을·
“그저 유디트를 위해서다· 우리가 쌓아올린 가문의 위상은 결코 실추되어서는 안 돼· 그런데·”
올려진 종이를 스칼렛이 손 끝으로 슬며시 밀었다· 플란은 조용히 그것을 받아살폈다·
[ F ]
메르헨 아카데미의 인장 여러 과목들 합격했다는 사실·
여러가지가 적혀있었지만 결국 핵심은 등급이었다·
“복귀하자마자 전달받은 자료다· 내가 이따위 것이나 받으려고 복귀했단 말이냐·”
플란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무슨 취급을 받건 어느 정도의 기량을 보여주었건 그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건 지금 소년의 몸 안에 깃든 것은 대마법사의 영혼이라는 사실 단 하나다·
그 태연한 표정과 침묵이 스칼렛을 더더욱 진노케했다·
“그만둬·”
나이프와 포크를 소리나게 내려두며 스칼렛은 그렇게 말했다·
“무엇을·”
“당연히 아카데미지· 마법학부는 그만두고 검술학부로 다시 지원해서 입학해·”
“그러지 않는다면·”
“넌 더이상 유디트가 아니게 되겠지·”
잔불처럼 타오르는 스칼렛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넌 유디트의 수치다· 내가 가주님처럼 너그러울거라고 생각하지마라· 네가 가문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꼴을 가만히 두고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실추?”
“그래· 실추· 기사 가문을 달고 마법학부에 지원했다는 사실 자체가 웃음거리가 되기엔 충분한 사실이다·”
“음·”
“심지어 등급도 바닥이지· 가문에 민폐를 끼치는 입장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칼날 위를 걷는듯한 분위기·
주변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하녀들은 툭 건드리면 울 것처럼 울상이었다·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앞자락을 주먹으로 꽉 쥐는 하녀들도 꽤 많았다·
그러나 카플란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린다·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리지·”
스칼렛이 정색한다·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타올랐다·
“내가 이 가문의 위상을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큰 영광을 안겨준다면?”
“최하등급이··· 내게 장난을 치나·”
아주 오래전 힘없는 카플란을 무시하던 누군가와 스칼렛의 표정은 똑같았다·
그래서 익숙하다·
잠시 후 스칼렛이 플란을 재차 불렀다·
“어이 쓰레기·”
“뭐지·”
“기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뭔 줄 아나·”
결투? 글쎄 마법사의 길을 걸어온 그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
“증명·”
“증명?”
“그래· 증명이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해온 네가 도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어서 영광을 안겨준다는 말을 하는거냐·”
증명·
증명이라·
그 단어를 두번 세번 곱씹다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놀랍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와 똑같지 않은가·
“뭐든 증명하지·”
“뭐든 증명하겠다고?”
“그래· 난 단지 마법을 하고싶을 뿐이니·”
손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 스칼렛이 손으로 제 턱을 문지른다·
“뭐든지라···”
남동생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생전 처음이라·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조금은 궁금해진다·
하여 미묘한 표정으로 묻는다·
“시간을 줘도 증명하지 못하면?”
“내거는 조건에 응해야겠지· 가문에서 쫓겨나든 검을 쥐든·”
스칼렛의 고민이 길어진다·
“그럼 이렇게하지·”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기한은 중간 평가까지· 등급은 최상등급으로 올려놓을 것· 또한 마법학부 재학 도중 유디트 가문이라는 것은 언급하는 것은 절대로 안 돼·”
스칼렛이 깍지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 위에는 자신의 턱을 받쳤다·
“이게 내 마지막 자비다· 어떠냐·”
“받아들이지·”
플란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증명에 성공한다면 다시는 내 일에 간섭하지 마라·”
“성공한다면 그렇게 하지· 만약 실패한다면 유디트는 너같은 쓰레기를···”
“이만 가보지·”
카플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칼렛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었다· 실패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과거의 기억 몇 개가 떠올라 비산한다·
그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은 늘 있었다·
숱한 것들을 증명해냈고· 증명의 상으로 요구했던 건 늘 같았다·
더이상 그에게 간섭하지 말 것·
그거면 충분하다·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그를 원망하든 찬양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 식사가 안 끝났는데 어딜!”
뒤에서 격노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발을 멈추지 않는다·
“가볼까·”
이제 아카데미에 갈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단지 증명할 뿐이다·
◈
아카데미 제복이 영 어색하다·
아무튼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저 걸어서 갈 생각이었다·
베키와 걸었던 경로를 뇌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길을 반대로 걸어서 아카데미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도련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처음보는 탈것이 하인 하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바퀴가 네 개 달려있는 이것의 외형은 마차와 별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앞에서 이끄는 말이 없다는 점 정도일까·
‘본 적이 있다·’
저택에 온 첫날 밤을 새가며 보았던 서재에는 분명 이 탈것을 향한 개요가 적혀있었다·
명칭은 자동차였지·
“스칼렛 아가씨께서 중간 평가 전까지는 도련님의 등하교를 보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거나말거나 내 시선과 관심은 오롯이 자동차를 향해있었다·
말이 이끄는 힘 없이 차체를 움직이는 원동력· 그저 그것이 궁금했다·
“이걸 움직여봐라·”
“예? 우선 도련님께서 타셔야···”
“어서·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머뭇거리더니 하인이 자동차의 앞 좌석에 탔다· 잠시후 부웅 하는 소리가 들리며 차체가 덜덜거린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그것을 다각도에서 살핀다·
외형 뿐만 아니라 떨리는 차체에 손을 얹어 내부 마나의 흐름도 살폈다·
‘4개·’
핵심부에는 마나를 머금은 네 개의 통이 있었다·
그것들이 쉬지않고 제 역할을 다한다· 흡기 압축 폭발 배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이 세계는 이런식으로 진보했나·
괜히 흐뭇하다· 어쩌면 승부욕이 피어오른다·
“저··· 도련님! 슬슬 출발해야···!”
“지금 타지·”
“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살폈다·
베키와 걸을때는 밤이라 보지 못했는데 찬연한 햇빛을 받은 바깥은 제법 볼만했다·
다른 세계로 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정문 생동한 꽃과 나무가 잔뜩 심어진 길·
차마 그 수를 셀 수도 없을만큼 다양한 건물들·
그 모든것을 품은 메르헨 아카데미·
···앞으로 내가 증명할 장소였다·
“수고했다·”
“예!”
내리고나니 적응해야할 것이 많았는데· 우선 수많은 인파였다·
학생 교직원 그리고 그 외 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인파를 실제로 보니 마치 구름같다·
이제 무엇부터 해야할지 가만히 서서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동시에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표정이 자연스레 구겨진다·
나는 뒤를 돌아서 범인을 확인했다·
“······넌·”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란!”
그래 베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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