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베키의 인도를 받아 커다란 강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앞에는 교단· 그리고 그것과 마주보도록 넓게 펼쳐진 부채꼴 형태의 강의실·
생김새 자체는 뭐 평범하다·
굉장히 넓은 장소였으나 학생들이 가득 채워지고나니 조금 협소해보인다·
양 옆에 누군가가 있는 건 싫어서 왼쪽에 벽을 두고 앉았다·
오른쪽에 누가 앉든 상관 없었지만 베키가 쪼르르 와서는 앉는다·
지금에서야 안 사실인데 베키는 향수 냄새가 꽤 짙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휴우~ 그래도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이라 마음이 좀 편하네·”
“오리엔테이션?”
“응· 앞으로 뭘 가르칠거고 평가는 어떻게 진행할거고 그런것만 알려주고 끝· 첫날은 이래서 좋아!”
자유시간이 많은건 나쁘지 않지·
아직 아카데미의 상황도 다 살피지 않았으니 말이다·
베키가 기지개를 쭈욱 편다·
“내일은 등급에 따라서 반을 나누니까··· 오늘 진짜 푹 쉬어둬야겠어·”
“등급에 따라서 반을 나눠?”
그 말이 살짝 거슬린다·
실력이 비슷한 이들을 한데 묶어서 교육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지금 이 소년의 등급이 F로 배정되어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왕이면 가장 수준 높은 녀석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당연한거다·
특정 집단의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무릇 그들의 대표를 살펴야하는 법이다·
이 아카데미의 최고 실력자들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런 것들에 흥미가있지 의욕도 없는 녀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싫었다·
“현재 배정받은 등급을 토대로 나누는건가·”
“아니? 내일 새로 테스트를 하지·”
그런거라면 괜찮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간다·
베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괜히 번거롭다· 그렇지?”
“무엇이·”
“네 말대로 현재 배정받은 등급을 토대로 나누면 편하고 좋잖아· 어차피 A인데·”
“너는 A인가·”
“아슬아슬하긴했지만 A 받았지· 아니 것보다 그 반응은 뭐야? 너도 A잖아·”
베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서 이쪽을 쳐다본다·
“아니다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주었다· 나는 F였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베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무시했다·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에 더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뭘로 합격했어?”
“환혹·”
“환혹? 와 그 어려운걸·”
“말도 마라· 너무 긴장해서 뒤지는 줄 알았어· 두 번 실패하고 마지막에 겨우 성공했다···”
강의실 내부는 활기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소음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 끝나면 뭐할래?”
“직접 생각해봐·”
“오리엔테이션 끝나면 뭐할래?”
“······”
이런 이야기들은 특히 반가웠다· 으레 그들 나이대의 대화였으므로 풋풋하다·
“무슨 등급으로 입학했어?”
“나야 뭐···평범하지· 너는?”
“나도 뭐 평범해· 하던대로지· 넌?”
다만 활기차고 반가운 감정은 이내 차게 식는다·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기기보다는 탐색과 신경전을 벌이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저게 평범하지·
그러다 갑자기 베키가 검지로 나를 쿡쿡 찌른다·
그리고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자기 귀를 검지로 툭툭 쳤다· 마치 이것좀 들어보라는 듯·
그러고보니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대화가 있었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그거 봤어?”
“뭐· 아 뭐 말하려는지 알겠다·”
“그래! 아고라 보드!”
아고라 보드·
누군가가 붙인 불씨는 이내 화재가 되어 삽시간에 번진다·
온 강의실이 아고라 보드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푼거야?”
“교수들끼리 신경전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괜히 기죽는다니까·”
“다들 자리에 앉아주세요·”
그때 갑자기 귀에 꽂히는 차분한 여성의 음성·
강의실 앞에 웬 여자가 나타났다·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 같던 화재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에 의해 진화된다·
말 그대로 갑자기였다· 정말 한 순간에 생겼다·
‘투영인가·’
순간이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본인이 온 것은 아니겠지·
자신의 환영을 비추어 강의실 앞으로 투영시키는 방식인 듯 했다·
즉 모든 강의실 내부의 신입생들 앞에 저 여교수를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거지·
역시 교수는 교수다 이건가·
다크서클이 깔려있는 날렵한 눈매·
백색의 긴 머리카락과 제 머리보다 더 큰 고깔모자· 거기다 품이 넓은 로브까지·
솔직히 교수라기보단 마녀에 가까운 첫인상이었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깐깐해보였다·
“바이올렛이에요· 오늘 오리엔테이션 진행할게요·”
그녀의 말투에는 귀찮음도 조금 묻어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모로 꺾으면서 검지로 한 방향을 가리킨다·
“······모자 안 벗어?”
그러자 모자를 쓰고있던 학생들이 허겁지겁 모자를 벗어 내려둔다·
“와 진짜 꼰대···”
베키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에휴 한숨을 푹 내쉬고서 바이올렛이 오리엔테이션을 이어나간다·
“내일 있을 평가는 잠시 제쳐두고 오늘은 기본적인 것만 몇 개 살펴볼게요·”
아까의 어수선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학생들은 전부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의 말에 집중한다·
아니 정확히는 집중하지 않으면 크게 혼날 것 같았다·
일목요연한 그녀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처럼 마법은 다양한 계열에 고루 열중해야 그 성취가 크죠· 그런데 마법이 총 몇 갈래로··· 이건 너무 기본적이었나요?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죠·”
교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며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교수·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조금은 반갑고 또 조금은 생소하다·
“쓰기 전에 읽기가 선행되어야하듯·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는 술식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미 아는 것이기에 여교수의 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보다 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고자 한다·
같은 옷을 입은 학생들 칠판에 술식이 적히는 소리 학생들의 일사불란한 대답·
학생들이 필기하는 잡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작은 감탄사 깨닫지 못한 자는 한숨과 신음···
아무 규칙도 없지만 마치 특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듯 하다·
이러한 것을 술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꽤 재밌을 것 같은데·
속성은 무(無)·
술식의 획은 인원 수만큼·
계열은 조화쪽일까·
그럼 파괴 계열을 조금 섞어주고·
머릿속 생각에 취한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를 유영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탁·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
그 순간 눈 앞에 있던 교수의 모습이 사라졌고 모든 학생들이 화들짝 놀랐다·
실수다·
너무 심취했다· 실제로 간섭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바이올렛의 투영 연결을 끊어버렸다·
머릿속에 술식을 그린다· 급하게 연결을 복구시킨다·
“뭐야 교수님 어디가셨어?”
“아 깜짝아!”
“오리엔테이션 끝난거야?”
잠시 후 교수의 환영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조금 미묘한 얼굴로 학생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
내게 시선을 꽂고는 뚫어져라 바라본다·
머쓱함에 내가 무언가라도 뱉으려고 했을 때·
“···마저 설명하자면·”
그녀는 다시 오리엔테이션을 이어나갔다·
◈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학생들은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신입생 환영회 이후 오늘이 첫 날 아닌가·
그런데도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떠들기도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아무튼 잘 논다·
플란은 다른 세계에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친화력이 없었다·
물론 키울 생각도 없다·
그는 자리에 여전히 앉은 채로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한다·
“흐음·”
실수로 교수의 투영 마법을 끊어버렸단 말이지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다·
여긴 플란의 개인 공간이 아니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함께 지내는 공간이지·
그나저나 이제 뭘 하지·
그가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면서 구경이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넌 강의실 안 나가?”
갑자기 베키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의아했다·
오히려 플란쪽에서 묻고싶었다·
“너는 왜 안 나갔지·”
“음··· 그 물어볼게 남아있어서·”
플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집에서 별 일 없었어?”
“별 일?”
“응· 많이 안 혼났나 해서· 그 뭐야 살짝 좀 오해하시는 것 같던데·”
“아무일도 없었다만·”
“아 그래?”
괜찮다니 배키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머쓱했다·
엄청 엄격한 가문처럼 보였는데 별 일이 없을 수가 있나·
잠시 내려앉은 정적· 이번에는 플란쪽에서 침묵을 깼다·
“너는 안 나가보나·”
“아 나가야지· 점심 먹으러 갈거야·”
“혼자 먹나·”
“그럼 혼자 먹지 누구랑 먹어· 너도 밥 맛있게 먹어· 또 봐·”
베키가 급하게 인사하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가버렸다·
그 동작이 다소 요란해서였을까·
무리지어 떠들던 몇몇 여학생들이 플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플란은 그런 시선을 딱히 피하지 않는다·
한동안 눈싸움이 이어지다가 이내 한 명이 이 플란쪽으로 다가온다·
“저기 너 쟤랑 무슨 사이야?”
“아무사이도 아니지· 왜·”
소녀는 대답 대신 자신들의 무리와 눈빛을 교환한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쟤 평민이잖아·”
“평민?”
“몰랐어? 쟤 완전 거지야·”
별로 신경 안 쓰는데·
하지만 태연한 플란의 얼굴에 더 큰 답답함을 느낀걸까 그녀가 아예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을 잇는다·
“신입생 환영회때도 향수 잔뜩 뿌리고 왔었잖아· 가난한 티 안내려고·”
“말도 남자애들한테만 걸어· 의도가 너무 뻔하지·”
“다들 쟤 싫어해· 주제를 모르니까·”
“흐음·”
아마 이 세계에서도 신분제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흥미가 더 생겼다· 플란 역시 비루한 출신으로 태어나 증명했으므로·
“딱히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은데· 들어보니 좋은 등급으로 입학했고·”
“또 남자애들이 해줬겠지· 쟤 여왕벌· 뭐 그런거잖아·”
그럴 성격같지는 않은데·
진지한 얼굴로 여자애들은 베키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평민이랑은 굳이 어울리지마· 무슨 일 생기고 나중에 알아보면 꼭 평민이잖아·”
“그래 너희 가문에서도 별로 안 좋아할걸·”
그런 말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스칼렛과의 약속이 기억이 나서·
“···나도 귀족은 아니다만·”
플란이 슬며시 웃어주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애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아이씨···”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 시간낭비했다는 듯한 얼굴·
그때쯤 한 여자애가 다른 여자애에게 속삭인다·
“야 얘 그러고보니까 걔잖아··· 헤일리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뭐? 아~ 얘가 걔야? 어쩐지·”
“그냥 가자·”
빠르게 거리를 두는 여자애들을 바라보면서 플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원래 소문따위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 여자애들도 전부 떠나가고 강의실에 혼자 남은 후·
“구경이나 해볼까·”
그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털고 일어나 강의실 뒷문을 막 지나치는데·
“학생·”
복도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러세웠다·
바이올렛· 아까 그 여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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