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인간들이 ‘공허’라고 칭하는 공간·
공주의 커다란 권좌를 둘러싸고 혈귀 간부들이 집결했다· 오늘도 역시 회의는 이어지는 중이었다·
“관찰해본바 ‘표적’의 역량이 예상 외입니다·”
‘표적’이란 겨우 인간 마법사 한 명· 플란이었다·
비서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참고로 공주는 오늘도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든 채였다·
‘소녀’의 시선이 구석에 서있는 마이에브를 향했다· 마이에브는 아까부터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마이에브한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아~? 어쨌든 물건을 못 가져왔으니까· 그건 임무 실패지!”
“그건 또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죠·”
‘가면’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덕분에 또 재미있는 인간을 찾아내지 않았습니까·”
“재미? 아···· 그래 뭐 기대 이상이긴 한데·”
“장갑만 빼 왔더라면 아쉬울 수준이죠· 푸른 화염이 특색을 잃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둘의 대화를 들으며 비서는 경기장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본에 충실한 마법 그러나 그 기본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뿌리 깊고 견고하다·
근본(根本)·
감히 그렇게 칭할만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혈귀 간부들의 의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녀’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표적은 앞으로 어떡할 거래?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지지 않으면 죽여야지· 안 그래?”
“토벌제에 나간다고 하더군요·”
“···하? 마법사가 토벌제? 머릿속이 궁금해지네~”
그런데 그 때·
“흐아암~ 그 녀석은 예측이 안 되는 행동을 하지···· 그게 재미있는 거야····”
“!”
공주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간부들 전원이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공주님· 다음 명령을 내려주세요·”
비서가 간부들을 대표하여 물었다·
공주는 하품하면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찔끔 맺혀있는 채였다·
“물건의 범위를 변경할 거야····”
“범위요?”
“으응· 장갑을 끼고 있는 그 녀석 통째로· 앞으로는 이게 물건의 정의야· 흐아암····”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었으면 이 명령에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면을 보내서····”
“아니·”
공주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가녀린 팔이 곧 힘없이 픽 쓰러진다·
“좀 이용하고 데려오자···· 토벌제잖아····”
“토벌제···· 이용할 구석이 많긴 하죠· 규모가 규모니까요· 어느 방향으로 굴려볼까요?”
“우선 상권을 장악해야겠어····”
토벌제·
마수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겨루는 축제 그것은 결코 하루이틀로 끝나는 일정이 아니다·
식료품 장비 영약···· 다양한 물자들이 투입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쉽게 말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본이 굴러가는 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들 상대로 장비 팔아먹는 것만큼 쏠쏠한 것도 없어~ 걔넨 무지막지하게 싸우니까·”
“아니·”
또 한 번 공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가녀린 팔이 이번에도 힘없이 픽 쓰러진다·
“우린···· 무조건 마법사 쪽으로 투자해····”
“···!”
간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면’이 크게 당황한 얼굴로 되묻는다·
“공주님? 마법 학부는 표적을 포함해서 한 조 출전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상권 장악과는 거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표적이 뭐라도 해내겠지···· 우린 미리 선점하는 거야···· 마법 학부의 물자를 독점할 수 있도록····”
“우승이라도 하는 게 아니면 그 독점도 의미가 없다고 사료됩니다만····”
가면이 말을 하던 도중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강하게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 정도는 해야 물건이지····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응····”
결국 그렇게 결정되었다· 혈귀의 태생을 타고난 순간 이미 공주에게는 거역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그 때·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혈귀 여인 하나가 손을 들었다· ‘침묵’이라고 불리는 간부였다·
“왜····”
공주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침묵은 수화를 시작했다·
[ 이번 토벌제는 황실 측에서도 눈여겨보고 있어· ]
“황실 전체는 아닐 거 아냐···· 누가····”
[ 둘째 황녀· ]
[ 곧 죽을 몸이라서 그런가· ]
[ 요새 마법에 관심이 많나 봐· ]
“황실···· 황실이라고····”
공주가 입맛을 다셨다·
“좀 귀찮긴 하겠네···· 다들 위장에 유의하고····”
공주가 또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마지막으로 마이에브한테 하나만 전달하고···· 회의 마칠게····”
손이 천천히 지면으로 떨어진다·
새근새근─
“····”
이내 잠든 공주의 숨소리가 공허를 가득 채운다· 간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마이에브의 얼굴 위로 부담감이 잔뜩 떠올랐다·
마이에브가 마지막 하나를 전달받을 때까지 간부들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하다·
◈
“기숙사···· 기숙사····”
아침에는 트릭시를 토벌제의 마지막 일원으로 맞이하고 점심식사까지 마친 후 베키는 플란의 방으로 향했다·
다음 훈련은 플란의 방에서 이루어진다는 다소 특이한 지시 덕분이었다·
베키는 걸으면서 본능적으로 트리비아를 펼쳤다·
요새 자신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이 꽤 많아져서 그것들을 피하려다 보니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오 이것도 못 할 짓이네·”
베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베키 얘는 도대체 뭐냐 ]
[ 1학년만 뽑을 거면 엄선하고 엄선해서 뽑는 게 정상적인 판단 아닌가? 평범한 애를 도대체 왜 뽑아? ]
[ 여자친구라서 뽑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
[ 낙하산은 좀 심각한 문제 아닌가· 공식 종목에서· ]
[ 아니 뭐···· 공식 종목이라고 해봤자 최근에 우리는 제대로 출전한 적도 없었잖아· ]
트리비아의 자유 게시판은 온통 토벌제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덕분에 매 순간이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이런 식으로 글을 남기는 이들의 마음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자신은 평범했으니·
“내가 신청한 게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베키는 본인 주제를 잘 알았다· 토벌제의 대표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플란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보면 속상하기만 하다·
“음···· 근데 여자친구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런데 또 플란의 여자친구로 오해받는 기분은 나쁘지만도 않고 오묘하다·
이렇다보니 트리비아를 안 보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눈이 가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트리비아를 쳐다보며 걷던 중·
퍽─!
누군가와 세게 부딪혀버렸다·
“앗!”
베키는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대방도 빈손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몸 위로 차디찬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차 차가워!”
“아···· 진짜· 어떤 미친년이····”
빠르게 갈 길을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끝날 분위기는 아니었다· 명함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색이 다르다· 노란색 명함이라면···· 2학년이다· 또한 귀족인 듯했고· 선배들이 넘어진 베키에게 말했다·
“눈 똑바로 뜨고 안 다녀? 아···· 방금 막 산 건데····”
“죄 죄송합니다·”
베키는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피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린 후 베키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최대한 빠르게 멀어지는데도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선배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선명하다·
“저거 걔 아니야? 토벌제 대표로 뽑힌 애·”
“그래? 옷 진짜 꼬질꼬질하더라· 누가 안 사주나·”
“네가 하나 사줘 그럼·”
“미쳤냐· 말이 그런 거지· 누가 저런 년한테····”
베키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토벌제 대표는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가서 차근차근 설명하고 싶었다·
“여자친구라는 소문도 거짓말 같은데·”
“그러게· 저런 애를 누가 좋아한다고····”
“쟤 멈춰 섰는데?”
“놔둬· 젖은 옷 말리려나 보지·”
하지만 고작 설명만으로는 그들의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베키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소녀였다·
저들은 그냥 베키가 싫은 것이다·
평민이라서 옷이 꼬질꼬질해서 사용하는 향수가 고급스럽지 못해서 특출나지 못해서···· 그저 그런 이유로 베키가 싫어질 뿐이라는 것을 베키는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에휴 그냥 가자····”
베키는 고개를 젓고서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그녀의 삶에서는 늘 이게 가장 빠른 해결법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플란의 방에 도착했다· 문은 이미 열려있었고 다들 모여있었다·
“다들 모였나·”
플란이 평소와 같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베키에게 닿았다·
“너는 무슨····”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베키의 피부와 옷이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정화 마법을 응용한 묘리였다·
딱─!
다음 순간 그가 손가락을 또 한 번 튕겼다· 동시에 벽에 걸려있던 그림이 통째로 그들을 집어삼켰다·
학생들은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려진 듯한 풍경과 건물들···· 처음 보는 것들이 눈 앞에 펼쳐져있었다·
“놀라지 마라· 환혹일 뿐이니까·”
학생들은 되레 그 말을 듣고서 놀랐다· 환혹에 불과한 세계가 이렇게 정교할 수 있다니·
플란의 시선이 이번에는 트릭시 쪽을 향했다·
트릭시는 어색하게 한 쪽에 동떨어져 서있다· 아직 머쓱해하는 게 훤히 보인달까·
“안 늦게 왔군·”
“명단에 이름 올렸으니까· 그래서 온 거야·”
“잘 왔다 마법사·”
무뚝뚝한 남자가 내뱉은 세 글자·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의 단어일 뿐인데 그 어감이 주는 깊은 울림이 트릭시에게 묘한 감상을 주었다·
“···그래·”
소녀의 눈빛에는 오늘따라 남색 빛이 짙었다· 그 고요한 호수에는 커다란 각오가 담긴 듯 했다·
희끄무레한 미소가 플란의 입을 거쳐가고 그가 이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일 초도 허투루 쓸 시간이 없다· 오늘 훈련은 ‘원소 극대화’로 하지·”
극대화·
특정 계열의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라면 무릇 수없이 다듬어야 할 소양 중 하나·
그러나 ‘무릇’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것의 난이도 역시 만만찮다· 끝이라고 할 만한 경지가 없기 때문이다·
“원소가 달라져도 결국 극대화의 본질은 같다· 시연은 암석으로 하겠다·”
플란이 손을 뻗자 대리석 기둥의 귀퉁이가 통째로 뜯겨 손아귀에 안착한다·
그런데 대충 뜯겨 나온 것이 아니다· 구체 형태의 대리석은 완벽한 황금 비율을 이루었다·
“겉보기에는 흠결 없는 구체처럼 보이지· 그러나·”
플란이 그것을 트릭시에게 휙 던졌다· 푸른 소녀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서 들게 되었다·
“촉감이 어떻지·”
트릭시가 그것을 잠시 매만진다·
“···의외로 까끌까끌하네· 먼지도 많고·”
“바로 그거다·”
플란이 구체를 허공에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리석 구체가 꼭 살아있는 생물처럼 불순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세 학생의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게 원소 극대화다· 생각 없이 다루는 원소에는 불순물이 대단히 많지· 그것들을 전부 게워낼 때 비로소 ‘순수 원소’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마나의 정순함을 높일 수 있듯 마찬가지로 원소의 정순함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마나의 효율 출력 발현 속도···· 모든 면에서 효과가 상승한다는 것은 굳이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트릭시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출력을 높일 생각만 했었지 원소 자체를 정순하게 가다듬을 시도는 한 적이 없었다·
양옆을 살펴보니 루이스와 베키의 표정도 비슷하다· 마찬가지인 듯했다·
“얼음 화염 빛···· 너희들은 각기 다른 원소를 다룬다만 앞서 언급했듯 본질이 같다· 어렵지 않아·”
플란이 허공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푸른 마나가 칠해지기 시작했다·
얼음 방벽의 술식이었다·
“베키의 얼음을 예로 들지 회로 중 배합이 겹치는 부분을 모조리 지울 거다·”
배합이 겹친 부분들이 전부 지워지자 얼음이 배로 투명해지는 것이 맨눈으로도 보였다· 충돌하는 마나가 없어진 덕택이다·
화창한 빛이 얼음을 투과하여 육각형으로 쪼개진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학생들의 입이 벌어진다·
“각기 충돌하는 회로를 말소시킨다· 쉽지 않나·”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슨 원리인지는 이해했는데 막상 시도하게 된다면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쉽지 않다면 쉬워질 때까지 한다· 베키·”
“네 네? 아니 어?”
베키가 화들짝 놀라하며 고개를 짓쳐 들었다· 그녀는 플란의 설명을 열심히 필기하던 중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갔다·
“얼음 원소 극대화를 시작해라·”
플란은 조수로서의 베키를 높게 평가한다· 또한 잠재력 역시 인정한다·
그녀는 분명 오늘 극대화를 가장 먼저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베키가 검지로 자기 턱을 가리키고 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훈련은 2시까지만 한다· 시작해·”
“2시면····”
베키의 눈동자가 흘끗 굴러간다· 시계를 살펴보니 현재 시각은 1시 58분이다·
2분 정도는 얼음 송곳 몇 개만 만들어도 금세 지나갈 터· 심적인 부담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때· 트릭시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훈련은 두 시까지·”
“···토벌제가 고작 삼 일 남앗는데 겨우 2분 훈련하겠다는 소리야?”
플란은 트릭시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베키를 응시할 뿐이다·
결국 베키가 허공에 얼음 송곳을 생성해냈다· 지금부터는 이것의 불순함을 덜어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꽝─!
또 다른 얼음송곳이 날아와서 격돌했다· 베키의 그것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그렇게 만든 것은 당연히 플란이었다·
“?”
“실전이었으면 벌써 패배했군· 나랑 장난치나·”
“아 미안·”
베키가 머쓱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해야겠지· 훨씬 신속하게····
다시 한 번 얼음 송곳을 생성해냈다·
꽝─!
“···?”
“느리고 불순하다·”
이번에는 거의 생성하는 동시에 박살 나버렸다·
베키는 2분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또 한 번 얼음 송곳을 생성해냈다·
꽝─!
꽝─!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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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덟 번이나 얼음송곳이 박살 나고 베키가 크나큰 위화감을 느끼며 시계를 바라보았을 때·
“어···?”
입에서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가 새었다·
트릭시와 루이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것을 쫓는다· 그리고 일시에 그들의 표정도 멍청해졌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는 1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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