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3
콰앙─!
“아직도···· 느리다·”
얼음 방벽 불꽃 빛줄기· 모든 것이 한 번에 박살 나버렸다· 세 학생은 온통 땀에 젖은 채였다·
“이게 어렵나· 고작 이게·”
나는 쯧 혀를 찼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직 ‘정순함’에 힘을 주는 법을 모른다· 자꾸만 ‘출력’쪽으로 회로가 쏠리고 있었다·
습관이 이토록 무섭다· 또한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면 토벌제 예선 통과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만해라·”
나는 셋의 회로에 간섭하여 발현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결국 이론에도 시간을 안배해야 할 듯하다·
“너희들을 과대평가했다· 이론부터 익히지·”
학생들의 눈앞에서 책상과 의자가 생겨났다· 모두 머쓱해 하며 자리에 앉았다·
“너희가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잡혀버린 습관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
그간 스스로 수양하며 발견한 것들을 대단한 비결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걸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테지·
“····”
하지만 그걸 버리도록 이끄는 것이 나의 역할일 터·
문제점을 발견했으니 곧바로 강의 방식을 수정한다· 학생들을 향해 실망할 틈조차도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접근하겠다·”
물 불 땅 바람···· 원소의 계열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본질까지 파고든다면 결국 차이가 없다·
나는 세 명에게 이 근원(根源)을 가르치고 싶다·
“이건 아주 기초적인 원소다·”
무속성의 구체· 어떠한 속성도 없는 그것을 천천히 허공에 띄워 올렸다·
이번에는 이 녀석들을 믿지 않는다·
세상의 새하얀 공간을 칠판 삼아 검은색으로 술식과 원리 과정 등등을 최대한 세세하게 적어냈다·
갓난아기를 다루는 듯한 강의였다·
“너희들이 그렸던 원소 술식과 대조하고 차이가 있는 부분은 전부 암기해라·”
이해는 암기 이후 이루어져도 늦지 않다·
아니 이들 수준에서는 오히려 암기를 선행하는 편이 좋다· 그래야만 불현듯 이해의 순간이 찾아오는 때도 있을 테니까·
“무속성 구체가 투명해지기 전까지 속성을 입힐 생각은 마라· 탁한 오물 덩어리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면서도 무속성 구체 위로 속성을 덧입히는 이론과 공식을 전부 적어주었다·
···한 자 한 자 적어서는 끝이 없겠다·
스스슥─
한 번에 세 글자씩 적기 시작했다· 베키에게는 얼음 트릭시에게는 불꽃 루이스에게는 빛···· 친절하게 필기 공간을 구분해주기까지 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반드시 학습시켜야만 한다·
“속성을 입히는 과정에서 정순함을 한 차례 더 높일 수 있다· 이 점을 아직 익힐 수는 없겠지만 이런 현상이 있다 정도는 반드시 인지해라·”
필기는 1시 58분부터 1시 58분까지 이어졌다·
“이상·”
화중 세계의 시간상으로는 그렇지만 필기를 마쳤을 때쯤 학생들은 이미 앉아있는 시체였다·
“이상·”
나는 허공에 빼곡하게 적힌 것들을 살펴보았다·
잘못 적은 것은 없고 이 이상으로 간결할 수도 없다·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전부 암기하면 비로소 1시 59분이 될 거다·”
“···?”
“시작·”
과제를 남겨준 뒤 화중세계를 떠났다· 이쯤에서 데려와야만 하는 인물이 있었다·
◈
─사각사각
플란이 떠난 후 화중 세계의 훈련장은 술식을 암기하는 소리로만 가득 차게 되었다·
[ 정순함 이론 ]
[ 무속성 원소 발현 이론 ]
[ 속성 대입 이론 ]
·
·
·
“···말도 안 되네·”
트릭시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허공에 적혀있는 필기 중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추렸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다·
심지어 내용이 쉬운 것도 아니다· 생소하고 어려운 것들로만 세 권이다· 무려 세 권·
“신기해·”
하지만 흥미가 동한다· 그 점이 신기했다·
트릭시는 기초부터 다시 쌓는다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고 저항했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터·
처음부터란 바꾸어 말해 그간 쌓아둔 행적과 시간을 전부 부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란의 설명은 그 자체가 정순하다·
간결하고 핵심만 있다· 보자마자 이것 외에 최선의 길은 없다고 느끼게 되어버려서 도리어 스스로부터가 지난날을 버리자고 마음먹게 되는 것이다·
“역시····”
기권은 일부러 했다는 거지· 소녀는 확신했다·
이론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트릭시와의 대결에서 플란이 순수하게 실력으로만 패배했을 리 없었다·
의문이 더더욱 커졌다· 플란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다 외우는 게 먼저·”
지금은 실력을 빠르게 늘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토벌제 대표로서 역할을 다해야 하고 가르침 씨를 떳떳한 모습으로 만나야만 했으니까·
트릭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
루이스는 루이스다운 모습이다·
눈을 깜박이는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공책을 향한 그의 눈동자에는 굉장한 학구열이 담겨 있었다·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이렇게 묶고···· 노 논리? 무슨 논리를 대입해야 하더라···? 아악···· 다시 앞부분····”
베키는 다소 요란하다·
손을 이마에 짚었다가 내렸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이해가 잘 안되는지 미간을 좁혔다가· 그렇게 하는 와중에도 용케 페이지는 넘어갔다·
트릭시는 그런 베키가 순수하게 궁금하다·
대표로 뽑힌 지금 부담감이 클 텐데 본인도 여론을 알고 있을 텐데 지금도 딱히 무언가가 잘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묵묵히 플란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베키·”
“어 어?”
베키가 급하게 트릭시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어어 미안· 많이 시끄러웠어?”
“되게 열심히 하네·”
“아···· 응···· 좀 꼴 보기 싫었나?”
베키가 살짝 주눅이 든 얼굴을 하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척 보기에도 자존감이 낮은 것이 트릭시와는 정반대다·
“···됐고· 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트릭시는 어머니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 또한 천재가 되고 싶었고 가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다·
목표와 이유가 전부 명확하기에 새삼 남의 이유도 궁금해진 것이다·
베키는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그냥···· 나는 막 대단한 이유가 없는데· 플란이 시키니까 하는 거지····”
시켰기 때문에 그저 한다고 그럼 그 맹목적인 믿음의 이유가 궁금해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베키·”
“응?”
“너· 플란 좋아해?”
“···!”
베키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살펴보니 충격을 바가지로 퍼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몇 번 만지작거린다·
“가 가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대답·”
“그 그런 이유만으로 열심히 하는 건 아니야!”
“그럼·”
베키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입술을 달싹인다·
“플란이 뭘 하려는지 이해하려는 건 진작에 포기했어· 내 수준으로는 그게 안 되니까· 하지만····”
“하지만·”
“항상 이유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 지나고 보면 또 결국 나한테 도움 되는 일이고···· 그냥 뭔가 플란은 항상 대단해·”
베키의 눈빛이 점차 깊어진다· 가만히 과거를 되짚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달랐어 아고라 보드에 대뜸 손을 댔으니까····”
아고라 보드·
그 다섯 글자를 듣자마자 트릭시의 눈이 부릅떠졌다· 베키도 곧바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고라 보드?”
“어···· 어? 아 아니· 내가 헷갈렸나 봐!”
“너 방금 분명 아고라 보드라고····”
그런데 그때였다·
“뭐 이렇게 소란스러워·”
처음 보는 인물이 세 명 앞으로 나타났다·
달빛을 연상시키는 은발 붉은 눈동자· 꼭 사포어의 학회장을 닮은 얼굴이지만···· 귀는 뾰족하지 않았다·
트릭시가 물었다·
“누구예요·”
질문을 들은 여인의 고개가 천천히 모로 꺾인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이에브· 그녀는 공허에서 회의를 마친 후 지금 막 화중세계로 복귀한 참이다·
말투가 썩 건방지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이에브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 환혹 세계의 주인이랄까· 아니 이었달까····”
“그러니까 누군데요·”
“····”
똑 부러지게 물어오는 트릭시를 바라보며 마이에브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훑었다·
노예 각인만 아니었으면 밖에서 마주쳤으면 이깟 인간 따위는 사지를 찢어서 허공에 매달 텐데····
하지만 이제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다· 그녀는 플란이 시킨 대로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냥···· 이 세계 내에서만 존재해· 난 그래·”
“아아 소환수·”
트릭시가 곧장 납득했다·
“····”
마이에브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인간들 상대로 소환수 취급을 받아야 하는 신세라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음 순간·
“···?”
베키가 마이에브의 볼을 잡아 늘였다·
“와···· 이거 진짜 살아있는 거 같아· 플란은 이런 것도 소환할 수 있구나····”
“이 이 이런 것···?”
“볼 진짜 부드럽다· 애들아! 너네도 만져봐!”
트릭시는 마이에브를 위아래로 스윽 훑었다· 별안간 검지로 반대쪽 볼을 쿡 찌른다·
“···정교하긴 하네·”
“아하하···· 여성 소환수라서 나는 보기만 할게·”
루이스는 환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마이에브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트릭시가 이번에는 마이에브에게 불쑥 공책을 내밀었다· 플란의 필기를 옮겨적은 페이지였다·
“너· 이거 알아?”
“···?”
마이에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손등에 새겨진 각인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다·
“하아아아아····”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하는 수 없이 종이를 살폈다·
내용이 깔끔하다· 그녀가 사용하는 흑마법과는 전혀 다른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알겠다·
“이해를 못 할 수가 없는 수준인데·”
“어 정말요?!”
베키가 눈을 반짝거렸다· 곧바로 자신의 공책도 펼쳐서 내민다·
“그 그럼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저는 이 부분이 도통 이해가 안 가서···!”
“으음~ 저도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난 여기·”
루이스와 트릭시도 합세했다·
“아·”
마이에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
토벌제 예선 전날 밤·
메르헨 일보 마법부 부장 세피아는 여전히 사무실 안이다·
다음날 있을 예선 때문에 벌써 바깥은 난리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전야제를 하고 파티가 열리고···· 당연한 일이다· 토벌제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니까·
작게는 메르헨 아카데미의 학생들부터 크게는 황실 측 관계자까지도 관심을 갖는다·
그만큼 중요한 행사고 따라서 이 기간에는 한순간에 인생이 뒤바뀌는 이들이 생기는 것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나 중요한 시점인데···· 세피아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미쳐버리겠네·”
[ 대책 없는 마법 학부···· ‘플란 실종’ ]
[ 큰소리치더니 기숙사 잠적···· 뭐하나? ]
[ 마법 학부 대표는 왜 세 명인가? ]
*한 명을 섭외하지 못했을 확률 높아·
[ ‘빈 수레가 요란하다’ ]
*올해의 마법 학부 과연 빈 수레로 남을까·
기사 학부에서 인쇄한 신문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중이다· 반박하려 해도 플란이 잠적해버려서 취재 자체가 불가하다·
심지어 그 혼자만 사라진 것도 아니다· 마법 학부의 대표들 전부 기숙사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걸 어떡하냐· 이걸 어떡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머리를 감싸 쥐고서 세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들은 전부 쓰레기통으로 박아 넣었다· 언제까지고 사무실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부장님! 부장님!”
막내 기자가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쳐들어왔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네네· 무슨 일일까요?”
“플란 플란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예?”
세피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
그리고 다음 순간· 후다닥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드디어 나타났어요? 어때 어때요? 취재는 좀 땄어요? 아니면 뭐 추가로 확인된 거 있어요?”
“아···· 그게····”
막내 기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덕분에 세피아는 속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어서요· 어서! 뜸 들이지 말고요!”
“기사 학부 아이반···· 아이반이요·”
“아이반? 갑자기 웬 아이반?”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세피아의 표정이 멍청했다· 하지만 막내 기자의 표정은 더했다·
“아이반 아이반을 데리고····”
“네네·”
“기숙사로 들어갔는데요····”
세피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아니 거의 꺾인 수준이다·
잠시 후 그녀가 미간을 확 좁히고 되물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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