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총장님·”
마법 학부 총장 코네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말없이 체스 기물만 움직였다·
총장실 내부에서는 한동안 체스판과 기물이 부딪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곧 토벌제 예선이 시작됩니다·”
바이올렛이 정중하게 보고를 올렸다· 그녀는 경기에 앞서 총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이런 벌써 그리되었군요·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출전은 문제없습니다· 아침에는 대표 한 명을 추가했고···· 자신감은 여전히 넘쳐 보였어요·”
“다행입니다·”
바이올렛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감이 넘쳐서 그나마 다행이야·’
패배도 패배지만 바이올렛이 그간 가장 속상해했던 것은 마법사들의 태도였다·
서로에게 떠넘기려 하는 대표 자리 바닥을 치는 의욕 주눅 들어 실전에서는 발휘하지도 못하는 기량····
그러한 것들을 볼 때마다 교수이기 전에 한 명의 마법사로서 마음이 아팠다·
그때 총장 코네트가 입을 열었다·
“참 신기하지요· 플란 그 한 명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바이올렛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무언가를 부르짖어도 성과가 없다면 사람들은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 성과를 플란이 만들어주었다·
플란은 1종목에서 보란 듯이 승리를 따냈고 마법 학부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러니 총장의 말은 지극히 옳다·
코네트의 기묘한 역안은 여전히 체스판을 향해있다·
총장이 문득 물었다·
“이쯤에서 바이올렛 교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제 생각···· 말씀이신가요·”
“예· 저번처럼 그저 생각을 들려주시면 됩니다· 이번 예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그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총장님·”
“듣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두렵기도 해요·”
“그건 대부분이 그렇겠지요· 이유도 들어볼까요·”
바이올렛은 제 발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플란 덕분에 많은 수의 어린 마법사들이 의욕을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이번에 꺾이면 더더욱 아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패배를 예상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승리만 기대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토벌제라는 게····”
바이올렛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플란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제 총장도 알고 바이올렛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토벌제는 혼자서 헤쳐 나가는 종목이 아니다·
네 명으로 구성되고 심지어 마법 학부는 전원이 1학년으로 선발된 채다·
플란은 그렇다 쳐도 남은 셋이 기사 학부의 2학년을 이긴다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걱정이다·
이제야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어린 마법사들이 혹시라도 너무나 아프게 꺾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봐·
코네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마음이었다·
“하긴 대비가 잘 되었는지도 의문이겠습니다·”
코네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메르헨 일보 여러 장이 허공에 펼쳐진다·
사라진 플란과 대표들 덕분에 텅 비어버린 3일 그에 관해 쏟아지는 수많은 기사····
신문의 형식을 갖추고는 있으나 사실상 마법 학부와 플란을 조롱하는 내용들 뿐이었다·
바이올렛은 코네트의 태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예 체념하고 욕심을 버린 것인지 총장실에서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다·
이번에는 바이올렛이 먼저 침묵을 깼다·
“저기 총장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예·”
“···총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감히 듣고 싶어요·”
“아하·”
총장은 여전히 체스판을 바라보는 중이다· 코네트가 입술을 떼었다·
“그 전에 제가 체스를 왜 좋아할까요· 아시는지요·”
“···예?”
갑자기 튀어나온 체스 이야기에 바이올렛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어렵다면 다르게 묻지요· 체스에서 아주 불리한 상황을 역전하는 데에는 최소 몇 수가 필요할까요·”
바이올렛은 나름대로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적어도···· 세 수?”
“한 수·”
코네트가 단호하게 바이올렛의 말을 잘라냈다·
“묘수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스를 굉장히 좋아하지요· 저는·”
코네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검마태제라고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총장의 손가락이 나이트를 툭 밀어 넘어트린다·
“···한 번 보죠· 플란이 어떤 묘수를 두었을지·”
◈
“어린 애새끼들도 아니고···· 하여간·”
칠흑같이 검은 앞머리가 눈을 완전히 덮은 여기사· 기사 학부 ‘네 남매’의 첫째 엘라가 불만을 표했다·
예선 경기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 갑자기 변수가 생겨버렸다·
“그새를 못 참고 패싸움을 해····”
아카데미가 온통 축제 분위기에 젖은 오늘 아침 술집에서는 학생들 간의 심각한 패싸움이 있었다·
원인은 당연히 엘라를 제외한 기사 학부의 세 남매·
가게 건물은 통째로 박살 나버렸고 내부의 학생들은 전부 중상을 입었다· 상황이 무척 심각했다는 것은 괜히 말해봐야 입만 아플 정도다·
심지어 마법사 학생들만 골라가며 때려댔으니 죄질도 나쁘다· 중징계를 피할 수가 없으리라·
“내가 대표로 나가다니···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도 긴장은 안 된다· 상대가 1학년 마법사라·”
기사 생도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온다· 패싸움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엘라를 제외한 세 남매가 전부 징계위원회로 끌려가 버린 참이라 그녀는 아침에 조원 셋을 새로 구했다·
“근데···· 경기 직전 기자회견을 왜 마탑에서 하냐?”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물론 나머지의 감상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토벌제 예선 경기 직전에 양 측 선수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기자 회견은 기사 학부에서 하는 것이 전통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법 학부에서 힘 좀 썼나?”
“걔네가 힘이 어딨다고·”
“그건 그렇네· 그럼 마탑에서 하자고 싹싹 빈건가·”
묵묵히 듣던 엘라는 문득 황금빛의 기감을 느꼈다·
이런 기운을 지닌 것은···· 아이반을 제외하면 없다·
“···쟤는 여기 왜 있어· 누구 맘대로·”
날이 선 엘라의 목소리에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기자 회견에 아이반도 참여시킨대· 전투 종목에서 패배했었잖아· 그 관련해서 질문 하려나봐·”
“····”
엘라가 조용히 혀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잠시 화를 억누르는듯 했다·
잠시 후 이들은 마탑을 향해 출발했다·
“여긴 진짜 별 거 없네·”
마법 학부에 발을 딛자마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기사들의 입에는 미묘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도서관 책 논문···· 이런 것들이 주를 차지하는 마법 학부가 기사인 그들에게는 한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기사 생도 하나가 엘라에게 물었다·
“엘라 그 이야기 알아? 마법 학부가 토벌제에서 2등을 한 적 있다는 거·”
“알아·”
“터무니없는 소리 같은데· 진짜로 별거 없다 여기·”
엘라는 묵묵히 걷는다·
앞머리가 온통 눈을 가렸는데 심지어 감은 눈이 떠지지 않는데도 그녀는 비틀거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기사가 입을 열었다·
“마법 학부가 상대 조라니···· 공짜 승리라서 우리야 좋긴 한데 사실 토벌제에 굳이 마법 학부를 끼워주는 이유를 모르겠어· 안 그래?”
“그건 다 그렇게 생각할걸· 검도 모르는 마법사들 잡아다 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차라리 허수아비 몇 번 더 베는 게 유익하지·”
마침내 엘라가 입을 열었다·
“잔불의 기사님께서도 허용하신 안건인데 너희는 그게 불만인 모양이네· 그런 뜻이지 지금?”
“····”
엘라의 감은 눈을 마주하자마자 둘은 몸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급하게 말을 바꾼다·
“그 그런 뜻은 아니지· 우리가 무슨····”
“그냥 닥치고 있어· 상황이 운 좋게 맞아떨어져서 인원이나 채우게 됐으면 분수를 알라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는 생도를 향해 엘라가 쯧 혀를 찼다·
그러나 잠시 후 엘라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들 잔불의 기사님께서 이 경기를 왜 허용하셨을 것 같아? 나는 전부 예상이 가거든·”
엘라는 검집을 쥐었다·
그리고 손잡이로 대상의 볼을 콱 찔렀다·
“기사 학부의 수치가 생겼으니까 가서 갚아주라는 거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대놓고 하는 도발이자 비아냥이었다·
“····”
하지만 정작 비난을 받아내는 당사자 아이반 로즈는 태연한 태도로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엘라가 살짝 미간을 좁히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반응이 없네· 검 놓을 때 정신도 같이 놨어? 앞이 안 보이는 나조차도 검은 실수로 놓은 적이 없는데· 응?”
볼을 연달아 찔려도 아이반은 반응이 없다· 심지어 상처가 날 때까지도·
엘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너 새벽까지 마법 학부 기숙사에 있었다며 그 소문은 진짜야? 플란한테 직접 찾아가서 대줬다는 거?”
1종목 전투에서 아이반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이제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마법 학부가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 원인 제공자 아이반을 향한 기사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야· 대답·”
엘라는 검 손잡이로 아이반의 볼을 자꾸만 찔렀다·
“대답하라고·”
단순히 툭툭 건드리는 정도는 이미 지났다· 지금은 아예 힘을 꾹 주어서 아이반의 머리를 밀어내는 수준이었다·
“····”
그러나 아이반은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하 재미없게····”
결국 엘라가 먼저 그만두었다·
패배 이후 아이반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매사에 늘 진지했던 것은 과거에도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걸 넘어서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했다·
그리고 그때·
“아 여기요·”
대기하고 있던 기자 한 명이 그들을 반겼다·
저승사자 사신 미친개···· 다양한 별명을 보유한 그녀는 기사 학부의 기자· 일라이자였다·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경기 직전 취재 짧게 들어갈 거에요· 말씀은 되도록 여과 없이 해주시고요·”
엘라가 되물었다·
“마법 학부 애들은·”
“아직· 거기도 대표 명단에 변경이 있다네요· 근데 기사 학부처럼 징계 때문은 아니고···· 일단 들어가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일라이자가 뒤편의 마탑을 가리켰다·
엘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싸가지를 밥말아쳐먹었나····”
일행이 하나둘 회담장으로 들어가는데 아이반은 우뚝 멈추어 섰다·
문득 아이반은 고개를 들어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사·’
그 단어를 의식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한 사내를 떠올린다·
‘플란·’
아이반이 현재 멍한 이유 역시 그였다·
화중세계에서 세 대표를 상대해주는 대가로 얻어낸 플란과의 대련 기회 그리고 거기서 마주한 플란의 새로운 마법·
“그건····”
심연만큼 깊고 바다만큼 아득한 무언가·
중심을 잡으려 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집중하려 해도 기어코 길을 잃게 만드는 무언가·
수천수백을 넘어···· 몇십만에 달하는 무언가가 정교하게 맞물려서 자신을 지배하는 듯한 감각·
“···플란·”
여기사는 괜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