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7
네 남매의 막내 이고르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호흡만 하는데도 그 거대한 몸체는 쉽게 눈에 띄었다·
“내 기준으로는 별 거 아니더만·”
이고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기준이 뭔데?”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셋째 카셀이 그 혼잣말을 받아주었다·
“마주치면 그냥 두들겨 패놓을 수 있다고· 싸가지가 너무 없어· 반으로 접으면 부러질 것 같은 새끼가·”
“네가 언제는 마법사 가려가면서 팼냐·”
“내가 안 가리면 뭐 어쩔 건데·”
이고르의 목소리가 가시처럼 날카롭게 솟았다· 카셀도 조금 미간을 좁혔다·
“···이고르 너 근데 왜 나한테 화를 내냐?”
“화가 안 나게 생겼냐고· 회견실에서 그놈 태도 봤잖아· 그냥 거기서 목을 따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고르의 이마에는 이미 핏줄이 서 있었다·
예선 경기에 출전하는 조건으로 특별 사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았는데 회견실에서 플란의 태도를 보자마자 기분이 뒤바뀌었다·
그는 지금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마음에 안 드네·”
여태 가만히 앉아있었던 엘라가 입을 열었다· 이고르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치? 엘라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너 말이야· 가만히 좀 있으라고·”
“····”
기사 학부의 네 남매가 한데 모였다·
징계로 인해 배제되었던 이들이 원래의 계획대로 예선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언뜻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처럼 보인다만·
···그것이 오히려 엘라의 심기를 긁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대표 중 세 명의 인원이 긴급 교체되었다는 것· 마법 학부 입장에서는 쾌재를 부를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플란은 그 ‘운’을 보란 듯이 거부했다·
승리를 확신하기에 그리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양측은 애초에 학년도 다르다· 그런데도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그리 행동했다는 것이· 엘라에게는 더없이 불쾌하다·
카셀이 엘라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엘라 너무 신경 쓰지 마·”
“뭘·”
“결국 중요한 건 결과야· 아무리 겉을 번지르르하게 꾸며도 패배하면 그만큼 조롱도 크게 받는 거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카셀은 말을 이었다·
“우린 그냥 이기면 되는 거 아니겠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엘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범하게 이기는 거로는 안 되겠어·”
그녀가 눈을 감고 있음에도 남매들은 엘라가 본인들을 굽어살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놈은 좀 똑똑한 구석이 있거든·”
“···?”
나머지 남매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똑하다라···· 설마 그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인가·
카셀이 입을 열었다·
“똑똑하다니 플란인가 하는 걔 말이야?”
“그래·”
결국 이고르가 벽을 쾅 치며 끼어들었다·
“걔 나한테 줘· 내가 머리통을 깨버릴 테니까·”
대기실의 벽면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버렸지만 엘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참 생각이 얕아· 애새끼처럼·”
“···?”
나머지 셋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플란은 빠르게 종을 울렸어· 너희도 봤겠지·”
“응·”
“우리가 얻을 이득을 전부 잘라낸 거야· 3일간 왜 잠적했나 아이반을 데려가서 뭐했나 왜 그따위 발언을 했나···· 그 모든 질문과 답변이 기록되지 않도록·”
엘라는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총장 얼굴을 보니 그놈을 향한 신뢰가 꽤 있더라· 근데 총장뿐만이 아니야 아침에 마법사들 많이 돌아다니는 거 봤지?”
“봤지· 거슬려서 몇 명은 패버렸고·”
명예로운 훈장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카셀은 수갑이 채워진 제 손을 위로 들어 보였다·
그를 향해 엘라가 묻는다·
“봤으면 내가 왜 똑똑하다고 했는지 알겠어?”
“···그건 모르겠는데· 역대급으로 싸가지가 없다?”
“이놈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지를 잘 알아· 그게 똑똑하다는 거야·”
씩씩거리던 이고르가 표정을 더더욱 구겼다·
“어· 그게 뭐가 대단한 건데? 쥐새끼는 그냥 잡아버리면 그만····”
“···이고르·”
엘라가 이고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읊조리는 엘라의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가 있다· 그녀도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참는 중이었다·
“하아아아·”
결국 이고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간 마법 학부의 토벌제 성적을 보면 얘네는 검마태제에 관심을 안 가져야 정상이야· 그런데도 지금 열기가 이렇게나 뜨겁네·”
“···으음·”
카셀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래도 결국 이고르 말이 맞지 않나? 우리가 이기면 그 관심도 알아서 식는 거 아니야?”
“관심을 갖는 거 자체가 위험하다고 이 멍청아·”
엘라가 검 손잡이로 카셀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관심을 가진 채로 지켜보고 희망을 품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거라고· 우리가 아예 싹을 자른다· 알았어?”
“아아· 그래 무슨 말인지 이제야 좀 알겠네·”
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난 네가 알려줘· 싹을 자르려면···· 뭐 어느 정도로 밟아놓으면 되는데?”
“아니 질문은 내가 해·”
엘라의 몸에 냉엄한 살기가 어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셋을 향해 물었다·
“우리 중에서 징계 따위가 두려운 놈···· 없지?”
◈
화중세계에서 마냥 세 명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마나의 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하여 열심히 정진했다·
[ 주인님 저희 제법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아요? ]
그 결과란 이러하다· 마나의 총량은 정직하게 증가했고 헤라와의 감응도 역시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처럼 내가 답답하게 여겼던 많은 요소가 최근 급속도로 해결되어 가는 중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기사 학부의 경기장에 섰다·
예선 경기의 시작이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읏!”
콩 하는 소리와 함께 베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황을 보니 기사 학부 대표가 밀친 모양이었다·
“뭐야 있었냐· 하도 쪼끄매서·”
이고르·
기사 생도의 명찰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일부러 상황에 관여하지 않았다·
지금의 베키에게는···· 이런 신경전에 익숙해지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루이스가 발끈하며 나섰다· 이고르의 앞을 가로막는다·
“야 방금 고의로 밀친 거잖아·”
“고의였으면 쟨 죽었지· 왜 장난 같아?”
“너····”
“다들 주목·”
두 사내가 팽팽하게 대치하던 와중 단단한 음색이 두 명을 갈라놓았다· 진행을 담당한 정규 기사였다·
“···다툼은 경기가 시작되면 해라· 특히 이고르 너·”
그는 자연스레 한 가운데로 끼어들어 양 대표 간의 거리가 자연스레 벌어지게끔 했다·
루이스와 이고르의 눈싸움이 계속되는 와중 정규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전을 확인하겠다· 송환석은 다들 배급받았겠지·”
그가 대표들의 안전을 점검하기 시작했고 나는 경기장의 모습을 면밀히 살폈다· 흥미가 그쪽에 있었다·
우선 경기장과 관중석의 높이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크기는 전투 종목을 치렀던 경기장의 세 배쯤 되고 관중들은 아주 높은 곳에서 두 조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구조·
즉 오로지 관중의 재미만을 위해 설계된 장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위로부터 계속해서 쏟아지는 중이지만 굳이 고개를 들어 살피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걸 스스로가 허하지 않기에·
‘제법 공을 들였나·’
오히려 내 관심은 지면 쪽을 향한다· 흙바닥 아래 깊숙한 곳에서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술식들···· 이 경기장은 분명 여러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런 걸 왜 마법 학부에 두지 않고·”
술식 중 몇 개를 분절하려던 그때·
“이봐· 너·”
나를 점검하던 정규 기사의 눈초리가 매섭다· 상념에서 벗어나며 아쉬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송환석· 챙겼어?”
우리 대표들을 비롯해 기사 학부 대표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거·”
품속의 각서를 제시했다· 예선에서 목숨을 잃어도 괜찮다는 내용이 담긴 꽤 파격적인 종이였다·
분명 가능하지만 막상 채택하는 이는 없는 방식· 나는 이러한 것을 굳이 찾아내서 채택했다·
자신을 향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런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가 후에 각 학부를 뒤집어놓을 테니 말이다·
“···객기를 부리는군·”
정규 기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으며 각서를 받아들였다·
내 점검을 끝으로 경기장의 천장이 거울처럼 뒤덮여 관중석의 모습을 살필 수 없게 되었다·
‘···단방향 투과·’
관중들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선수를 위한 배려일지 보는 이의 재미를 위한 요소일지·
동시에 참새 모양으로 접힌 종이 몇 장이 공중을 비행한다· 살펴보니 결국 본질은 기록지였다·
경기장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저것들이 상황을 전달할 터· 1종목과는 규모를 달리한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예선 방식을 설명하겠다·”
정규 기사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10분 뒤 경기장이 두 구역으로 나뉠거다·”
무작위· 그 말에 옆에 있던 베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시험 방식은 간단하다· 단계별로 마수들이 나타날 거고 마수를 처치하면 그 등급에 따라 점수로 산정된다·”
그의 설명은 한동안 이어졌다·
분량이 많았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사냥 점수를 합계해 각 조의 순위를 매기게 되고 마수는 단계별로 차례차례 강해져서 서로의 구역에 등장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표간의 전투도 허용된다·
“5단계부터는 대표 간의 전투가 허용되지만···· 적당히 해라· 알았나? 적당히·”
정규 기사의 시선이 네 남매를 향했다· 명찰에 ‘카셀’이라고 적힌 기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다·
“알겠다고요· 왜 자꾸 이쪽을 보면서 그러시지?”
“몰라서 묻나· 너희들은 특별 사면이라는 걸 명심해· 기사의 체면을 떨어트리는 일은 하지 마라·”
“네네·”
이 조항은 그 뒤로도 네 남매를 향해 두 번이나 더 강조되었다· 이들이 평소 어떠한 행적을 보였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규기사가 내게 팔찌를 내밀었다· 엘라에게도·
“이제 예외 조항에 관해서 설명한다· 상대 조장의 팔찌를 어떠한 상해도 입히지 않은 상태로 빼앗으면 300점으로 기산한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배점이지만 다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분위기였다·
상해를 입히지 않고 팔찌를 빼앗는다·
이 부분이 불가능처럼 여겨지는 탓이겠지· 그러나 나는 오히려 흥미를 품었다·
“마지막으로 중도 포기는 불가하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잘 숨어있든가 일부러 마수한테 머리가 깨져서 송환되든가·”
설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상대 대표들과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 각각 경기장의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지 진짜 하는 건가? 내가 왜 경기장에 서 있지? 응?”
걷는 와중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키의 것이었다·
“멍청한 소리 좀 그만·”
“트릭시···· 너는 긴장 안 돼?”
그러자 남색 빛 눈동자가 베키를 향했다· 트릭시가 낮게 물었다·
“너· 그래서 언제쯤 이야기할 거야·”
“으응? 아· 그건 내가 잘못 말한 거라니까·”
“모른다고는 말 안 하네· 아고라 보드·”
“···에·”
베키가 땀을 삐질삐질 흘려대기 시작했다· 트릭시의 눈을 마주치지를 못한다·
“마 말할게· 말할게~”
“말해·”
“만약에 우리가 1등으로 예선 통과하면 그때는 진짜 말할게· 응?”
“····”
트릭시가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베키를 바라보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그냥·”
앞에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잡담을 나누며 걷는 두 소녀· 나는 차분히 물었다·
“너희는···· 뭐 그렇게 시끄럽나·”
베키가 뒤를 돌아보더니 황급히 손을 저었다·
“어 어? 아니야! 예선 경기 긴장해서 그런 거야!”
“긴장이라·”
─지금부터 예선을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말해줄 틈도 없이 예선이 시작되었다· 빠르게 변하는 경기장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감상했다·
연성 조화 조작···· 흥미로운 변화였다· 그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생동한 꽃과 나무가 생겨나 숲을 이루고 바닥에는 매우 두꺼운 선이 그여 경기장을 두 구역으로 나누었다·
심지어 날씨조차 뒤바뀐다·
대표 선수들을 격려하겠다는 듯 거울 천장으로부터 부드럽게 내려앉는 빛무리·
‘경기장’의 개념은 진작에 초월해버린 사실상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에 가까운 경지·
와중에 나는 마법학부 총장 코네트의 기운을 짙게 느낀다·
─1단계가 시작됩니다·
“플란·”
풍경이 고정된 후 루이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머지 두 명의 시선도 내게 꽂혀있는 채다·
“지시를 내려줘· 뭐부터 할까?”
나는 조용히 근처의 묘목 하나를 재료 삼았다· 그것의 줄기를 멋대로 조작하여 의자 하나를 완성했다·
그 위로 가만히 앉아 종이와 펜을 꺼냈다·
“사냥을 시작해라· 예선 규칙은 전부 숙지했겠지·”
“으음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해· 역할을 어떻게 배분한다든가· 네가 조장이잖아·”
“알아서 해라· 나는 여기서 너희를 채점한다·”
또한 추가로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어중간한 각오는 버리는 게 좋을 거다· 1등으로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기꺼이 기권할 테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셋은 조금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다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표정을 구기고서 한마디 했다·
“···출발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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