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
트릭시는 아직 남을 믿는 것이 영 익숙지 못하다·
그러나 신뢰하려 애는 썼다·
얼음을 이용한 베키의 방어 섬광을 이용한 루이스의 시야 통제· 이제 빙랑(氷狼)에게 유효타를 입히는 것은 트릭시의 몫이었다·
치이익─!
공중에서 격돌하는 화염과 얼음 원소·
상반되는 원소의 충돌에서 퍼져나오는 후폭풍은 무지막지하다· 주변이 순식간에 안개 지역처럼 변해버릴 정도였으니·
“으····”
트릭시는 이를 악물었다· 빙랑과 원소를 한 차례 부딪힐 때마다 부담이 어마어마했다·
아직은 경지의 차이가 크다·
원소를 두 번 발현해야만 낼 수 있는 위력을 빙랑은 발톱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냈다·
그 뿐인가 커다란 몸뚱이는 믿기 힘들 정도의 순발력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쾅! 콰앙!
원소가 충돌할 때마다 팔이 저릿하다· 체내에 혈관처럼 뻗은 회로가 통째로 타버릴 듯 하다·
“····”
몸과 옷은 이미 온통 젖었다· 얼음까지는 어찌저찌 녹여내도 증발까지 시키지는 못한 결과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물방울에 눈조차 뜨기가 힘들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답은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은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해야 했다·
“···마법사도 아닌 게·”
하지만 트릭시는 지고 싶지 않다·
적어도 원소에 있어서만큼은 물러서기 싫었다·
“건방져·”
그리고 그 때 도망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주목할만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출력이 상승한 것이다·
···플란의 가르침에 그것을 접목한다·
소녀는 출력을 죄다 정순함에 몰아넣었다· 화염의 형태를 늑대의 모습으로 깎아낸 다음·
딱─!
발현·
트릭시의 화염 늑대가 빙랑의 목을 물어뜯었다·
콰앙─!
투둑·
굉음과 함께 빙랑의 얼음 송곳니와 발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이스와 베키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치웠나?”
베키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다음 빙랑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세 학생의 온몸이 굳었다·
아우우우─·
격이 다른 마력이 마법사들의 몸을 찌르르 울렸다·
빙랑의 눈이 더더욱 푸르게 깊이를 더했다· 몸집이 배로 커지며 송곳니와 발톱이 더더욱 날카롭게 자라난다·
“뭐 뭐 뭐야· 두 번 쓰러트려야 하는 거였어?”
“아하하···· 그러게· 예상 못했는데·”
커다란 몸집을 올려다보며 베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플란···· 이거 플란도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너 너무 강해 보이는데···?”
“플란은 아직도 채점 중인가?”
셋의 고개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사 사이 그는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분신인가···· 저기도 위험해 보이는데·”
트릭시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분신의 바다가 천천히 플란을 뒤덮기 시작했다·
위력을 발휘하는 대검 미묘한 틈을 찌르는 세검 정직하게 몰아치는 도···· 수 많은 기사가 파도처럼 몰아쳤다·
기세는 해일과도 비슷하다· 마법사를 집어삼키겠다는 듯 위협적인 아가리를 쩍 벌렸다·
플란은 태연하게 원소를 맺었다·
순간 화랑이 온몸을 불태우며 전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분신의 파도를 역으로 밀어낸다·
불을 뿜고 제 몸으로 플란을 보호하고···· 화랑의 움직임은 플란에게 유리하도록 이루어졌다·
“저거···· 플란이 다루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화염이 맺어진 손끝으로 플란이 화랑을 다룬다· 흡사 선율을 다루는 지휘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화랑은 현재 자의적으로 플란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플란을 보호할 수밖에 없게끔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와····”
베키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지휘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튕겨 나간 분신들은 기화하여 사라지고 플란은 여전히 태연하게 앉아있다·
한 번의 공격도 한 번의 접근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방어·
그러다 어느 순간 세 명의 시선과 플란의 시선이 닿았다·
플란은 조용히 검지를 폈다·
그것으로 제 눈을 두 번 두드린 후 세 명을 손끝으로 두 번 가리켰다·
“····”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세 명은 말 없이 다시 빙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우우우─!
더없이 사나운 녀석의 포효가···· 차라리 친절해 보였다·
◈
당연한 말이지만 화랑은 화염에 관심이 많다·
내 정순한 불꽃은 녀석에게 생각 이상의 환대 받았다· 이를 활용하여 나는 현재 화랑을 소환수 다루듯 조종하는 중이다·
놈의 불꽃 발톱과 송곳니를 이용해 분신을 한창 치워내던 때였을까·
“야 카셀! 너 뭐하냐?”
이고르가 답답했는지 카셀을 향해 윽박질렀다·
“····”
카셀은 입술을 꽉 깨물 뿐이었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세 명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것도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당혹감의 늪에 서서히 잠겨 드는 그 멍청한 얼굴이 내게는 또 하나의 증명이니·
이고르의 외침은 이어졌다·
“야! 똑바로 하라니까!”
“좀 닥쳐봐·”
카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 눈에서는 이 자리에서 절대 치욕을 맛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제 제대로 할 테니까·”
카셀이 그리 읊조리며 검을 뽑은 순간 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수많은 카셀 인형이 나타나 한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러나 나는 도리어 눈을 감았다· 주변에 마나를 얇게 방사했고 그걸로 족하다·
‘나름 각오는 보인다·’
움직임· 그것 하나만큼은 공들인 것이 느껴진다·
정교함·
인형 하나하나가 다른 생명체인 듯한 움직임 각기 표적의 다른 급소를 노리는 노련함·
마법의 소환 계열과 비교하더라도 꽤 쓸만한 수준이다· 실제로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소환수를 다루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를 상대로 고전했을 터·
그러나 늘 그랬듯·
나는 ‘상당히 많은 이’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검을 피해낸다·
분신의 검은 내 옷자락 하나 베지 못한다·
아니 나의 머리카락 한 올 베이지 않았다·
결국 모든 동작에는 미세한 파동이 존재하고 넓게 방사된 마나로부터 그 정보를 전달받는다·
이 전달이 차단되지 않는 한 검격에 당해주는 일은 없다·
촤악─!
화랑을 부려 본체의 얼굴을 가볍게 긁어주었다· 그의 볼에 붉은 선이 생겨나 핏방울이 맺혔다·
카셀이 당황한 얼굴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내가 본체인 걸···· 알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라·
카셀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둘째를 찾는다·
“···웬디· 저 자식 뭐야·”
“뭐가·”
“뭐하는 놈인지 마나는 얼마나 남았는지 뭐 어떤 것들이 보이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보라고! 좀 대충 말해도 알아처먹어!”
결국 카셀이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네 남매의 둘째 웬디는 일단 잠자코 검을 뽑아 들었다·
웅 소리를 내며 웬디의 검이 신묘하게 울었다· 동시에 나는 미간을 두드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머릿속을 읽는 검인가· 흥미가 동한다·
나는 그것에 저항하기는커녕 환대했다· 마법 간섭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도 궁금하여 기꺼이 내 머릿속을 열어주었다·
웬디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또한 입을 열었다·
“우선····”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매듭짓는 일은 없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웬디가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기울이고 카셀은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해· 빨리·”
“···어·”
웬디가 좀 더 집중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뱀의 형상을 지닌 사념체가 내 머릿속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느낌인가·’
2학년 기사 생도의 정신력은 어느 정도일지 나는 지금부터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똑같이 생긴 사념체를 머릿속에 그려냈다· 아니 그렇게만 하면 재미 없으니 크기를 배로 키웠다·
계속해서 끝도 없이 키워나갔다·
“···!”
잠시 후 웬디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히 히익!”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인간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힉! 히이익! 으 으으!”
그녀가 주저앉은 채 검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팔이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너···· 너 뭐야! 뭔데! 히이이!”
“남의 정신을 교란하려면 본인 정신부터 가다듬어야지·”
짧게 덧붙이고 나는 화랑이나 마저 부렸다· 얼마 남지 않은 분신들을 모조리 치워냈다·
“····”
그리고 어느 순간 세 남매의 공격이 완전히 멎어들었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벌써 끝인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시시하군·”
이젠 대놓고 무시해도 돌아오는 반항이 없다· 나는 화랑을 시켜 그들을 덮치게 만들었다·
“읏!”
화랑이 자세를 낮추자마자 녀석들이 방어 태세를 취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만두었다·
“됐다· 앉아라·”
바닥에 불씨 하나를 뿌렸다· 화랑은 그 지점에 얌전히 궁둥이를 붙이고 부동자세를 취한다·
“····”
그것을 지켜본 세 남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뒤덮였다· 이해는 간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화랑이 애완견처럼 다루어지고 있으니·
나는 옷깃을 펴며 입을 열었다·
“물을 것이 있는데·”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너희의 검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있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니 아니다· 됐다·”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도움이 될만한 대답은 듣지 못 하리라·
나는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너희는 고유 능력을 사용한다지만···· 글쎄 전혀 고유해보이지가 않아· 내가 아는 기사는 이렇지 않았다·”
“건방진 새끼·”
그 목소리는 동쪽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네 남매의 첫째 엘라였다· 뒤늦게 도착한 그녀가 세 남매에게 한 마디 했다·
“다들 뭐해·”
그녀가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핥으며 전황을 살폈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너희들 꼴이 왜 그래· 웬디는 또 뭐고·”
웬디는 아직도 주저앉은 채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나머지 둘은 우물쭈물할 뿐 대답을 않는다·
엘라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어렸다·
“어려운 거 아니잖아· 이고르가 달려들고 카셀은 인형검 쓰고 웬디는 귀안도로 정신을 베어버려· 그렇게 해·”
검에 각각 그런 이름이 붙어있었나·
여튼 엘라의 지시는 세 남매가 이미 시도했던 것들이다· 앞으로 몇 번을 더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아····”
엘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다 비켜있어·”
그녀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아주 얇고 기다란 바늘의 형태를 닮은 기형검이었다·
엘라가 더없이 강한 살기를 뿜으며 읊조렸다·
“내가 혼자서 다 할 테니까·”
우리는 말 없이 대치했다·
“후우우····”
호흡을 들이마시며 엘라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관찰했다·
‘···신기하군·’
그녀의 검 끝에 투명한 실이 수없이 묶여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이 매어져 있는 채였다·
놀랍게도 저 실 하나하나가 전부 얇은 검이다·
호흡을 고른 뒤 엘라가 한 마디 뱉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엘라·”
“하·”
코웃음을 치고서 엘라는 즉시 검을 움직였다· 마치 지금부터는 검으로만 오롯이 대화하겠다는 듯·
하나·
또 하나·
그녀의 실이 거미줄처럼 넓게 펼쳐진다· 각각의 실이 띤 예기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하나·
또 하나·
이윽고 그 거미줄의 파도는 해일처럼 커졌다· 사검(絲劍)의 파도가 주변 일대를 완전히 헤집기 시작했다·
투명한 실이 빛을 반사하며 만들어내는 반짝임이 아름답다· 하나 그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천라지망·
본인의 공격이 자신도 만족스럽다는 듯 엘라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솟아올랐다·
콰과과과─!
주변이 온통 뒤집어진다· 지반이 튀어 오르고 허공에 띄워진 것들은 큐브 조각처럼 예외 없이 잘게 갈려 나갔다·
“엘라···!”
“무슨!”
오히려 이고르와 카셀이 그리 외쳤다·
하긴 이 공격의 위력은 그들이 가장 잘 알 터·
육체를 퍼즐처럼 도륙 내는 일격· 송환석을 지닌 학생을 상대로도 쉽게 시도할만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의 내게는 송환석이 없다·
“똑똑히 봐· 난 검으로 말하니까·”
문득 엘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뜰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쪽은 마법이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기형검· 색다른 경험이기는 하나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조화에서는 향이 나지 않는 법이지·’
마법에는 원리가 있다·
상상에 불과한 술식을 회로로 설계하고 마나를 배합하여 현실로 만들어내는 기적· 그것이 마법·
그러나 이 고유 능력은 공허하다·
단지 어느 날 주어졌을 행운 나는 이것을 저주라고 여긴다·
조화는 향을 가질 수 없다· 조화가 향을 갖기 위해선 향수 따위를 뿌려 향을 더해야 한다·
그리고 향수는 언젠가 휘발되기 마련·
가짜라는 말이다·
찰나의 순간·
내가 선보일 마법의 고민을 마쳤다·
마법의 원리를 전부 이해하고 있다면 보여주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 따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술식의 복잡함 시간의 촉박함 계산의 난도···· 그 모든 제약이·
카플란·
내 이름 앞에 부질없기를·
양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천천히 떼어내자 푸른 마나가 실처럼 쭈욱 늘어진다·
그것을 쏘아냈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엘라의 투명한 사검 속에서 나의 푸른 실들이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십자수·
수많은 사검이 일개 새하얀 도화지로 전락한다· 푸른 실들은 그 위에서 춤을 추며 그려내고자 하는 것을 가감 없이 박아넣었다·
카가가각─!
두 개의 실이 잔뜩 뒤엉킨다·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공방을 나눈다·
그리고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넋을 잃을때쯤·
그것이 문득 예술의 형상을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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